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산동행(15)
남궁화청과 데이터를 공유하는 김에 쓰러져 있는 양연곤과도 공유한다.
농꾼이 조사한 이 일대의 지질 데이터와 굴착 계획은 물론, 이산화탄소에서 산소를 분리하는 공정도 주입한다.
셋이 품은 나노 머신들이 산소를 재생하면 일행들이 산소 결핍으로 쓰러질 일은 없을 것이다.
“대강 어떻게 땅을 파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떠오를 것입니다. 그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매와 통하듯 자네와 내가 통하게 된 것인가?”
남궁화청이 놀랍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술법으로 제 생각을 보여드린 것이지요.”
“대단하군.”
길게 감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아는 남궁화청인지라 바로 몸을 움직인다.
검강을 일으켜 암반을 자른다. 자신이 움직일 공간부터 확보한 뒤 신창양가의 쌍둥이에게도 일거리를 줬다.
“자네 둘은 나와 이 각주가 파낸 잔해들을 처리해 공간을 확보하게.”
나와 남궁화청이 강기로 암반을 잘라내면 둘이 그것을 뒤로 치운다.
땅을 파내는 두 사람이 움직이고 신창양가의 셋이 있을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했다. 암벽을 잘라낸 잔해가 크면 신창양가의 쌍둥이들이 조각내어 어떻게든 최소 공간을 확보한다.
작업이 시작되고 반 각쯤 지나자 양연곤이 일어났다.
땅을 파고 나가는 데는 둘이면 충분했다. 양연곤은 최소 공간 확보 작업에 투입되었다.
NJ-03이 숙주인 양연곤을 보조하자 더욱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앞을 뚫고 뒤를 메꾸면서 전진하기를 두 시진쯤 반복했을까?
쾅!
앞을 막는 암반에 구멍이 뚫렸다.
“끝이다!”
남궁화청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벼락같이 검을 내질러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구멍을 넓혔다.
“밖이 아니야.”
남궁화청의 말대로다.
도착한 곳은 우리가 파묻혔던 곳보다 곱절은 넓은 동공이다. 아니 그냥 넓기만 한 게 아니다. 높기도 하다.
그리고 동공의 정중앙에 우뚝 솟은 층계가 심상치 않다.
“통로가 하나가 아니군.”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개나 되는군요.”
내가 층계에 관심을 가질 때 남궁화청과 양묵일은 동공에 뚫려 있는 통로를 보고 있었다.
“각주.”
남궁화청이 나를 불렀다. 나갈 길을 찾으라는 소리다.
꿈틀이 하나씩 던져 놓을 생각으로 가까운 통로로 발을 옮기려는 찰나에 예민한 귀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걸려든다.
소리는 순식간에 커지더니 다섯의 통로에서 십수 명씩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는?”
“저 중앙의 층계 수상하지 않나?”
“저기에 유물이 있을지도!”
불모의 유산을 쫓던 무인들이다. 대다수의 무인들이 동공 중앙의 층계로 몰려갔다.
하지만 나와 가까운 통로에서 나온 무인 열다섯은 층계로 달려가지 않았다.
“벽력응주?”
“정의맹 놈들이다.”
나를 알아보고 멈춘 것이다.
“이것들 나가려는 모양새였어.”
“설마, 이곳의 유물도?”
억측과 함께 놈들의 무기가 나를 향해 움직인다.
카카카캉!
금속성과 함께 놈들의 공격이 튕겨 나간다. 내가 막을 필요도 없다. 남궁화청과 신창양가의 셋이 내 앞을 막아선 것이다.
넷과 열다섯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캉, 카카캉, 카캉!
신창양가의 셋은 똘똘 뭉쳐서 내 앞을 지켜낸다. 창이라는 장병기의 이점을 적극 활용해 적들이 파고들 틈을 주지 않는다.
거기에 달라붙는 적이 많다 싶으면 쌍둥이가 서로의 공력을 합해 상대를 힘으로 밀어낸다.
콰르릉, 콰쾅!
남궁화청의 십삼섬전뢰가 번뜩일 때마다 그들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거기에 남궁화청의 표횰한 발걸음은 진퇴가 자유로워 잡아 놓기도 무리.
이런 싸움이 가능한 게 일행이 다수와의 싸움에 능숙한 것도 있지만, 상대의 움직임에 이렇다 할 체계가 없는 탓이 크다.
원래부터 한 집단이 아니라 그냥 이번 일로 손을 잡은 자들이 분명하다.
쉽게 끝낼 싸움을 어렵게 할 필요는 없다.
칼을 들고 일행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손을 금속으로 물들인다.
콰자작!
