142화
산서행(11)
= 녹림 총채에 숨어 있던 그 셋과 접촉이 없었던 것 아냐? 성혈문 놈들과 접촉했던 SS-16의 숙주를 통해 포섭된 경우일 수도 있잖아?
- SS-16과 접촉한 기억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성혈문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녹림 총채 장악에 관한 모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총채주가 그들을 배신자로 몰았다?
거기에 총채주의 대응은 분명 나노 머신 보유자의 재생 능력을 아는 것이다.
설마, 성혈문과 손잡은 것은 수확 대상자가 아니라 총채주? 하지만 총채주가 성혈문과 손을 잡아서 얻을 이득이 뭐 있다고?
= 전각 위에 있던 성혈문 놈들 지금 어디 있지? 내가 탈출할 때 안 보였던 것 같은데?
일단 성혈문 놈들에게 집중한다.
- SS-02의 숙주가 총채주에게 당한 직후 다시 전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영상이 떠오른다. 농꾼의 말대로 전각 안으로 몸을 숨기는 놈들의 모습이다.
= 전각 안에 다른 비밀통로 같은 곳이 있던가? SS-16의 숙주와 접촉한 그 공간 말고.
- 꿈틀이 파괴 당시까지 다른 공간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화면이 바뀐다.
- 현재 시점입니다.
놈들이 숨어 있는 전각으로 제압당한 녹림의 수확 대상자들이 옮겨지고 있었다.
젠장, 그런 거였군. SS-11을 추출해 응 시리즈 카피판을 만든 것이 성혈문이다. 그 능력이라면 나노 머신의 설정을 변경해서 숙주를 바꾸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나노 머신을, 성혈을 부여해 준다고 총채주를 꼬드긴 거였어!
아니 넘어간 것은 총채주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 녹림의 고수들이 상처 입은 수확 대상자를 후려칠 때 주저함 따위 없었지 않았나!
“멈춰!”
내 말에 일행들이 멈춰 섰다.
“상 노개와 부각주가 정신 차리면 녹림 총채를 친다.”
“각주, 무슨 말씀이신지?”
내 말에 호장우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본다. 간신히 빠져나온 녹림 총채에 왜 다시 들어가? 하는 얼굴이다.
“말 그대로네. 자세한 이야기는 상 노개와 부각주가 정신을 차리면….”
“끄응.”
마침 말안장에 엎어진 상 노개가 신음성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킨다.
“상 노개, 이제 괜찮으시죠.”
“어떻게 된 건가? 분명 죽는 줄 알았는데….”
내 단정에 상 노개가 자신의 상처를 살피며 물었다.
“상 노개가 드신 약 덕분이지요.”
“내상의 즉효 약이라며?”
“정확히는 내상, 외상 가리지 않습니다.”
“허.”
상 노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남궁화청이 안장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문위 둘이라니, 이런 몸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했어.”
“깨어나셨군요.”
“태행산 자체가 성혈문 놈들에게 넘어간 것이오?”
남궁화청이 물었다.
“녹림 총채주가 성혈문 놈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정의맹에 연락을 해야겠군요.”
“나도 개방에 연락해 천문위를 청해야겠어.”
내 말에 남궁화청과 상 노개가 앞다투듯 답했다.
탐탁지 않은 답들이다. 개방의 천문위에게 연락이 닿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정의맹은 화인천에게 통신을 넣으면 바로 지원 병력이 출발할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출발지가 절강, 남직례, 산동이다. 아무리 빨라도 성 하나를 넘어야 하는 일.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는 너무 늦는다.
성혈문이 녹림에 배정된 10기의 나노 머신을 추출할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다.
성혈문 놈들에게 다량의 나노 머신이 넘어가면 일이 보통 골 아파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천문위의 데이터로 남궁화청을 천문위로 만들었듯 저들도 천문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노 머신과 천문위의 데이터를 제공해 천문위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성혈문에 10명의 천문위가 더 해진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다. 천문위가 되기 직전까지 갔던 자들이 각자의 세력에서 낮은 위치에 있을 리 없으니….
