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대비행(01)
- 한 달 안에 내 경지를 천문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전음에 바로 남궁화청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 예.
황보숭의 경우로 이미 입증되었다. 그의 데이터를 보면 나노 머신의 설정을 바꾼 뒤 성혈 문주에게 천문위의 데이터를 얻어 천문위가 되었다.
황보숭이 성혈 문주에게 받은 것은 무공 데이터가 아니었다. 천문위의 전투 감각 데이터.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황보숭은 천문위에 올랐다. 그러니 같은 조건의 남궁화청이 안될 리 없다.
- 대가는?
절정의 끝에 닿았다고 죄다 초극 고수가 될 수 없듯, 초극의 끝자락에 섰다 해도 천문위가 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 무림의 현실.
자신의 몸에 자리 잡은 나노 머신에 아는 것이 없는 남궁화청이다. 내 제안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다.
- 원래 폐관 수련 기간을 어느 정도로 잡았는지요?
- 삼 년으로 잡았네.
- 짐작하고 계시듯 정안각의 일을 돕는 것으로 하지요. 예정된 폐관 수련 기간인 삼 년 동안.
- 삼 년이라, 가주의 허락을 받아오겠네.
신창양가까지 동행한 남궁화청은 그렇게 남궁세가로 돌아갔다.
신창양가의 셋과도 헤어져 홀로 멸왜단으로 돌아왔다.
“단주, 산동에서의 일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멸왜단 총타로 복귀하기 무섭게 진우탁의 집무실을 찾았다.
“고생했네. 그런데 성혈문이라는 암중 세력과 부딪쳤다 들었네만?”
진우탁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렇지요.”
“황보세가의 일에 그렇게 끼어들 필요가 있었나?”
천문위까지 부리는 암중 세력과 척을 지게 되었으니 심기가 편할 리 없다.
“저를 산동으로 보낸 것은 단주십니다만?”
뭐 세가의 요청이 있었지만 어쨌든 멸왜단 사람인 나를 정의맹 정안각주로 만들어서 보낸 사람은 진우탁이다.
“황보세가의 일은 불모의 유물을 마교가 차지하고 난 뒤에 일어난 일 아닌가.”
시간대를 따지자면 나도 할 말이 있다.
“남직례로 불똥을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수를 쓰다 보니 제가 그 일을 꾸민 성혈문 놈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벌어진 일이지요.”
“하아, 면전에서 고개 한 번 숙여서 늙은이 상한 속 좀 달래 주는 것이 그렇게 힘드나?”
내 대꾸에 진우탁이 투덜댔다.
“오십 대의 단주께서 늙은이 운운하시면 정의맹에 속한 세가의 가주 분들이 웃으실 걸요?”
“남직례로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세가의 요청을 덜컥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어!”
진우탁이 머리를 움켜쥐고 한참 후회하는 척을 했다. 내가 계속 앞에 앉아 있자니 고개를 들며 입을 연다.
“자네 안 가나?”
“단주,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마시죠. 정안각의 역할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 논의를 해야지요.”
“그 성혈문이라는 작자들을 상대하는데 자네가 꼭 나서야겠는가? 솔직히 어쩌다 마주친 상대 아닌가?”
천문위를 부리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내가 나서야 한다는 점이 불안한 것이다.
내가 잘못되어 매들이 사라지면 절강은 다시 왜구들이 설치는 과거로 돌아가니 말이다.
“그치들이 자네를 제거하려 했다 해도 자네가 당장 일을 방해했기에 나선 거지.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면….”
“적당히 넘어갈 상대라 생각했다면 황보세가를 정의맹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자네는 본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그 일을 하려면 돌아다녀야 합니다만? 그리고 제가 내세운 명분이 있는데 그치들이 자신들과 상관없다 여길까요?”
“하아,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원하나?”
내 말에 진우탁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제일 먼저 구민신창, 그분을 설득하셔야지요.”
암중 세력 따위 원래부터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창양가이고, 구민신창은 그런 신창양가의 현 가주다. 가주였던 아들이 가문의 내분으로 죽자 전대 가주였던 구민신창이 어쩔 수 없이 다시 가주 자리를 맡은 것이다.