남궁화청의 검격에 밀려나던 놈이 내가 날린 전격을 맞고 허물어진다.
파자자작!
양연곤을 공격하던 놈이 몸을 떨며 넘어간다.
“망할, 벽력응주!”
“놈이 벽력을 쓴다!”
“놈의 벽력을 조심해!”
“몇 명은 놈들을 돌아가 벽력응주를 막아!”
콰자자작! 파자작! 콰작!
놈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 틈에 전격을 쏘아내 셋을 더 쓰러트렸다.
열다섯이 열이 되는 것은 순식간. 그리고 그 열이 죄다 쓰러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우리 쪽의 싸움은 끝났지만 층계에서는 싸움이 한참이다. 위에 뭐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 일 자체가 누군가의 수작임을 아는데 저기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
게다가 층계 위에는 거철 승려가 이끄는 소림 무승들이 있었다.
불모의 유물은 맡기기로 협의를 했거니와 이런 일에는 소림 무승들이 전문가 아닌가. 전문가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비전문가들은 발을 빼는 것이….
- 리퍼, 놈들입니다.
소림 무승과 싸우고 있는 자들의 머리 위로 화살표가 떴다.
흑의에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들.
동공에 우리를 파묻고 도망간 놈들이다.
소림 무승들의 합공에 몰리는 낌새를 보이더니 한 명이 등에 메고 있던 보퉁이를 벗어 아래로 던져버렸다.
“월하검의 비급이다!”
“잡아!”
십팔나한에 막혀 층계를 오르지 못했던 무인들이 날아드는 보퉁이를 향해 몸을 던졌다.
“아미타불!!!!”
거철 승려가 사자후를 터트리고 소림 무승들이 보퉁이를 쫓아 몸을 날리지만, 상대들이 자기 동네에서는 다들 목에 힘주고 사는 초극 고수들이다.
사자후에 당하는 것도 한두 번. 이미 대비하고 있었는지 강제로 몰아에 빠져들어 행동을 멈추는 자들은 몇 없었다.
월하검의 비급이 들어 있는 거로 추측되는 보퉁이를 두고 군웅들 간의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넓다 해도 출구가 몇 없는 한정된 공간이다.
보퉁이를 낚아챈다 해도 오래 잡고 있을 수 없었다.
군웅들이 달려들고 그런 군웅들을 물리치고 소림 무승들이 달려든다.
보퉁이가 소림 무승들에게 넘어가면 끝장임을 아니 보퉁이를 든 무인은 이를 악물고 보퉁이를 소림 무승이 없는 곳으로 던진다.
그럼 다시 보퉁이를 향해 소림 무승들과 군웅들이 달려든다.
보퉁이의 움직임을 따라 수십의 초극 고수들이 몰려다니니 난장판이 따로 없다.
보퉁이를 군웅들에게 내던진 흑의인들은 그 난장판에 가담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딱 봐도 꿍꿍이가 있는 모양새다.
- 놈들입니다.
내 전음에 일행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가 내 눈짓을 따라 놈들에게 향했다.
- 남궁 대협과 신창양가의 세 분이 먼저 덮치면 제가 뒤에서 틈을 노리지요.
내 전음에 일행들이 바로 움직였다.
“정의맹 놈들이다!”
놈들이 눈치를 챘지만 이미 남궁화청이 코앞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콰카캉!
작정하고 몰아친 남궁화청의 검격에 정면 대응한 한 명이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다른 두 명이 기겁하며 남궁화청의 검을 막아서지만 그 뒤를 신창양가의 창격이 뒤따른다.
카카카캉!
신창양가의 셋이 내지른 창격에 한 명이 붙들려 있는 동안 남궁화청은 한 명을 몰아붙인다.
뒤로 밀려난 한 명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 남궁화청을 향해 달려들지만 나는 놀고 있는 게 아니다.
오올!
방수가 호거술로 만들어내는 증폭 영역을 도기를 품은 비수가 줄을 이어 지난다.
유사 강기를 품은 비수들의 행렬이 간신히 남궁화청의 공격을 버텨내고 있던 흑의인의 두 다리를 꿰뚫는다.
“크윽!”
상대가 쓰러지자 남궁화청은 바로 몸을 돌려 자신에게 달려드는 흑의인을 상대한다.
오올!
다시 비수가 날고 다리를 잃은 흑의인이 바닥을 구른다.
이제 남은 것은 신창양가의 셋이 상대하는 한 명.
동료 둘이 제압당하는 것을 본 그는 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누가 손을 쓰지도 않았는데 풀썩 쓰러지더니 꼼짝도 안 한다.
“젠장!”
나는 급히 비수에 두 다리를 잃은 흑의인에게 다가가 복면을 벗겼다.
