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산동행(13)
= 피격당한 거야?
응 시리즈는 마풍단주 그 왜놈 새끼 패거리에게 한 번 피격당한 전적이 있다.
- 그 사건 이후 리퍼의 명령으로 기능 업그레이드가 있었습니다. 피격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신호가 끊기기 전 응5의 정찰 고도는 900m. 위장 기능이 충실해 이 시대의 관측 장비로는 발견할 수도 없다.
어떻게 발견했다 해도 900m의 거리가 있다. 화기를 쓴다 해도 응5가 총알을 감지하고 대응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말이다.
- 그리고 피격당해서 응5의 생명 활동이 정지했다 해도 체내의 나노 머신이 기능하면 데이터 송신이 가능합니다.
= 그럼, 왜 연락이 끊겼다는 거야?
- 알 수 없습니다.
= 우산에 모여 있는 놈들의 현재 위치는?
- 여전히 우산에 모여 있습니다.
농꾼이 지도를 띄웠다. 양연곤이 추적하던 놈까지 합류해서 열셋이 우산에 모여 있었다.
응5의 신호 소실은 우산에 있는 놈들과 관계없다는 말이….
- 청주 부도 일대의 통신 벌레, 꿈틀이의 신호가 소실되었습니다.
= 양연곤에게 연락해.
- 청주 부도 일대의 모든 통신 벌레, 꿈틀이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NJ-03의 숙주와 당장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젠장, 누가 매를 때려잡은 정도의 일이 아니잖아!
= 내 정체가 들통 나서 연구소가 개입한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전자전을 위한 장비가 아니라면, 백 단위가 훌쩍 넘는 통신 벌레들이 단번에 쓸려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 연구소는 아닙니다. 그리고 연구소가 리퍼의 정체를 알아냈다 해도 이렇게 난입할 이유가 없습니다. 리퍼는 현재 수확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유일한 개체입니다.
연구소가 원하는 것은 초극 무공의 데이터. 그러니 리퍼의 인격이나 기억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확을 진행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어째서인지 연락 끊겼다는 오리지널 리퍼일 가능성은?
나는 만약을 대비한 스페어. 그랬기에 엄마가 전문가의 기억 대신 내 기억 데이터를 집어넣는 모험을 할 수 있었다.
엄마의 애초 계획대로라면 내가 리퍼로 움직일 일은 없었다. 자동 수확에 문제가 생긴다 해도 전문가의 기억을 가진 오리지널이 수확 임무를 진행하고 스페어인 나는 그저 건강한 몸으로 환생했다 착각한 채 인생을 살아갔으면 되었다.
하지만 오리지널 리퍼 쪽은 자동 수확에 문제가 생기기도 전에 연락이 끊겨 버렸다.
자동 수확에 일부 문제가 생긴 이후에도 스페어인 나를 당장 깨우지 않은 것은 21세기에서 초극 무공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수확된 절정 무공으로 괴물 때려잡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깐.
= 오리지널 리퍼가 절정 무공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탱자탱자 놀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의 권한을 되찾고자 할 가능성은?
- 오리지널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라 판단, 연구소에서 회수 코드를 발동한 상태입니다. 통신이 재개되거나 리퍼와 접촉 시 나노 머신의 기능이 멈추고 회수됩니다.
그런 위험성이 있으니 오리지널이 나설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어쨌든 여기서 떠들어 봐야 답이 나올 일이 아니다.
= 부도 내 상황, 접근하지 않고 대략적으로는 알 수 있지?
여기서 청주 부도까지 20km 남짓. 응 시리즈의 탐지 범위 내다.
시야에 화면이 떠오른다. 무인들이 떼거리로 어딘가로 몰려가는 모습. 그리고 그 끝에는 신창양가의 셋이 달려드는 무인들을 향해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통신 벌레와 꿈틀이가 없어도 달려드는 무인들이 누군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놈들의 수작이다. 내게 그랬듯 신창양가의 셋이 불모의 유물을 얻었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지금 신창양가의 셋을 노리고 덤벼드는 군웅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응5를 비롯한 장비들을 누가 어떻게 박살냈느냐는 것.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직접 가야 했다.
= 응4 활동 고도로 따라붙고 나머지는 개체 최대 고도로 상승시켜.
응4를 미끼로 삼고 나머지 개체들은 최대한 멀리서 지켜보게 한다.
준비가 끝나기 무섭게 남궁화청에게 응4의 화면을 보여주자,
“청주 부도 쪽에 뭔가 일이 생긴 것 같군, 서두르지.”
그가 길을 재촉했다.
초극 고수가 작정하고 달리면 20km 정도의 거리는 금방이다. 일각도 되기 전에 부도의 성벽이 보였다.
