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산동행(12)
초극 고수 셋을 여유롭게 제압한 모습 때문인지 동곤륜의 고수들처럼 바로 덤벼들지 않고 있다.
“그쪽도 헛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오?”
그러니 일단 말을 걸어 봤다.
“헛소문이라, 벽력응주는 불모의 청하신수를 얻지 못했다 주장하는 것인가?”
“그런 건 가지고 있지도 않소. 원한다면 보여줄 용의도 있소.”
내가 옷 벗는 시늉을 보였다.
쟁탈전의 원흉을 파기할 때 소림이 그런다질 않는가. 옷 죄다 벗어 탈탈 털어 숨기는 게 없음을 보이고 갈 길 간다고.
“잘난 매를 써서 다른 곳에 옮겼겠지.”
모용세가 누군가의 말이다.
허, 어이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앞길을 막는 이유가 뭐요?”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데 왜 길을 막고 지랄이야?
“우리는 청하신수에 욕심이 없네. 벽력응주 자네도 청하신수로 만족함이 어떤가?”
이건 또 뭔 개소리야?
“그러니 불모의 월하검(越霞劍)이 묻힌 장소를 우리에게 알려 주게.”
불모의 유물은 두 군데로 나뉘어 묻혀 있는데, 한쪽을 파낸 내가 다른 한쪽도 파러 간다고 소문이 났다는 소리네.
망할 새끼들이 구라 설계를 참 잘해놨어요.
그냥 불모의 유물을 얻었다 소문을 냈으면 내가 절강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동의 청주부로 향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 유물을 둘로 나누어 하나를 얻은 내가 남은 하나도 얻기 위해 움직인다 소문을 낸 것이다.
“그럼, 같이 갑시다. 내가 뭐 하러 가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시지요.”
이번 일을 꾸민 망할 놈들은 이미 제 놈들이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고 대비한 상황이다. 그러니 놈들의 존재를 숨길 이유가 없다.
아니 모용세가 쪽에서 나를 따라온다면 아군이 느는 상황. 그중 한 명이 수확 대상자에다가 남궁화청과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수확 대상자의 실력은 나이에 비례하는 감이 있으니….
“우린 그저 월하검이 묻힌 장소만 원하네.”
모용세가 수확 대상자의 말이 내 희망찬 생각을 끊는다. 검파에 손까지 얹는 꼴이 닥치고 지가 원하는 걸 내놓으란 말이다.
사람이란 존재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믿고 싶은 말만 믿는 존재라지만 좀 합리적으로 움직여 주면 안 되나?
“하아.”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모용세가의 태도에 한숨이 나온다.
대화로 시간을 좀 끌어봤지만 남궁화청 쪽의 싸움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하긴 남궁화청이 천문위를 눈앞에 둔 실력자라 해도 아직은 초극 고수의 카테고리 안이다.
동곤륜의 셋 중 수확 대상자가 둘이다. 나이도 삼십대 중반이니 못해도 귀몰색마급. 단시간에 제압하는 건 무리겠지.
= 방수 방어 모드, 섬광격으로 전력 방어.
- 소도 두 자루로는 섬광격을 동원해도 SD-04의 숙주를 완전히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 비수를 동원하면?
- 가능합니다.
= 실행해.
농꾼에게 명을 내린 뒤 오른손으로 슬쩍 도파를 잡자 모용세가의 수확 대상자, SD-04의 숙주가 벼락같이 덮쳐든다.
나 역시 전력을 다해 바닥을 박차며 자세를 낮춘다.
검격이 등을 노리고 떨어진다.
오올!
등 뒤에서 터지는 스피커의 음향을 따라 한 쌍의 방수가 쥔 두 자루 소도에서 광휘가 터져 나온다.
다른 한 쌍은 하나가 호거술로 증폭 영역을 만들면 하나는 비수에 도기를 넣어 던진다.
캉, 콰콰쾅!
등 위에서 벌어지는 SD-04의 숙주와 두 쌍의 방수가 펼치는 공방 따위 무시하고 내 발은 남아 있는 모용세가의 넷을 향해 질주한다.
두 쌍의 방수로 인해 SD-04의 숙주와 나 사이로 충분한 간격이 벌어진다.
= 비수 투척 중지.
비수 쥔 방수로 보내던 공력을 내 손의 칼로 돌리며 전압을 건다.
오올!
내 손의 칼마저 광휘로 물들이며 벽력을 그린다.
콰르르릉!
