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산동행(18)
- 리퍼, 육성을 내고 계십니다.
= 놀라서 그런 거잖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인터페이스가 왜 튀어 나오냐고!
내가 권한을 준 수확 대상자들도 체내에 있는 나노 머신의 자체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게 아니다.
농꾼이 제공한 걸 사용하지.
- 외부 자극에 나노 머신의 설정이 일부 변경된 듯합니다.
= 그게 저런 식으로 되는 거냐고?
- 흑의인, 자칭 성혈 문주의 주장대로라면 벽력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고 SD-03 황보숭의 실사례가 존재합니다.
현실 부정하지 말라는 소리다.
= 아무리 그래도 벼락 맞아서 나노 머신의 설정이 변경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호신강기를 억제했다 해도 나노 머신의 자체 방어 기능이 있는데! 내가 전격을 날려도 씨알도 안 먹혔잖아.
- 리퍼가 쓰는 전격 공격과 자연이 만들어내는 벼락의 전압 차는….
= 그만.
- 리퍼.
= 이 이상 떠들어 봐야 답 안 나올 문제잖아. 황보숭 당시 데이터 확실히 파악해. 벼락에 지져진 차례와 타이밍, 몸에 가해진 전압, 전하량, 모조리 기록되어 있을 거 아냐?
- 그렇습니다.
= 되나 안 되나 직접 한번 해보자고.
황보세가가 정의맹 가입을 원했으니 검증은 당연한 일이다.
매와 시야를 공유하는 술법을 펼친다는 핑계로 황보세가 수확 대상자 한 명에게 그대로 실험해 보면 되는 일이다.
황보세가의 정의맹 가입 승낙 소식을 물고 응3이 돌아온 것은 이틀 뒤다.
현 정의맹에는 명목상의 맹주도 없는 상황. 남직례 두 세가의 가주와 멸왜단주가 동등하게 협의해 정의맹을 이끄는 탓에 응3이 세 곳을 다 돌고 온 것이다.
물론, 도착한 것은 응3 만이 아니다. 황보세가에 구축될 감시망에 쓰일 서생원 알파 개체들과 사라진 응5를 대신할 매, 그리고 실험에 쓰일 물건들이 도착했다.
서생원 알파들은 황보세가에 풀어 놓기 무섭게 개체 수 증식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검증만 통과한다면 황보세가는 정의맹의 일원이 되는 겁니다.”
검증의 방법을 설명하고 하는 말이다.
“황보숭, 그놈 말고도 다른 놈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군.”
“신창양가의 경우를 보시지요.”
이럴 때 팔아먹기 좋은 것이 바로 신창양가의 일이다.
세가 내에 몸을 숨기고 있는 천문위의 고수. 그만한 고수가 괜히 자신의 무력을 숨기고 있었겠는가?
신창양가의 경우처럼 대형 사고를 치기 위해서다. 그런 대형 사고를 치려면 혼자서 가능한가? 일당이 있을 것이 뻔하다.
그렇게 생각의 순서를 밟을 수밖에 없다.
“군과 성, 그 둘이 필요하다고?”
황보천이 슬쩍 인상을 쓴다.
그 둘은 황보세가의 수확 대상자들이다. 황보숭과 함께 불렀던 이십 대의 둘인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 안 되나?”
혈족인 황보숭이 배반한 마당이다. 거기에 황보군과 황보성은 이미 내가 의심스럽다 찍었던 둘 아닌가. 아무리 혈족이라지만 그 둘이 감시망의 관리자가 되면 세가의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을 믿기 힘든 것이다.
“안심이 되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그렇네.”
내 말에 황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속 밀어붙일 수는 없다.
“그럼, 다른 사람으로 하지요. 하지만 그 둘이 아니라면 영단의 소모가 배로 큽니다.”
“한 달에 공정단(鞏淨團) 네 알 정도는 감수하지.”
공정단은 황보세가의 비전으로 빚어내는 영단이다. 소환단 정도의 가치는 되는 약이다.
“시야 공유가 성공하면 유지비로 그 정도 들어가는 것이고 재능 없는 자에게 대법을 시전하려면 영단이 열은 필요합니다.”
“감수하지.”
“그렇다 해도 그 둘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내 말에 황보천이 물었다.
꺼림칙해서 둘을 뺀 것인데 둘이 필요하다니 되물을 수밖에 없다.
“간단히 설명하면 그 둘의 재능을 빌려와 재능 없는 사람과 매를 묶는 겁니다.”