신창양가는 양묵현이 주도한 내분으로 가주와 가문의 중진 여럿을 잃어 그 힘이 많이 약화된 것이 현 상황.
그런데, 천문위를 부리고 능숙한 초극 고수를 소모품으로 다루는 막강한 암중 세력과 싸우는 일에 동원되는 것을 좋아할 리 없다.
“산동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창양가를 들렀을 텐데?”
“대하기 쉬운 분은 아니잖아요.”
남궁세가와 경우가 다른 것이 신창양가다. 남궁세가는 감시망의 유지 등 내게 바라는 것이 있지만, 신창양가는 있는 감시망도 치우게 할 정도로 내게 바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편한 거래 상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지사.
“그래서 만만한 나에게 떠넘기는 건가?”
“격을 맞추자는 것이지요.”
진우탁은 어쨌든 멸왜단의 단주, 그가 움직이면 동맹 세력의 공식 요청이 된다.
“구민신창, 그 어른에게 한 소리 듣겠군. 그 다음은?”
“놈들을 추적하려면 정안각의 인원은 최소 초극이어야 합니다.”
“원하는 자들이 있나?”
“보시지요.”
진우탁에게 준비해 온 명단을 내밀었다.
“호장우에 화인천, 이쪽이야 우리 멸왜단 사람들이니 문제가 없네만, 다른 쪽 인원들은….”
성혈문은 수확 대상자로 이루어진 집단임이 분명하다.
그런 세력과 싸우려면 이쪽도 수확 대상자를 끌어 모으는 것이 최선이다. 뭐, 화인천은 수확 대상자는 아니지만….
“멸왜단주의 직인을 찍어서 협조 요청을 보내 주시지요.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 신창양가 쪽은 단주께서 힘 써 주셔야 합니다. 어차피 구민신창 노 선배에게 한소리 들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끄응. 이야기 끝났으면 이제 나가보게.”
진우탁이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소청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두 달 되려면 멀었네만?”
아, 전에 두 달 정도 걸린다고 들었지.
“그랬지요. 정신없다 보니 잊고 있었습니다.”
“또 할 이야기가 있나?”
당연히 있다.
“뇌응대를 며칠 썼으면 합니다.”
“뇌응대를? 왜?”
진우탁이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뇌응대를 어디 쓰겠습니까? 왜구 잡으려는 거지요.”
왜구 놈들에게 알아내야 할 것이 있다.
“알아서 하게.”
“공문 한 장 써 주시지요.”
그렇게 협조 공문을 얻어낸 뒤 진우탁의 집무실을 나서며 손가락을 까닥인다.
= 왜구들 동향은 어때?
- 절강으로 들어오려는 왜선들은 열의 한둘이고, 그마저도 해상 감시망에 걸려들어 박살나고 있습니다.
= 당장 왜놈들을 잡으려면 바다 멀리 나가야 한다는 소리군.
- 예.
= 감시 구역을 넓혀 왜선을 물색해놔. 선단이면 더 좋고.
- 예, 리퍼.
농꾼의 대답을 들으며 뇌응대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서는 화인천과 뇌응대원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귀원공으로 예단심법을 대처한 화인천은 절정 무인 열둘을 상대로 제대로 된 초극 고수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혜예와 경철운은 한쪽에서 느긋하게 구경하는 중이다.
“누님, 너무 인천이 놈만 부려 먹는 거 아닙니까?”
둘에게 다가갔다.
“심장이 한 번 멎었던 나나 허리가 끊어졌던 곰에게 저 짓을 하라고?”
진혜예가 슬쩍 인상을 쓰며 내 말을 받았다.
“내 두 사람을 완벽히 고쳤다 자부합니다만?”
“뇌응대 내부 일이니 정안각주께서는 상관 마시지요.”
이번에는 경철운이 정색한 척 내 말을 받는다.
“산동의 쟁탈전이 살벌했다 들었는데 사지 멀쩡하구나.”
“저 녀석이 누굽니까? 염왕적의입니다. 잘려 나갔어도 스스로 붙일 놈이지요.”
두 사람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물론 내가 내민 협조 공문에 그 반가운 얼굴이 구겨지는 것은 순식간.
