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대비행(06)
천도공을 익히고 증강 현실 속에서 천문위를 상대로 뒹굴기를 보름째.
오늘의 상대는 황학약이다. 칼로 천문위를 이룬 고수. 내가 주로 쓰는 전투 감각 데이터의 원본이다.
같은 데이터를 쓰는 상대라 그런지 다른 천문위 보다 상대하기 훨씬 어렵다.
내 움직임을, 행동을 빤히 읽는다고 할까? 순수 무공으로는 5초를 버티기 힘들다.
“후우, 후.”
바닥에 대자로 뻗은 상태에서 숨을 고르고 몸을 일으키며 칼을 잡는다.
“시작하자.”
내 말에 황학약이 칼을 겨눈다. 쉰다섯 번째의 대결이 시작된다.
우웅!
단전의 울림과 함께 천도공의 힘이 전신을 질주하는데, 황학약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뒤로 훌쩍 물러남과 동시에 칼을 휘둘러 몸을 보호하며 사라진 황학약의 종적을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 대련 모드를 종료합니다.
황학약이 신묘한 보법으로 내 시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농꾼이 증강 현실을 종료한 것이다.
“무슨 일이야?”
- NZ-04의 연락입니다.
NZ-04, 남궁화청의 몸에 붙은 나노 머신이다. NZ-04에게서 올 연락이라면 뻔하다.
“된 거냐?”
- 예, 리퍼. 성공했답니다.
남궁화청이 천문위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데이터는?”
- 당장 자동 수확은 무리입니다.
자동 수확은 대상이 수면에 들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음파 통신으로 넘어온 남궁화청의 생활을 보면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운기 행공으로 피로를 풀고 수련의 연속이다.
하긴 나노 머신의 피로 회복 기능을 풀로 가동하면 평범한 사람이라도 며칠 자지 않아도 될 정도니.
“지금 상태는?”
- 운기에서 깨어나 휴식 중이라 합니다.
“축하나 하러 갈까?”
증강 현실 속에서 천문위를 상대로 연신 깨지기만 한 상태라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갓 천문위가 된 남궁화청의 데이터라면 내게 승산이 있을 수도 있지.”
엉망이 된 옷을 갈아입고 남궁화청이 틀어박힌 연공실로 향했다.
내가 연공실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연공실 문이 열렸다.
남궁화청이 내 기척을 느끼고 먼저 문을 연 것이다.
“귀신같이 알고 오는군.”
남궁화청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진 단주님의 요청에 멸왜단 총타에도 감시망을 깔아 놓은 탓이지요.”
남궁화청의 미소에 나도 입가에 웃음을 걸며 말을 이었다.
“천문위에 오르신 것을 앙축드립니다.”
“다 자네 덕택이네.”
“정안각 부각주의 자리를 맡아 주시는 겁니까?”
“자네 장담대로 내 천문위가 되었으니 나도 약조를 지켜야지.”
내 말에 남궁화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정안각 부각주로 대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각주.”
내 말에 남궁화청이 자신의 말투를 고쳤다. 이제부터 상관으로 대하겠다는 것이다.
“호신 강기를 억제해 주시겠습니까?”
“수련을 위해 내게 걸었던 술법을 해제하기 위해서라면 며칠 더 말미를 줄 수 없겠습니까?”
증강 현실을 통한 천문위들과의 대련을 모종의 술법으로 이해하기에 하는 소리다.
“아직 힘의 가감이 완전한 것이 아닌지라….”
무공 경지가 한 단계 올라서게 되면 보통 일어나는 문제다.
“술법을 해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각주가 천문위에 올라 술법의 전제 조건이 달라진 탓에 손을 좀 보려는 것입니다.”
당연히 거짓말. 남궁화청의 천문위 데이터를 수확하기 위해서다.
남궁화청이 호흡을 조절해 호신 강기를 억제하자 나도 그를 따라 호신 강기를 억제했다.