“그보다는 당장 들이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지금 우리 전력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여타 전력은 젖혀 놓고 천문위만 셋이네!”
내 말에 상 노개가 바로 목청을 높였다.
“셋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하나입니다.”
= 농꾼. 총채주가 천문위 뒤통수치는 장면을 보여줘.
“이건?”
마*카*투 델타 덕에 상 노개도 영상을 볼 수 있었다.
“흠.”
“녹림의 내분입니다. 성혈을 가진 자에 대한 숙청이라고 할까요?”
“우리와 싸운 천문위 둘이 성혈을 가졌었단 말인가?”
상 노개가 물었다.
“성혈문도들이 말하는 성혈을 가진 자들은 총채주의 명에 나섰던 여덟 전원입니다.”
“성혈문과 손을 잡았는데, 성혈을 가진 자를 숙청했다고?”
상 노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조율후와 같은 경우입니다. 놈들은 이제 성혈을 가진 자들을 끌어들이기보다는 성혈 자체를 노리고 있는 듯합니다.”
“녹림의 천문위가 총채주 하나 남았다 해도 성혈문이 있지 않은가.”
성혈문에 드러난 천문위는 둘. 성혈문주와 황보숭 둘 다 총채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놈들이 하는 짓을 보면 다른 천문위가 없다고 자신할 수 없다.
“지금 총채에 있는 성혈문도 중에 천문위가 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멀쩡히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지금 녹림 총채에 없는 것은 확실했다.
“총채의 다른 고수들은? 우리가 싸울 때 나서지 않은 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네. 총채에는 나 못지않은 자들이 최소 셋은 있어.”
“그러니 더 서둘러야 합니다. 그들이 성혈을 얻으면 천문위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성혈을 얻으면 천문위가 된다? 거기에 성혈이란 게 빼앗아 남에게 줄 수 있는 거란 말인가?”
상 노개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그 눈에 의심이 서려 나를 쳐다본다.
“자네, 성혈에 대해 모르는 게 아니었군.”
젠장.
“정확하게 성혈이란 게 뭔가?”
상 노개가 물었다.
“하아.”
사실을 모두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대충 둘러대야 한다.
“피에 서린 무엇입니다.”
“피에 서린 무엇?”
“그게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피에 무엇인가 있습니다. 그걸 가지게 되면 상처를 입어도 보통 사람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빨리 낫지요. 내상이든 외상이든.”
“설마, 내가 먹은 영약이?”
상 노개가 놀란 눈이 되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피를 써서 만든 약입니다. 단순히 그 무엇을 가진 피를 마신다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거기에 맞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지요. 제가 가진 매와 영이 통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피 안의 그 무엇 때문이지요.”
나노 머신이라는 말을 해줘도 이해도 못 한다. 그러니 그냥 두루뭉술하게 말한다.
“성혈을, 그 무엇을 가지면 천문위가 된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상처가 빨리 낫는다는 것은 회복이 빠르다는 것이지요. 체력도 그렇고 심력도 그렇고, 이 회복이 빠르다는 것은 단순한 게 아닙니다. 사람 몸이라는 것은 쓰면 쓸수록 더 좋아지는 것 아닙니까? 한계가 오기 전까지는요.”
“그 말은….”
“회복이 빠르니 피로가 축적되지 않습니다. 범인과 한계치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범인이 하루에 무기를 천 번 휘두를 때 성혈을 가진 자는 이천 번은 휘두를 수 있습니다. 투로를 십여 번 곱씹을 때 스무 번 곱씹을 수 있지요. 그뿐입니까? 어지간한 내, 외상은 일이 각 안에 낫습니다. 목숨 내놓고 수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범인의 수준에서도 그런데, 그게 재능 충만한 자들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네가 성혈에 대해 입을 다문 이유를 알겠군. 만약 성혈에 대해 소문이 난다면, 그 성혈 안에 있는 무엇을 빼앗을 수 있다는 소문까지 같이 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하니….”
수확 대상자들, 성혈을 가진 자들을 영약 취급해서 빨아 먹으려는 작자들이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다.