어쨌든 실험은 꼭 해야 하니 그럴듯한 소리를 지어낸다.
“아, 그리고 도중에 그 두 사람의 피를 볼 확률이 높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죽거나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건가?”
“죽을 일은 없습니다. 다치더라도 며칠 내에 일어날 수준입니다.”
“그럼 상관없네.”
그렇게 벼락으로 나노 머신의 설정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 준비가 끝났다.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실험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오늘 하루 정의맹 정안각주의 명이 가주 명이라 생각하고 따르거라.”
가주의 말에 황보군과 황보성이 군말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그 둘을 데리고 황보세가에서 내어준 연무실로 들어갔다.
연무실에는 내가 부탁했던 대침들이 한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그뿐이랴 연무실 중앙에 마련된 두 사람이 들어가 서 있을 수 있는 사각기둥 형태의 구조 틀도 있었다. 막히지 않고 몇 층계의 뼈대로만 이루어진 구조 틀이다.
“두 분 다 잠시, 호신강기를 억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황보성과 황보군은 군말 없이 공력을 억제했다.
= 농꾼?
- 프로그램 인스톨 완료. 작동합니다.
시야 한쪽에 작은 화면 둘이 뜬다. 황보성과 황보군 둘의 시야인 것이다.
그렇게 그 둘의 시야를 바로 확인할 수 있게 조처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두 분 다 옷을 모두 벗으시고 연무실 중앙의 저 사각 틀 안에 서시면 됩니다.”
내 말을 따라 그들이 옷을 벗고 사각 틀 안에 선다. 나는 그들을 그렇게 잠시 세워 두고 내 할 일을 했다.
준비된 대침에 공방에서 제작한 실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대침에 실들을 모두 연결하자 시야로 증강현실이 덧씌워진다.
둘이 있는 중앙으로 가자 둘의 몸에 대침을 꽂을 자리가 표시된다. 그 표시를 따라 손을 움직여 하나하나 대침을 꽂는다. 물론 그냥 꽂는 것도 아니다.
- 10.4, 12.7, 15.6, 13.1….
농꾼의 지시에 따라 정확한 깊이로 쑤셔 넣는다. 그렇게 둘의 전신에 빼곡히 대침을 꽂아 넣고 실들이 서로 닿지 않게 정리해 사각 틀의 층계 위에 정리해 늘어놓는다.
“눈을 감고 공력을 제어해 호신강기를 억제하시지요. 좀 아프더라도 참으셔야 합니다.”
- 리퍼, 신호가 잡히기 시작합니다.
나노 머신의 신호가 잡힌다는 것은 호신강기가 제어되었다는 말.
= 시작해.
내 양손이 검게 물든다. 그리고 정렬된 실들을 향해 벼락이 친다.
파자작, 파작!
철 이온을 듬뿍 먹은 실들이 내가 뿌리는 전격을 두 사람의 요혈로 전달한다.
황보숭의 데이터에 기록된 순서와 강도대로 전격이 전달되니 두 사람의 몸이 사각 틀 안에서 요동치듯 비틀린다.
전격이 멈췄다.
“허, 진짜 된다고?”
어이가 없다. 시야 한쪽의 두 화면, 황보성과 황보군의 시야에 나노 머신의 인터페이스가 떠오르고 있었다.
벼락을 맞는 순간 몇 개의 우연이 겹치면 나노 머신의 설정이 바뀐다는 소리다.
“이건 도대체?”
“눈앞에 뭔가 이상한 것이 보이는데 어떻게….”
“아직 안 끝났습니다. 계속 호신강기를 억제하고 계세요.”
일단 이들을 원래 상태로 돌려야 했다. 나노 머신을 해킹해야 한다는 소리.
퍼퍽!
호신강기를 제어하고 있는 그 둘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농꾼의 해킹 전이 시작되었다. 농꾼의 원활한 해킹을 위해 둘의 몸을 여기저기 들쑤셔야 한다는 소리. 둘을 기절시킨 탓에 뒷일은 쉬웠다.
“크윽.”
“으윽.”
두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 해킹이 마무리되고 상처가 대부분 치유가 된 상태라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내게 습격당해 기절했다는 정도.
“도대체 왜?”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요?”
나노 머신이 몸을 치료했다 하나 주위에 뿌려진 피의 흔적을 지우진 못했다.
“가주께 듣지 못하신 겁니까? 그렇다면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군요. 이제 끝났으니 옷을 입으셔도 됩니다.”
실험은 그렇게 끝냈다.