- NZ-04의 데이터를 업데이트합니다.
호신 강기의 방해가 사라지자 나노 머신 간의 데이터 통신이 원활해지고 천문위가 된 남궁화청의 데이터가 수확된다.
“사흘. 그 정도의 시간을 드리면 힘의 수발에 무리가 없겠지요?”
“그 정도면 될 듯합니다.”
남궁화청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품에서 스피커 장갑을 꺼내 남궁화청에게 넘겼다.
“이건?”
“음공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장비입니다.”
대강 설명을 하면서 손가락을 움직인다.
= 호거술 데이터를 넘겨.
“그리고 이건 호거술이라는 음공의 구결입니다. 강기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지요.”
내가 호거술의 구결을 불러주자 남궁화청이 두 눈을 반짝이며 경청한다.
“이 음공을 천문위도 사용 가능한지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천도공을 온전히 집중시켜 천문위의 흉내를 내면 전혀 반응하지 않는 호거술이지만 나는 천문위가 아니다.
진짜 천문위는 나 같은 흉내쟁이와 달리 호거술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뭐든지 확실히 하는 것이 좋았다.
“그럼, 그때 보지요.”
호거술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마치고 남궁화청과 헤어져 내 연공실로 돌아왔다.
“갓 천문위가 된 남궁화청의 실력을 볼까?”
칼을 잡고 증강 현실에서 남궁화청의 데이터를 불러낸다.
***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증강 현실 속에서 천문위들과 격하게 구른 남궁화청은 힘 조절이 가능하게 되었다.
“호거술은 천문위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남궁화청의 말대로다. 남궁화청도 환강을 증폭시킬 수 있는 음역대는 찾지 못했다.
평범한 검강을 증폭시킬 수 있는 음역대는 찾았지만, 그렇게 호거술을 운용해 힘을 아끼는 것보다 그냥 천문위의 공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효과적이란다.
“다행이군요.”
성혈문의 천문위가 호거술을 휘두를 가능성이 없어졌으니 입에 미소가 걸렸다.
정안각의 인원들을 연무장에 불러 모았다.
“모두 호신 강기를 억제해.”
정안각의 고수들이 내 말을 따라 호신 강기를 억제하자 그간의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왔다.
천문위인 남궁화청을 제외한 대원들은 모두 호거술에 익숙해진 상태다. 거기에 화인천을 제외한 여섯은 호거술의 합창도 제법 쓸만해졌다.
= 프로그램은?
- 전원 설치 완료했습니다.
= 매들은?
- 상공에서 대기 중입니다.
= 내려 보네.
- 예, 리퍼.
내 명에 정안각 인원들 앞으로 매가 한 마리씩 내려앉았다. 정안각 인원들을 위해 공방에서 새로 제작한 매들이다.
“어?”
“허?”
“뭐야?”
“내가 나를 보고 있어!”
“이게 도대체!”
신창양가의 셋과 황보세가의 둘이 갑작스런 현상에 기겁했다.
“이게 매와 영성을 통한다는 건가?”
나와 매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많이 알고 있는 호장우는 지금 자기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매가 보는 것들임을 바로 눈치 챘다.
“한 명에 한 마리. 매와 영통하게 했다. 매가 보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한다.
“하나, 둘, 셋…. 여덟. 이 자리에 있는 것만도 여덟인데? 영성이 통할 정도의 매는 다섯 마리뿐이라면서요?”
화인천이 내가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들먹이며 사기꾼 보듯 하지만 무시하고 말을 잇는다.
“매의 활용법은 부각주께서 잘 알고 계시니 틈날 때마다 부각주에게 배워 익숙해지도록. 부각주.”
“하명하시지요. 각주.”
내 부름에 남궁화청이 바로 답했다.
“정안각 대원들의 조련을 부탁드리오.”
“조련이라 하면?”
“천문위를 상대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야 하지 않겠소?”
