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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116화 (116/175)

116화

산동행(09)

날이 잘 갈린 비수 하나를 들고 목판 앞에 섰다.

- 그럼 시작합니다.

농꾼의 신호와 함께 목판 위에 그림이 그려진다. 내 눈에만 보이는 그림, 농꾼이 만들어내는 증강현실이다.

목판 위, 그림의 여백으로 화살표가 하나 놓여진다. 내 손에 들린 비수가 그 화살표 위로 겹쳐지고 화살표의 움직임을 따라 비수가 목판을 긁어댄다.

반각도 되기 전에 목판 위에 멋들어진 그림이 양각(陽刻)으로 조각된다.

이번에는 수십 개의 글자가 그림 사이사이의 여백에 그려지고, 비수가 글자의 주위를 갉아낸다.

그렇게 목판 하나 만드는데 일각이면 충분했다. 깨질 것을 대비해 세 개 더 만들었다.

“대단한 실력이군. 음각도 아닌 양각으로 이렇게 빨리 만들 줄이야!”

농꾼에 대해 알리 없는 상 노개가 탄성을 터트렸다.

“제대로 찍히는지 확인을 해봐야지요.”

“그렇지.”

네 개의 목판이 뽑아낸 결과물은 하나 같이 똑같았다.

“이제 찍어내기만 하면 되겠어.”

***

임청 관아의 수장인 지주가 관졸들과 함께 변을 당했기에 장보도 쟁탈전의 배후가 금의위나 동창일 실낱같을 가능성도 사라졌다.

금의위나 동창이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한 주의 수장이자 종오품 관료인 지주를 죽이는 데는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하니 말이다.

관아에서 살육을 자행한 자는 장보도의 추종향을 쫓던 셋이 아니다.

양연곤에게 응5를 붙여줘 양가의 쌍둥이들과 함께 그 뒤를 따라붙게 했다.

꿈틀이가 붙어 있는 상황에 응5에 사람까지 붙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냥 놔두면 양연곤이 몰래 쫓아가 창 질을 할 모양새라 아예 추적 감시의 임무를 내렸다. 양가의 쌍둥이들은 양연곤이 섣불리 나서는 일을 막기 위해 동행시켰고 말이다.

임청 관아에서 혈난이 일어난 지 사흘, 장보도는 계속 주인을 바꿔가며 산동 제남부를 떠돌고 있다.

상 노개가 쟁탈전에 끼어든 정도 세력에 장보도의 일로 의논을 바란다는 연통을 돌렸다.

하지만 정작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은 산동 황보세가와 북직례의 진주언가 두 곳뿐이었다.

황보세가에서는 황보선이라는 체격 좋은 장로가 왔고 진주언가에서는 상 노개와 비슷한 연배인 언외운이 왔다.

“거지가 한동안 못 보던 사이에 꽤 너그러워졌어.”

진주언가의 장로인 언외운이 나를 한번 훑고는 하는 소리다. 개방의 뒤통수를 쳤다고 알려진 내가 개방이 주도하는 모임에 나타난 것이 의외란 듯 말을 이었다.

“사십 년 전에는 별것도 아닌 일로 내 팔을 부러트렸으면서 말이야.”

“그때 내 팔도 부러졌거든!”

언외운의 말에 상 노개가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말투를 보니 둘의 친분이 상당한 듯하다.

“사담(私談)이나 하자고 이렇게 바쁜 사람 부른 것은 아닐 텐데?”

언외운이 상 노개의 말을 끊고 본론을 재촉했다.

“그래, 빌어먹을 장보도 이야기를 하지.”

상 노개는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입을 열었다.

“우리 개방에서는 불모의 장보도를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내돌리는 물건으로 결론 지었네.”

“음모란 말씀입니까?”

황보가의 장로, 황보선이 물었다.

“그렇네.”

상 노개의 대답.

“근거가 있는 말씀이겠지요?”

“당연히.”

상 노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모의 장보도가 누군가의 음모라…. 어떻게든 힘을 모아 대처를 해보자는 자리 같군.”

“그런 자리네.”

“그런 자리 치고 사람이 없어.”

언외운이 주위를 둘러보며 인상을 썼다.

“다들 욕심에 눈이 먼 것이지.”

상 노개가 씁쓸히 말했다.

“소림은?”

“망할 돌중들, 불렀는데 안 왔어.”

“그런데 믿을 만한 인물들만 있어야 하는 자리 아닌가?”

언외운이 나를 가리키며 인상을 썼다. 내가 있는 이유를 묻는 것이다. 개방과 손을 잡은 당일 그 뒤통수를 친 것으로 되어 있으니 못 믿을 놈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무면투괴를 찾은 것도, 장보도가 이상하다고 눈치챈 것도 모두 벽력응주, 정의맹 정안각주가 한 일이네.”

상 노개가 언외운과 황보선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말은?”

“개방과의 일은 의혹을 확인하기 위한 연극이었습니다.”

언외운의 말에 차분히 답해줬다.

“이해가 안 되는군. 개방이야 원래 낄 때 안 낄 때 구분 않고 다 끼어드는 집단이지만, 정의맹은 남직례의 신창양가와 남궁세가, 절강 멸왜단의 연맹이잖나? 장보도에 욕심이 없다면 그저 장보도의 불똥이 산동의 남쪽으로 튀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언외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굳이 개방과 손잡고 그런 위험한 연극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뭐 보통의 경우는 그렇다. 나도 수확의 명분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정의맹이 만들어진 연유를 아십니까?”

“얼핏 들어봤네.”

“신창양가와 멸왜단이 공멸할 뻔했지요. 어떻게 공멸을 피하고 동맹이 되었지만 일을 꾸민 암중세력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정의맹의 정안각은 그들을 쫓기 위한 조직입니다.”