“오래간만에 얼굴 본다 했더니 일이냐?”
“그러게 말입니다. 각주가 되었는데 술 한잔 살 생각도 없어 보이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누님. 술은 나중에 시간 나면 사지.”
진혜예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경철운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산동 이야기 좀 해봐. 장보도로 산동이 뒤숭숭한 틈을 타 성혈문이라는 놈들이 튀어 나와 황보세가를 뒤집을 뻔했다면서?”
성혈문이 장보도 소동의 배후라는 것은 정의맹을 비롯한 소림, 개방의 수뇌부들만 아는 일이다.
성혈문이 장보도의 배후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장보도로 인해 피를 본 사람들의 원한이 황보세가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황보세가의 일족인 황보숭이 성혈문의 문도니 같은 혈족이 일으킨 문제의 책임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명분으로 양산박 수채가 나서기라도 한다면 산동에서 피가 잔뜩 흐를 수밖에 없다.
아니 황보세가와 양산박의 싸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황하 수채들과 정의맹의 싸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소림과 개방은 물론, 정의맹에서도 성혈문이 장보도의 배후라는 사실을 숨긴 것이다.
“천문위가 최소 둘에 초극 고수 수십은 될 암중 세력입니다.”
“못해도 오대세가 정도의 세력이라는 거네.”
내 말에 진혜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놈들을 쫓아야 한다니, 도연 자네도 참 고생이군.”
경철운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서 정안각은 초극 고수로만 구성될 걸세.”
내 말에 진혜예와 경철운의 얼굴이 구겨진다. 멸왜단에 속한 초극 고수 중에 내가 쉽게 부릴 수 있는 사람하면 바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응대의 유일한 초극을 빼가겠다는 거야?”
“왜구 중에 합공으로 강기 쓰는 놈이 있다는 것을 알잖나. 인천이 놈 없으면 곤란해.”
진혜예가 언성을 높이고 경철운이 뇌응대에 초극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왜구의 합공은 음공 기반이라 누님 사자후로 간단히 깨트릴 수 있지. 누님, 그렇지 않습니까?”
초극 왜구의 호거술도 깨트리는 것이 진혜예의 사자후다.
“멸왜단은 왜구를 상대하는 게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진혜예가 뚱하니 말했다. 성혈문의 일은 황보세가의 일로 알려져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하다.
진혜예의 말대로 멸왜단은 왜구 박멸이 제일 우선인 조직. 그리고 멸왜단이 행하는 왜구 박멸의 핵심은 뇌응대의 초극 고수가 아니다. 내가 부리는 매들이지.
“성혈문이 저를 잡아 죽이려는 상황입니다만?”
멸왜단 입장에서는 내 호위를 단단히 해야 하는 상황이다. 화인천의 차출은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 대주 되고 이제 좀 편해지나 했더니!”
진혜예가 투덜댔다.
“도연 형님, 산동에서 고생하셨다 들었습니다.”
대원들과의 훈련을 끝낸 화인천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래, 고생 좀….”
“훈련 끝났으면 애들 준비시켜.”
내가 화인천의 말을 받아주려는데 진혜예가 내 말을 툭 하니 끊는다.
“예?”
“출동이다. 정안각주님께서 왜구 놈들에게 알아낼 것이 있단다. 왜구 몇 놈 잡으러 가야 해.”
경철운이 말을 보태며 빨리 서두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화인천은 다시 뇌응대원들을 향해 돌아갔다.
“누님, 무슨 이야기도 못 하게 합니까?”
“뇌응대 내부 일이니 정안각주께서는 상관 마시지요.”
진혜예가 경철운이 아까 했던 소리를 그대로 뱉어냈다.
당연히 반쯤 투정 섞인 농담이다. 뇌응대의 출동 준비가 끝나고 쾌속선에 올라탔다.
쾌속선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쾌속선의 후미와 양옆에 덮개가 덮여 있었다. 목혜를 신고 쾌속선을 미는 인원이 외부에서 관측되지 않게 하려는 조치다.
무슨 소리냐 하면 해가 떨어지지 않아도, 사람 없는 해상으로 나가지 않아도 주위 눈치 보지 않고 절정 무인들을 엔진 삼아 쾌속선이 달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