“서문으로!”
내 말에 남궁화청이 군말 없이 발걸음을 튼다.
청주 부도의 서문에 당도하니 신창양가의 셋이 군웅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문 안쪽으로 보였다.
“남궁 대협, 이쪽으로 빼내 오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성벽 밖, 서문 앞의 널찍한 공터에 서며 물었다.
“그때 그걸 쓸 생각인 모양이군. 신창양가의 사람들과 자네를 지나치면 되겠지?”
남궁화청이 단매에 내 의도를 읽고 말했다.
“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화청이 검을 빼들고 서문의 안쪽으로 내달렸다.
서문을 통과한 남궁화청은 신창양가의 세 사람을 포위한 군웅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선 뒤, 냅다 검을 내질렀다.
콰르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벼락이 검 끝에서 둥글게 뭉쳐 튀어 나간다.
“미친!”
“탄강이다!”
“피해!”
갑작스레 덮쳐드는 굉음과 기세에 뒤를 돌아보던 무인들이 기겁성을 내지르며 몸을 피하고.
쾅, 콰콰쾅, 콰쾅!
뭉쳐진 벼락이 풀려나며 주위를 뒤흔들었다.
당연히 포위망의 한 구석이 텅 비게 되어 신창양가의 셋이 서문으로 내달릴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처음 움직인 것은 뭉쳐진 벼락이다. 남궁화청이 다시 한 번 탄강을 내 쏜 것이다.
“숙여!”
양묵월의 호통에 양연곤이 몸을 숙이고 그 위로 남궁화청이 내쏜 탄강이 지나갔다.
쾅, 콰콰쾅!
풀려난 벼락이 그들의 전방을 휩쓸 때 신창양가의 창잡이 셋은 몸을 돌려 서문으로 난 길을 내달렸다.
“쫓아!”
“월하검을 내놔!”
욕심에 눈먼 군웅들이 곧 그들의 뒤를 쫓았다.
남궁화청이 그 셋과 합류해 서문을 통과해 내 곁을 지났다.
내 뒤로 빠져나간 일행들을 쫓아 달려드는 군웅을 향해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칼을 빼들었다.
오올!
익숙한 스피커의 울림과 동시에 백색의 섬광이 욕심에 눈먼 군웅들의 눈을 후려친다.
대다수의 군웅들이 섬광격의 광휘에 당해 두 눈을 가리고 주저앉을 때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섬광격의 광휘가 사라지기 무섭게 나를 향해 들이닥치며 칼을 휘두르는 덩치 좋은 놈 둘.
살벌한 호선이 내 목과 허리를 노리고 그려진다. 크게 뒤로 물러나며 칼을 들어 그대로 내려 그었다.
캉, 카캉!
힘으로 내려찍는 일격에 둘 다 인상을 쓰며 한 발씩 물러난다.
- 팽가의 수확 대상자들입니다.
농꾼의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 퍼진다.
이들에게 붙여 놓은 꿈틀이와 통신 벌레들은 전멸한 상태. 그래도 데이터가 남아 있으니 얼굴을 보고 아는 것이다.
= 이것들 털면 뭔가 나올 수도 있겠어.
팽가의 두 명은 아는 게 없어도 그 둘의 몸에 깃든 나노 머신에 뭔가 기록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둘을 향해 내가 한 발 내딛으려는 찰나.
“벽력응주! 청하신수를 내놔!”
웬 반 대머리 노인이 노성을 내지르며 끼어든다. 양손을 시뻘건 강기로 물들이며 거침없이 휘두른다.
쾅! 콰쾅!
힘으로 쳐내고 있지만 칼로 손을 쳐낼 때마다 손바닥에 저릿저릿한 경력이 밀어닥친다.
도기에 전압 걸어 만든 유사강기가 반 대머리 노인의 강기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 산동 흑산의 마두인….
농꾼이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그 정체를 알아냈다. 어쨌든, 수확과 상관없는 자란 소리. 그럼 살려 둘 필요 없지.
유사강기를 진짜 도강으로 전환.
끼요올!
호거술로 증폭하니.
쩌저저저저정!
몰아치는 벼락이 노인의 손이 그리는 방어막을 후드려팬다.
칼이 그리는 벼락이 노인의 양손을 완전히 묶어 두니 내 왼 발목에 감겨 있던 방수가 벼락같이 몸을 뻗어 노인의 발목을 휘감았다.
파자자작!
호신강기를 뚫고 작렬하는 전격에 노인의 몸이 경직되자 그 틈을 타 도강으로 벼락을 그리며 노인의 몸을 후려쳤다.
