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산서행(08)
녹림에 웅크리고 있는 성혈문 놈들이 할 대처는 두 가지.
여태까지 벌인 판을 모두 포기하고 튀거나, 우리가 들이닥칠 걸 대비하고 그대로 진행하거나.
녹림 총채주를 습격한 일이 놈들의 수작이라면 그 목적은 녹림의 장악. 그냥 튀기에는 걸린 게 너무 크지 않나.
어떤 경우든 빨리 들이치는 것이 이득이다.
= 지하에 다른 통로는 없었지?
- 없었습니다.
= 지하에서 기어 나오면 매로 놈들을 추적해.
- 예, 리퍼.
“녹림 총채에서 성혈문 놈들을 발견했다.”
내 말에 늘어져 있던 일행들이 잽싸게 몸을 일으킨다.
“바로 투두투검과 합류한다.”
내 말에 일행들이 바로 천막을 뛰쳐나왔다.
“무슨 일인가?”
일행들이 떠날 채비를 갖추자 상 노개가 달려와 물었다.
“녹림 총채를 살피던 매가 성혈문 놈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녹림 총채로 가려고? 이런 식으로 무작정 달려가면 녹림과 싸우자는 것밖에 안 되네.”
상 노개가 기겁한 표정으로 나를 말렸다.
“투두투검을 앞세워야지요.”
“어디 있는지는 알고?”
“예.”
상 노개의 물음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가세.”
상 노개가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내가 마사로 움직이자 상 노개가 나를 잡았다.
“녹림 총채는 산중에 있으니 그냥 경공으로 내달리는 것이 낫지 않나?”
“저 말들은 보통 말들과 다릅니다. 나중에 몸을 뺄 때 필요할 겁니다.”
그렇게 둘러대며 마원에 오른다.
“상 노개는 저와 같이 타시지요.”
상 노개를 뒤에 태우고 내달리니 정안각의 일곱 기마가 뒤를 따른다.
“그나저나 투두투검에게 뭐라 말을 꺼낼 생각인가? 자네가 총채에 매를 보내 염탐한 사실이 드러나면 투두투검과의 연수가 어그러질 수도 있잖은가?”
상 노개의 말대로다.
태행산 녹림은 정파와 좋은 사이가 아니다. 이번의 연수도 성혈문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기에 하는 것일 뿐.
“그 부분은 상 노개가 맡아 주셔야지요.”
있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가는 상대의 반감을 살 경우가 크니 개방에 떠밀 수밖에 없다.
“개방 핑계 대겠다는 거군.”
“예.”
“그럼, 우리 개방도들이 무엇을 알아냈는가 들어볼까?”
상 노개가 웃으며 말했다.
이에 나는 녹림 총채의 위치와 SS-16의 프로필, 그리고 지하에서 그가 접촉한 셋의 인상착의 등 내가 알아낸 것들에 대해서 말해줬다.
“흠.”
그것들을 토대로 어떻게 사기를 칠지 고민하는 상 노개를 태우고 말을 달렸다.
태원 부도를 나서 동쪽으로 내달린다. 십 리를 가니 산자락이 나오고, 그 산자락을 말을 탄 채 오른다.
그렇게 산길을 타고 달려서 산중턱에 이르자 장원이 하나 나왔다.
태행산 녹림의 근거지 중 하나다.
인적 드문 산중 장원이라 문을 지키는 문지기도 없다.
쾅, 쾅!
대문을 힘껏 두드리니 잠시 후 사람이 한 명 나왔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투두투검과 내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소. 상황이 급박해 빨리 찾아왔소. 그러니 서둘러 주시오. 빨리!”
내가 눈을 부라리며 외치자 재빨리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투두투검이 튀어나왔다.
“상황이 급박해졌다니 무슨 소리요?”
“성혈문의 종적이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소.”
“무슨 말이오?”
“자세한 것은 내가 설명하지.”
투두투검이 묻자 기다리고 있던 상 노개가 나선다.
“평정주 분타의 방도들에게 온 연락으로….”
태행산 녹림 총채 근처의 대처가 평정주였다. 상 노개는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성혈문 놈들이 평정주 서쪽 산중에서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잔뜩 풍겼다.