***
감시망으로 남궁세가를 탈탈 털었듯 황보세가도 탈탈 털었다.
칠주야 동안 감시망을 동원했지만, 성혈문이라는 곳의 간자들은 찾을 수 없었다. 없는 건지 찾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무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양산박 수채에서 보낸 간자들이 잔뜩 걸려들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검증이 끝났고 황보세가는 정식으로 정의맹의 일원이 되었다.
“따로 전력을 모아 운영하는 것은 아니고 사람을 보낼만한 곳은 당장 자네가 각주로 있는 정안각이라 그거군.”
황보천이 두 눈을 부라린다.
정안각의 구상이 애초의 것과 완전히 달라졌다.
애초 구상은 그저 각 세력의 얼굴마담들을 내세워 있지도 않는 암중 세력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느긋한 수확행을 즐기는 것이었는데….
망할 성혈문이라는 놈들이 갑작스레 튀어 나오는 바람에 놈들을 추적하는 무력 집단처럼 인식된 것이다.
그냥 때려치우고 싶지만, 정체불명의 성혈문주란 작자가 수확 대상자인 게 분명했다.
거기에 가만히 놔두면 이놈들은 수확 대상자들을 찾아가 세를 불릴 가능성이 컸다.
나노 머신에 기록된 무공 수확을 무림인들의 감성으로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나를 적대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입장이다.
“놈들은 탄강을 사용하는 능숙한 초극 고수들도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곳입니다. 그런 놈들을 쫓아야 하는 곳이니 초극 미만은 받기 힘듭니다.”
그러니 나도 어서 절강에 가서 진우탁에게 사람 내놓으라고 징징거려야 할 판이다.
“쓸만한 사람을 뽑아놓지. 언제 다시 움직일 생각인가?”
“때가 되면 연락하지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보천과 작별 인사를 하고 일행과 함께 황보세가를 나선다.
= 마교 놈들의 동향은? 그쪽에 뭔가 변동 있나?
성혈문 놈들이 마교와 접촉할 것을 대비해 응4를 붙여 놓았었다.
- 육로를 통한 이동이 아니라 배를 타고 바다로 이동 중입니다.
농꾼의 대답이다. 당장 마교 쪽에서 무슨 단서가 나오기는 힘들다는 소리다.
= 공동에 남아 있던 군웅들은?
마교 놈들에게 부상을 입은 초극이 수십이었다. 그들을 제압해 소모품으로 끌고 가지 않을까 기대하고 꿈틀이를 잔뜩 붙여놨는데….
- 성혈문의 접촉 징조는 없습니다.
하아, 이쪽도 꽝이다.
= 이렇게 되면 한동안 수확은 멈춰야겠군.
- 리퍼, 명확한 이유를 요청합니다.
농꾼이 바로 반응한다.
= 성혈 문주란 놈 천문위다. 황보숭 그놈도 천문위지.
성혈 문주에게 데이터를 받아서 천문위가 된 것이다.
- 확실히 그렇습니다.
= 최소 천문위 둘이 나를 죽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인데, 아무런 대책 없이 나돌아다니는 것은 좀 아니잖아?
- 초극 이상의 고수가 접근 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내가 한 번도 기습을 안 당했어? 땅속에 숨어 있다가 튀어 나오면 수가 있어?
절강에서 초극 왜구들에게 당했을 때는 진짜 아찔했다.
그저 이쪽에 대한 몇 가지 정보만 있어도 그 정도의 함정을 팔 수 있는데, 놈들은 어쨌든 나노 머신까지 굴릴 수 있지 않은가.
어떤 식으로 치고 나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천문위가 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당장 천문위가 될 방법이 없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다.
“남궁 대협, 이야기 좀 하지요.”
“할 이야기 있으면 하시게.”
남궁화청의 대답에 나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었다.
“이번에 돌아가시면 예정된 일이 있습니까?”
“정안각에 손이 필요한 건가?”
내 말에 바로 묻는다.
“예.”
현재 정안각의 확실한 인원은 각주인 나밖에 없다. 남궁화청이나 신창양가의 셋은 산동에서 일어난 쟁탈전의 불똥이 남직례로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임의로 배정된 인원들이다.
“나는 본래 폐관 수련이 예정되어 있었네. 불모의 장보도 때문에 폐관 일정을 뒤로 미루고 파견된 것이지.”
“천문위를 노리시는 겁니까?”
“그렇네.”
남궁화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정도 제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 천문위로 만들어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