힘껏 상대해 주라는 내 말에 남궁화청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본인에게 행했던 방법을 쓰면 될 듯합니다만?”
증강 현실로 굴릴 수 있으면 진작에 굴렸지.
“그건 개인에게 쓸 수 있는 거지, 다수에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증강 현실로 개개인을 굴릴 수는 있다. 천문위의 데이터 넘기고 증강 현실 프로그램만 깔면 체내의 나노 머신이 알아서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2인 이상의 합공은 나노 머신 간의 고용량 데이터 통신이 필수다.
합공 하는 인원의 움직임을 조합해서 증강 현실의 상대를 움직여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정안각의 인원들은 죄다 호신 강기를 이룬 초극 고수다. 고용량 초고속의 통신이 안 되는 것이다.
증강 현실이 불가능하니 천문위가 직접 상대해 주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안각 대원들에 대한 훈련은 죄다 남궁화청에게 떠넘기고 연공실에 처박혀 내 개인 훈련에 집중하는데….
“단주께서 찾으십니다.”
진우탁의 호출이다.
땀을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멸왜단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단주, 정안각주입니다.”
“들어오게.”
진우탁의 대답에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니 진우탁 말고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상 노개께서 절강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산동에서 안면을 익힌 개방 장걸개, 상 노개다.
“자넬 보러 왔네.”
“개방에서 성혈문 놈들에 대한 단서라도 찾은 것입니까?”
상 노개가 나를 보러올 만한 이유는 그것 외에는 생각나지 않기에 물었다.
“단서라면 단서겠지?”
상 노개가 묘한 웃음을 짓는다.
뭔가 느낌이 싸하다.
“어떤 단서를 찾으신 겁니까?”
“자네.”
내 물음에 상 노개가 대뜸 나를 가리키며 답했다.
“예?”
“내가 찾은 단서는 자네라고.”
내 어리둥절한 표정에 상 노개가 다시 한 번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슬쩍 인상을 쓰며 물었다.
“자네 성혈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나?”
대답 대신 상 노개가 나에게 되물었다.
“그런 놈들이 있다는 것을 산동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수확 대상자가 벼락을 맞았다고 그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 거짓말이 아니다.
“놈들이 말하는 성혈에 짚이는 것도 없고?”
“없습니다.”
성혈문은 나노 머신 보유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곳.
그 작자들이 성혈이라고 여기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나노 머신이다. 당연히 나노 머신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내가 정파의 굵직한 문파들 무공을 나노 머신들을 통해 수확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나면 무림 공적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니 말이다.
“황보숭은 자네를 성혈을 탐하는 대적이라 했네.”
상 노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적들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든 뭉개보려 했지만 쉽지 않다.
“황보세가에서 자네가 먼저 살펴야 한다는 셋 중에 성혈문도인 황보숭이 나왔지.”
“…….”
입을 닫고 있으니 상 노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는 황보세가에서 매와 영통할 사람을 뽑을 때 그 셋 중 둘을 쓰려 했고 말이야.”
“상 노개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자네 매와 쉽게 영통할 재능이 있는 자 중에 성혈문에서 말하는 성혈을 가진 자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
빌어먹을 거지 영감이 더럽게 잘 찍는다.
“흠.”
생각해 보면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에게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 노개가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주게.”
“뭘 말입니까?”
“자네가 가지고 있는 명단 말일세.”
“명단이라니요?”
“자네는 그 셋과 일면식도 없었어. 그런데 그 셋을 불러냈네. 그들을, 매와 영통할 재능을 지닌 자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내 말이 틀렸나?”
수확 대상자 명단을 넘기라는 소린데, 안 될 말이다.
명단 따위 없고 그때그때 매가 찾아내는 것이라 우겨 볼까? 아니 나중에 탈이 날 가능성이 크다.
“상 노개께서 짐작하신 대로 제게 명단이 있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