“해서, 당장 그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네.”
총채의 위치 따위 모르는 척 상 노개가 말을 마쳤다.
“일단 총채의 방문 허가가 떨어졌으니 총채부터 들르시는 것이 좋겠소.”
투두투검이 말했다. 상 노개의 의도대로 성혈문 놈들이 녹림 총채를 상대로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총채에 배반자가 숨어 있는 상황, 우리를 데려가 총채의 배반자를 색출해내 위기를 넘길 생각이 만만인 것이다.
“놈들의 흔적을….”
“총채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소.”
마음이 급한 투두투검이 상 노개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렇다면야.”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투두투검에 동조했다.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총채까지 삼백 리.
정안각의 말들은 녹림도들에게 양보했다. 녹림도 중 대주의 싸움에서 아직 완치되지 않은 자들이 있어서다.
녹림도들에게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들이 초극 고수의 경공을 쫓아갈 정도의 명마는 아니었다.
어쨌든 마원을 끌고 갈 핑계가 생겼으니 나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녹림 추적대 스물이 더해진 일행은 바로 태행산 총채를 향해 출발했다.
한 시진을 열심히 달리자 관도를 벗어나 산을 타게 됐다. 야밤의 산행이었지만 일행들은 죄다 초극 고수들. 어둠 속에서도 주위를 구분하는데 문제없다.
말들 역시 마찬가지. 마원의 인도를 받아 위험한 야간 산행에도 문제없이 내달린다.
어두운 산길을 열심히 오르고 있자니 일단의 무인들이 앞을 막았다.
“여기는 외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 돌아들 가시오.”
그들 중 한 명이 나와 산 아래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총채를 지키는 정예들인 것이다.
“밤눈 어두운 거 자랑하냐? 나다!”
투두투검이 나섰다.
“순찰 아니시오? 내일 오시는 것 아니었소?”
상대가 투두투검을 알아보고 물었다. 투두투검의 원래 직위가 총채의 순찰인 모양이다.
“일이 생겨 서둘렀지. 총채에는 별일 없고?”
“채주들이 죄다 모여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소?”
“눈뜬장님들만 모였나.”
그 대답에 투두투검이 인상을 쓰며 짜증을 냈다. 개방도들은 찾아낸 것을 총채의 정예라는 것들이 찾아내지 못했으니.
“무슨 말씀이오?”
“됐고, 우리가 왔음을 알리게.”
투두투검의 재촉에 녹림의 정예 중 하나가 화살을 쏘아 올렸다.
삐이익!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사라졌다.
그리고 반 각이 되기도 전에 한 명이 산길을 타고 내려왔다.
“외부에서 오신 분들은 하나씩 받으시지요.”
새로 온 자가 내민 손에는 작은 주머니가 잔뜩 들려 있었다.
- 리퍼, 추종향 성분이 검출되었습니다.
= 대주 통로에 깔려 있던 그건 아니겠지?
- 성분과 냄새가 다릅니다.
“추종향 같은데, 우리가 사고 칠 때를 대비하는 것이오?”
내가 주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놓고 추종향을 주는 것은 총채 안에서 사고 치면 끝까지 쫓아가 죽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해하시오, 우리와 정파의 사이가 그렇게 훈훈하지 않잖소.”
“하긴, 그렇기는 하지.”
투두투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솔직히 추종향이 묻었다 해도 털어내면 그뿐이다. 정안각 인원들은 전원 나노 머신을 가진 수확 대상자들이니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 노개? 한 명 정도는 내가 털어 주면 된다.
상 노개와 일행들이 죄다 주머니를 받아들자 총채의 정예들이 길을 비켜 준다.
우리들은 투두투검을 앞세우고 다시 산길을 올라갔다.
총채는 십수 장 높이의 절벽에 둘러싸인 분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드러난 출입구는 절벽 아래로 뚫려 있는 동굴 하나.
문제가 생기면 동굴부터 틀어막을 게 뻔하니 총채를 빠져나가려면 절벽을 타고 넘어야 했다.
= 아직도 그대로야?
- 변동 없습니다.
성혈문 놈들은 여전히 동쪽 전각 지하에서 꿈쩍 않고 있다는 소리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 거지?