세상을 물들이는 광휘 속에서 그려진 벼락이 모용세가의 고수 넷을 덮쳐든다.
카쾅!
작정하고 휘두른 칼과 반사적으로 휘두른 검이 부딪친다. 검을 찍어 누르는 순간, 팔에 감긴 방수가 풀려나며 상대의 몸에 전격을 꽂아 넣는다.
모용세가의 수적 우위?
이미 섬광격을 터트렸을 때 그딴 건 사라졌다.
갑작스레 시야를 잃은 상황에서 무슨 정교한 협공을 한단 말인가. 협공도 안 되는데 합공이 될 리가 없다.
기감으로 상대를 살핀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섬광격의 기세가 내 주변을 뒤덮고 있는데 어떻게 그 안에 바싹 붙은 나와 세가의 혈족을 기감으로 구분한단 말인가.
자신을 지키기 급급한 초극 고수 넷 따위 힘으로 찍어 누르고 감전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감전시키는 족족 발끝으로 마혈을 찍고 발등으로 걷어차 소청하로 날려 버린다. 물론 넷이 아니라 셋만 날린다.
마지막 하나는 팔의 방수를 이용해 휘감아 당긴다.
“그만!”
마지막 하나를 잡는 순간, 내 몸을 빙글 돌리고 뻗어오는 공격에 놈을 내민다.
“헛!”
SD-04의 숙주가 헛바람을 들이쉬며 물러날 수밖에 없다.
- 배터리 잔량 0. 충전 시작합니다.
섬광격의 광휘가 사라지자 두 자루 소도를 휘두르던 한 쌍의 방수는 내 등과 피풍의 사이로 숨어든다.
“이런 비열한!”
SD-04의 숙주가 인질을 잡은 나를 보며 이를 갈았다.
“욕할 시간 있으면 떠내려가는 분들부터 구하시지?”
내가 턱짓으로 모용세가의 혈족 셋을 품고 흘러가는 소청하를 가리키며 웃었다.
SD-04의 숙주가 인상을 구기며 혈족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모용세가의 수확 대상자가 충분히 멀어지자 인질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 호거술 적용 비수 투척, 있는 비수 다 털어낸다. 남궁화청과 알아서 연계해 동곤륜 녀석들 제압해.
- 예, 리퍼.
늘어진 피풍의가 빳빳하게 일어선다.
오올!
익숙한 스피커의 소리와 함께 내 등판에서 빛살이 쏟아졌다. 목표는 남궁화청과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동곤륜의 셋.
카카카카카카카카캉!
“이런!”
“이 무슨!”
갑작스레 등판을 노리고 쏟아지는 비수의 폭우에 동곤륜 고수들의 연계가 깨어졌다.
그리고 이미 농꾼과 연계해 타이밍을 재고 있던 남궁화청이 그 틈을 놓칠 리 없다.
콰르르르릉! 콰콰쾅!
십삼섬전뢰의 검강이 번뜩이고 셋의 신형이 바닥을 나뒹군다.
“남궁 대협, 뒤처리는 저에게 맡기고 저 작자 좀 부탁해요!”
내 외침에 남궁화청의 전신이 모용세가의 수확 대상자를 향해 쏘아졌다.
“자 수확이나 해볼까?”
상처 입은 동곤륜의 세 고수를 향해 발을 옮겼다.
수확 대상자의 상처야 알아서 치료되는 것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나머지 한 명의 상처도 당장 죽을 것이 아니었다.
동곤륜의 수확 대상자 둘은 검상에 극심한 내상을 입은 모양새. 하지만 아직 정신이 있는지 체내의 호신강기가 유지되고 있다.
일단 혈도들을 제압해 그들 신체의 호신강기를 차단하고 혼절시켰다.
- SD-05, SD-07의 수확을 시작합니다.
동곤륜의 무공을 수확하고 농꾼을 도와 SD-05, SD-07을 해킹해 필요한 프로그램을 깔았다.
그렇게 동곤륜의 수확 대상자를 처리하고 남궁화청에게 당한 동곤륜의 고수를 치료했다.
농꾼이 일을 마친 후 주위에 널브러진 비수를 주워 다시 쓸 수 있는 것들을 분류하니.
- SD-04의 수확을 시작합니다.
남궁화청이 모용세가의 수확 대상자를 처리한 것이다.
할 일을 마치고 남궁화청을 향해 움직인다. 그는 모용세가의 수확 대상자와 혈족들을 강변에 나란히 눕히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공을 보면 저쪽은 동곤륜의 문하 같고, 이쪽은 모용세가의 혈족 같던데 이들이 왜 우리의 앞길을 막았는지 아는 게 있나?”