노인의 상체가 사선으로 동강나는 것을 확인한 다음, 바로 몸을 돌려 팽가의 둘을 찾았다.
팽가의 둘은 뒤로 물러나 섬광격에 눈을 당한 자신들의 일행을 지키고 있었다.
- 리퍼,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농꾼의 재촉. 군웅들의 눈초리에 하나둘 초점이 잡혀 가고 있다.
= 저 둘에게 꿈틀이랑 통신 벌레 붙여 놔.
일단 팽가의 수확 대상자들을 통해 뭔가 알아내는 것은 뒤로 미룬다. 저 둘 말고 손쉽고 뒤탈 없이 얻을 수 있는 데이터가 하나 있지 않은가.
먼저 간 일행을 따라 우산 자락으로 달려갔다.
남궁화청에게 통신 벌레가 붙어 있기에 일행을 찾기는 쉬웠다. 그들은 산 중턱의 한 동굴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황보세가의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일행에 합류하기 무섭게 황보세가의 인물들부터 찾았다.
“본적 없네.”
“예?”
양묵일의 어이없는 대답에 눈이 커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어.”
이쪽 일도 뭐가 단단히 어그러진 게 분명하다. 당장 청주 부도에 황보세가의 분가가 있지 않은가. 무슨 이유에서 황보세가의 전력들이 늦을 것 같으면 연락이 왔어야 정상이다.
“뭐가 골치 아프게 돌아가는군요.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지요. 양 소협, 매와 연결이 끊어졌지요?”
“예, 갑자기….”
내 물음에 양연곤이 대답을 길게 하려 했지만 내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뭐가 문제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처음 했을 때처럼, 호신강기를….”
내 말에 양연곤이 호흡을 골라 공력을 억제했다. 나 역시 공력을 억제해 양연곤의 데이터를 받아들였다.
농꾼이 열심히 양연곤의 데이터를 살폈다.
- 꿈틀이와 통신 벌레의 신호가 사라진 원인을 찾았습니다.
보고와 함께 영상이 뜬다.
탁, 타닥, 탁!
객잔에 앉은 양연곤의 주위에서 갑자기 미세한 불꽃이 튀기는 영상이다.
- 시간상으로 보면 이때 청주 부도 일대의 모든 통신 벌레와 꿈틀이가 파괴되었습니다.
= 역시 EMP잖아?
- 강력한 전자기 펄스를 이용한 무기였으면 산동의 안테나가 박살이 나거나 어떤 형식의 신호를 잡아야 했습니다만 박살이 나지도 신호를 잡지도 못했습니다.
= 그럼 뭔데?
- 응5의 통신 채널을 통해 해당 개체들에 자폭 명령을 내린 것으로 분석됩니다.
그 말은 응5가 해킹당했다는 말이다.
= 역시, 소식 끊겼다던 오리지널의 수작이잖아!
이 시대에 해킹이란 개념을 알고 실행할 수 있는 작자가 또 있을 리 없다.
- 오리지널이 한 짓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 왜? 그놈의 회수 코드 때문에? 어떻게든 무효화 했을 수도 있잖아!
- 오리지널이 회수 코드를 무효화 할 방법이 있어 나선 것이라면 더 말이 안 됩니다.
= 왜?
- 도저히 오리지널의 짓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어설픕니다.
= 뭐?
- 오리지널과 스페어로 구분된다지만 나노 머신의 하드웨어만 따지면 동급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를 다루는 소프트웨어, 탑재된 기억입니다. 리퍼 쪽은 잡지식이 뛰어난 독서가 정도지만, 오리지널은 나노 머신에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한 전문가입니다.
= 그 말은 오리지널이 회수 코드를 무효화해 나를 어떻게 해볼 생각으로 응5를 해킹했다면 응5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야?
- 예, 응 시리즈의 통제권과 꿈틀이 통신 벌레 모조리 뺏겼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응5를 해킹해서 한 일은 청주 부도 인근의 통신 벌레와 꿈틀이를 제거해서 일대의 정보를 끊는 일이 다였습니다.
그럼, 응5를 해킹한 작자는 누구란 말인가?
= 일단 해킹 대책을 세워.
- 예, 리퍼.
해킹에 대해서는 일반 상식 이상으로는 알지 못하니 농꾼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 수확의 방해꾼으로 봐야겠지?
- 그렇습니다.
장보도의 배후는 내가 청주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헛소문을 내서 내 발길을 막으려 했을 정도다.
내가 청주 부도 인근에 당도하자 응5가 해킹당하고 꿈틀이와 통신 벌레가 죄다 박살났다.
이건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누군지 모를 해킹범은 장보도의 배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하나다.
장보도의 배후를 캐내 놈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