= 정안각 인원들에게 녹림 총채 정보 공유해.
- 예, 리퍼.
뭔가 일을 꾸밀 것이 분명하니 이쪽도 대비는 해야 했다.
투두투검은 우리를 접객당으로 안내했다.
“연통을 넣었으니 곧 총채주님과 채주들이 도착할 것이오.”
잠시 후 녹림 총채주가 도착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산도적 같은 건장한 체구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태행산의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들어선다. 총채에 있는 초극 고수들을 죄다 끌고 온 것인지 널찍한 접객당이 비좁게 느껴진다.
“정의맹 정안각을 맡은 이도연이 태행산의 총채주를 뵙습니다.”
무림에서 알아주는 거대 세력의 주인이니 주먹과 손을 맞대며 정중하게 예를 취한다.
“흠.”
총채주는 인사를 받아 주는 대신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고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상 노개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개방 장걸개?”
“수년 만에 뵈오. 총채주.”
상 노개는 무림 마당발인 개방 십대 고수답게 태행산 총채주와도 안면이 있는 듯했다.
“투두투검.”
“예, 총채주!”
총채주의 부름에 투두투검이 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멍청하게 적에게 속느냐?”
“총채주 무슨 말씀이신지….”
“저놈이다.”
총채주가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놈이 그날 나를 습격했다!”
무슨 개소리야?
“뭔가….”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강기의 무더기가 덮쳐든다.
동시에 상 노개와 남궁화청이 내 앞을 막아섰다.
쾅, 콰르르릉! 콰콰쾅!
상 노개의 양손이 누런 구렁이를 그려내고 남궁화청의 검이 벼락을 뿌려대니 날아드는 강기의 무더기가 그대로 뭉개졌다.
“총채주, 뭔가 오해를 하신 거요!”
총채주와 안면 있는 상 노개가 대화를 시도했다.
“오해? 본좌가 본좌를 습격한 놈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냐!”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총채주의 노성이다.
“하아!”
한숨이 나온다.
총채주가 나를 지목하기 무섭게 강기를 날리고 무기를 뽑은 놈들은 모두 여덟. 죄다 녹림의 수확 대상자들이다.
오해는 개뿔.
돌아가는 꼴을 보니 뻔하다.
성혈문 이 새끼들은 이미 녹림을 장악한 지 오래고, 산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나를 총채로 불러들이기 위한 수작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총채주를 비롯해 눈앞에 천문위만 셋. 거기에 천문위를 앞둔 놈이 하나. 거기에 초극 고수가 수십이다.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
- 아무래도 녹림 전체가 성혈문 놈들에게 넘어간 것 같습니다. 충격에 대비하시고 바로 몸을 뺄 준비를 하시죠.
상 노개에게 전음을 날리고 정안각 인원들에게 통신을 날렸다.
“타합!”
그리고 상 노개와 남궁화청의 앞으로 나서며 가지고 있는 금속 분말을 죄다 털어낸다.
“독이다!”
누군가가 경고성을 토하는 순간, 불꽃을 튀긴다.
콰콰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강력한 폭발이 몸을 사정없이 밀어낸다.
괜히 저항하지 않고 거기에 편승해 땅을 박찬다. 순식간에 접객당의 지붕을 뚫고 날아간다.
허공을 나는 와중에 주위를 둘러본다. 정안각 인원들 역시 나와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다.
낙오자는 없다. 상 노개도 곁에 있던 남궁화청이 잘 챙긴 상황.
문제는 그렇게 분진 폭발의 기세를 이용해 몸을 날린 사람이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딜 도망가려고!”
녹림의 천문위 둘, 오십 줄의 수확 대상자 둘이 땅에 내려서는 우리들을 덮쳐들고 있었다.
“타합!”
“핫!”
남궁화청과 상 노개가 그들을 맞이했다.
쾅, 콰콰쾅, 콰쾅!
“크흑!”
굉음과 함께 상 노개가 뒤로 튕겨났다. 남궁화청 홀로 천문위 둘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끼요옷!”
“까앗!”
“오로롤!”
정안각의 인원들이 호거술의 합창을 내지르며 남궁화청에게 가담했다.
그리고 시작되는 격전.
“젠장!”
도망가기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