동곤륜의 고수들과 싸우는데 집중한다고 나와 모용세가의 인물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못들은 듯하다.
“놈들이 헛소문을 뿌렸습니다.”
내가 대강의 이야기를 해줬다.
수확 대상자의 최근 기억 데이터를 뒤졌는데도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으니.
이들은 내가 불모의 청하신수를 차지하고 월하검까지 노린다는 소문을 믿고 덤볐을 뿐인 것이다.
“흠, 괜한 원한만 생긴 건가?”
남궁화청의 목소리에 슬쩍 걱정이 서리는 듯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켰을 뿐, 잘못은 저들에게 있지요. 그리고 죽은 자도 없지 않습니까?”
“크게 다친 자들이 있지 않은가.”
남궁화청이 저쪽에 널브러진 동곤륜의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암중 세력의 수작에 넘어가 괜한 적을 만든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다.
“제가 다 치료해놨으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과연 염왕적의네!”
남궁화청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 SD-04의 해킹이 필요합니다.
아 맞다. 모용세가 쪽 수확 대상자의 뒤처리가 남았지.
수확 대상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농꾼이 원하는 대로 손을 움직였다.
빠드득.
일단 경추를 박살내고.
“자네, 뭐 하는 짓인가?”
남궁화청이 기겁한 얼굴로 내 손을 잡고 말렸다.
하긴 농꾼의 해킹을 돕는 방법을 옆에서 보면 기겁할 모양새긴 했다.
“칼을 섞은 사이 아닙니까? 일종의 술법입니다.”
남궁화청에게 잡힌 손을 빼며 말을 이었다.
“저에게 다시 덤비지 못하게 하는!”
“술법이라니!”
내 말에 남궁화청이 다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 눈에는 사람 병신으로 만드는 손속으로밖에 보이지 않네.”
“남궁 대협, 제가 괜히 염왕적의겠습니까?”
히죽 웃으며 잡힌 손을 빼서 동곤륜의 수확 대상자 둘을 가리켰다.
“똑같은 방법을 저 둘에게도 행했습니다. 정 의심스러우면 저 둘의 상태를 확인해 보시지요?”
내 말에 남궁화청이 당장 그쪽으로 달려가 둘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렇게 남궁화청을 설득한 뒤 일을 마저 진행했다.
모용세가의 수확 대상자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다 깐 뒤 동곤륜과 모용세가의 사람들을 깨웠다.
“이대로 헤어지면 정의맹과 여러분들이 속한 곳들 사이에 원한밖에 더 남겠습니까?”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사정을 이야기하고는 한 손 보탤 것을 요구했다.
“직접 따라오셔서 확인할 것을 확인해 의혹을 지우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 마무리하는 것이 분란이 없지 않겠습니까?”
수확 대상자의 기억 데이터를 살펴봐도 놈들과의 연관은 없다. 그러니 이 작자들도 놈들과 싸움에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우산에 이번 일을 꾸민 놈들이 웅크리고 있고 황보가에서 놈들을 칠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들이 끼기에는 좀 무리구려.”
동곤륜이 발을 뺀다.
동곤륜은 과거 태산파와 함께 산동을 양분했던 세력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 곳. 허나, 현재 산동의 패자는 황보세가다. 그러니 동곤륜이 이번 일에 끼어들어 일익을 담당하는 것을 황보세가에서 좋아할 리 없다는 소리다.
“우리도 좀 그렇소. 아시다시피 황보세가의 일에 바다 건너 우리가 덜컥 끼어드는 것은….”
모용세가도 동곤륜을 본받아 발을 뺀다. 하긴 본가에 비밀로 하고 이번 쟁탈전에 끼어든 작자들이니 황보세가의 공식적인 행사가 될 일에 나서기 곤란하기는 했다.
“그럼, 빚 하나씩 달아두는 것으로 하지요.”
내가 히죽 웃으며 말하자 두 무리의 수장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는 이쪽이 더 좋기는 하다.
동곤륜과 모용세가의 수확을 원활하게 할 끈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들과 헤어져 다시 길을 달린다. 놈들이 뿌린 헛소문을 알기에 아예 무인들을 피했다.
그렇게 세 개의 물줄기 중 마지막 물줄기인 치수(淄水)를 등평도수로 건널 때였다.
- 리퍼, 응5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건 또 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