상 노개가 정안각의 일곱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자네들 가문에도 해서는 안 될 이야기라는 것 정도는 알 테지?”
“상 노개, 우리 정안각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전원 당사자들이니까요.”
전원 수확 대상자. 성혈에 대한 소문이 나면 피를 뽑힐 대상자들이다.
“아, 그렇게 따지면 상 노개도 당사자라 할 수 있군요. 약효가 가시기 전까지는 성혈의 특징과 구분이 안 될 테니…. 혹시 소문내고 싶으시거든, 몸에 상처부터 내보시기를.”
“허, 아무 대책 없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었군.”
내 말에 상 노개가 어이없다는 눈을 했다.
“그럼, 이제 총채로 갈까요?”
“그러지.”
그렇게 태행산 녹림 총채의 습격이 결정되었다.
먼저 흐르는 물을 찾아 녹림의 추종향을 털어냈다.
상 노개도 체내에 마*카*투 델타가 있는 덕에 따로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태행산 녹림 정예들이 추적을 나섰지만, 그중 총채를 나선 초극 고수는 열도 되지 않았다.
솔직히 추적자들의 질이 어떻든 우리와는 상관없다. 어차피 매를 통해 추적자들의 실시간 위치를 전해 받고 피해 가면 그뿐이니 말이다.
절벽 위 초소의 사각으로 움직여 절벽을 기어오른다. 번초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움직였을 때, 절벽 위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십수 장 높이 절벽, 올라가는 것이 쉬운 사람들에게 내려가는 것이 어려울 리 없다.
조용히 내려서 번초들의 눈을 피해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일행의 목적지는 성혈문도들이 머무는 전각. 붉은 점이 몰려 있는 것이 보인다.
녹림의 핵심 인사 일곱이 전각 일 층에 모여 있다.
프로필을 띄워 보니 죄다 총채주의 인척들이다.
총채주는 보이지 않는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로 확인했다. 나왔다는 보고가 없었으니 지하의 밀실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설마, 총채주의 인척들이 저기 모여 있는 이유가 나노 머신을, 성혈을 받기 위해서인가?
- 상 노개, 이들 중 상 노개와 비견되는 자들이 있습니까?
상 노개에게 영상을 공유하며 묻는다.
- 셋 다 있군. 이자들이네.
일곱 중 늙어 보이는 셋을 짚으며 답한다. 총채주의 형제들이다.
영상은 정안각 일곱에게도 공유되는 상황.
- 내가 먼저 들어가 이들을 흩어 놓을 테니, 정안각 여섯이 나를 지키고 상 노개와 부각주 두 분이 협공으로 하나씩 처리합시다.
천문위를 앞둔 자들 셋이 협공으로 버티면 빠른 제압은 물 건너 갈 것이 뻔하다.
그러니 그들을 떼어놓고 처리하는 것이 최선.
대충 계획을 잡고 전각을 향해 움직인다.
모두 매와 시야 공유가 된 상태로 번초를 피해 움직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 마원의 위치는?
마원의 지원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그 위치를 확인한다.
- 절벽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호출하시면 전각까지 15초 걸립니다.
농꾼의 대답을 듣고 걱정 없이 전각 안으로 뛰어든다.
콰자작!
창문을 부수고 들어가기 무섭게.
오올!
번쩍!
섬광격의 광휘부터 터트린다.
그와 동시에 금속 분말을 넉넉히 삼킨 기막의 회오리를 뿌리니.
쾅, 콰콰쾅!
분진 폭발이 일어나며 눈먼 작자들을 사정없이 튕겨낸다.
전각 밖으로 날아가는 인영은 여섯.
“놈!”
분진 폭발에 날아가지 않은 한 명이 노성을 내지르며 나를 향해 달려든다. 천문위를 앞둔 셋 중 하나. 하지만 그의 상대는 내가 아니다.
“오로롤!”
“끼요옷!”
“까앗!”
호거술의 합창을 내지르는 정안각의 셋, 셋. 도합 여섯이 내 앞을 막아서서 하나를 상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