마흔 줄 중년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칠공으로 흘러나오는 핏줄기.
- 스스로 기맥을 끊어 자결했습니다.
다른 자도 마찬가지다. 셋 다 자결했다.
= 살려낼 수 있지?
심장이 박살나도 살려낼 수 있는 것이 농꾼이다.
- 불가능합니다. 스스로 뇌를 박살냈습니다.
응5의 해킹범을 찾을 단서가 사라진 것이다.
“이 정도의 고수들을 소모품으로 쓸 수 있다니 무시무시한 곳이구려.”
양묵일의 말이다.
“뭔가 엄청난 세력을 적으로 삼은 듯한데….”
남궁화청의 목소리에도 슬쩍 걱정이 배어 나왔다.
“일단, 시체를 챙겨 나가지요.”
시체가 된 세 명의 신상을 알아내야 했다.
농꾼을 통해 전신을 스캔해 놓았다지만 시체째 개방에 맡기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우리가 막 자리를 뜨려는데 가장 가까운 통로를 통해 새로운 무리가 등장했다. 고작 열뿐인 무리다.
그런데 저들이 등장하기 무섭게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설마, 혈취공(血醉功)?”
신창양가의 쌍둥이가 기겁한다.
“혈천쌍마(血川雙魔)와 추혈팔마(追血八魔)!”
남궁화청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마교 놈들인 것이다.
“신창양가와 남궁세가의 인물 같군. 그렇다면 그쪽의 젊은 도객이 벽력응주겠군.”
선두의 두 노인 중 한 명.
수염을 길게 기른 쪽이 나를 보며 웃었다.
전신이 떨린다.
빌어먹을.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이다.
육가장의 주인인 육진성, 그 작자의 살기를 전면에서 받아봤을 때 그 느낌.
이 작자 천문위다.
혈천쌍마, 무위의 급이 다른데 하나로 묶이지는 않았을 터. 가만히 있는 수염 짧은 쪽도 천문위란 말이다.
“긴말 않겠다, 청하신수를 내놔.”
나도 가지고 있으면 냉큼 주고 싶다.
마교의 천문위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코앞에 버티고 있는데 무슨 배짱을 부린단 말인가.
“내가 청하신수를 얻었다는 말은 헛소문입니다.”
진실을 말해 본다.
“그래? 그렇다면 알아서 찾아가지.”
역시나 믿지 않는다. 씨발.
칼을 뽑으며 몸을 뒤로 물리는데 남궁화청이 내 곁을 지나가며 검을 내지른다.
콰르르르릉!
남궁화청의 십삼섬전뢰가 그 위용을 떨치지만 상대는 천문위다.
붉디붉은 강기가 노인의 전신을 뒤덮으며 용트림 치니 벼락의 감옥이 뒤틀리고 깨진다.
쿠쿠쿠쿵!
남궁화청이 땅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며 내 앞까지 밀려난다.
“크허, 컥!”
아니 이내 검 끝을 땅에 박아 세우고 한쪽 무릎을 꿇자마자 시커먼 피를 토한다.
일행 중 최고수인 남궁화청이 단번에 무력화되다니 과연 천문위다.
“수년 안에 천문위가 될 놈이군.”
남궁화청을 바라보며 히죽 웃더니 다시 나를 본다. 청하신수를 내놓으라는 소리다.
어째 죽일 생각은 없는 듯하다.
- 제가 당해도 나서지 마세요.
= 공격해도 맞아 준다.
일행들에게는 전음으로 농꾼에게는 채팅으로 뜻을 전한 뒤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청하신수를 얻었다는 것은 헛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청하신수를 얻었다 해도 지금 가지고 있을 리 없지요.”
“무슨 소리냐?”
“벽력응주, 제 별호입니다. 응주라 불릴 만큼 매를 잘 부리지요. 제가 청하신수를 얻었다면 계속 가지고 다니겠습니까? 아니면 매를 부려 안전한 곳에 보냈겠습니까?”
“그 말은?”
“선배께서 들은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저를 겁박해도 당장에 청하신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군웅들이 쫓고 있는 보퉁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선 저기에 있는 물건부터 손에 넣으시는 게 순서라는 이야깁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저 안에는 월하검의 비급만이 있을 테고, 거짓이라면 청하신수도 있을 테니까요.”
이게 다 누군가의 수작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믿지 않을 게 뻔하다.
노인의 손이 슬쩍 움직이니.
쾅!
복부를 후리는 충격과 함께 몸이 뒤로 넘어간다.
“확인해.”
긴 수염 노인의 말에 추혈팔마가 보퉁이를 따라 움직이는 군웅들의 뒤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