이번 일의 배후가 그들일 가능성도 있기에 정의맹 정안각주인 나는 남의 집 불구경하듯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군. 그럼, 이제 장보도 이야기로 돌아가지. 이번 일이 누군가의 음모라 생각하는 근거에 관해 이야기해 보게.”

“그러지요.”

차분하게 일의 전후를 설명했다.

장보도에 묻어 있는 추종향에도 불구하고 며칠간 종적이 드러나지 않았던 무면투괴. 정의맹과 개방이 장보도를 입수하기 무섭게 퍼진 소식. 장보도를 따라온 세 명의 인영, 택향제를 추적한 일 등등.

“잠깐 그럼, 벽력응주 자네는 택향제도 없이 추종향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소린가?”

황보선이 의문을 표했다.

“제가 부리는 매와 심령이 통하기에 후각이 좀 특출나지요. 의심스러우시면 시험을 해보셔도 무방합니다.”

“저 거지가 어떤 인간인데. 벌써 다 해봤겠지.”

내 답에 언외운이 손을 흔들었다.

“그보다 거지와 자네의 말을 입증할 증거를 내놓게. 그저 말 몇 마디로 우리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렇지요.”

“증인을 데려와!”

내 대답에 상 노개가 명을 내렸다. 잠시 후 거지 둘이 증인을 데려왔다.

“누군가?”

“임청 주도 관아의 관졸이네.”

언외운이 묻자 상 노개가 답했다.

“임청 관아의 혈사를 놈들이 일으킨 것이란 말인가?”

“직접 물어보게.”

상 노개가 관졸을 언외운에게 맡기고 한 발 물러났다. 언외운과 황보선이 관졸을 직접 심문했다. 관졸이 알고 있는 일은 별것 없다. 그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과 했던 일에 대해 아는 대로 답할 뿐이다.

내가 해준 이야기와 임청 관아에서 일어난 일, 관졸의 대답은 누군가가 장보도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황을 명확하게 만든다.

“이번 일에 대책이 있습니까?”

황보선이 물었다.

“쟁탈전을 멈추게 해야지.”

“어떻게 말입니까?”

상 노개의 대책에 황보선이 구체적인 방법을 묻는다.

“우리가 손을 잡고 사실을 공표한다 해도 군웅들이 믿지 않을 걸세. 불모의 비급을 차지하기 위한 정도 세력들의 공모로 보겠지.”

언외운은 쟁탈전을 멈추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확실히 그런 방법으로는 쟁탈전이 멈출 수 없다.

“쟁탈전이 일어나는 이유는 뻔하지요. 장보도가 한 장인 탓입니다.”

개나 소나 다 장보도를 가지고 있으면 장보도 때문에 쟁탈전이 일어날 일은 없게 된다.

***

네 개의 목판이 토해내는 장보도는 한 장에 은자 한 냥이라는 가격으로 팔려 나갔다.

공짜로 얻는 정보에는 신용이 담기지 않는 법이니 적더라도 돈은 받아야 한다.

장보도는 불티나게 팔렸다. 장보도의 내용이 진짜라 생각하지 않더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사람 아닌가.

나흘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장보도는 팔릴 만큼 팔렸으니 장보도 쟁탈전을 끝낼 때다.

지금 장보도를 가지고 있는 자는 하남 흑도에서 독행거마로 이름난 독목야차(獨目夜叉).

산중에 몸을 숨겼다지만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내가 나서 응 시리즈로 추적할 필요도 없다.

관졸에게 빼앗은 택향제를 농꾼으로 복제해 상 노개와 언외운, 황보선에게 나눠준 지 오래. 세 명이 각각의 세력을 이끌고 장보도가 풍기는 추종향의 흔적을 쫓아간다.

나는 남궁화청과 함께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독목야차다!”

놈을 발견한 것은 언외운이 이끄는 언가의 무인들.

“잡아!”

“그쪽으로 간다!”

“애꾸야, 장보도를 내놔라!”

약속대로 떠들썩하게 외치며 독목야차를 몰아간다.

그 소란에 군웅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독목야차의 주위는 언가와 개방, 황보세가의 고수들이 둘러싼 상태.

세 세력의 고수들은 독목야차를 포위하는 것보다 각기 맡은 방향을 틀어막고 몰려드는 무인들을 견제했다.

독목야차는 하남에 이름난 독행거마답게 강기를 뿌리며 저항하지만, 상대가 상대들이다.

황보세가의 장로인 황보선만 해도 독목야차 단독으로 상대하기 버거운 고수인데, 거기에 개방의 십대 고수로 꼽히는 장걸개와 그 못지않은 고수인 언외운까지 있다.

몇 수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니 이제 세 명이 장보도를 놓고 격돌한다. 장보도가 세 명 사이를 오간다.

- 적당히 모인 듯하네만?

남궁화청이 주위를 둘러보고 전음을 보냈다.

- 그럼, 시작하지요.

내 전음에 남궁화청이 검을 빼들었다.

“타합!”

그리고 개방 고수들이 틀어막고 있는 쪽을 향해 냅다 달려든다.

콰르르릉!

십삼섬전뢰가 뿌리는 강기의 벼락에 인근 군웅들이 화들짝 놀라 흩어지고 이에 개방 고수들이 정면 대응한다.

콰콰쾅!

강기와 강기가 격돌하는 순간, 나는 개방 고수들의 머리 위를 타 넘어 포위망 안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세 명 사이를 오가던 장보도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들었다.

잽싸게 장보도를 낚아챘지만 그뿐이다.

팡, 쾅, 콰콰쾅!

세 명의 고수가 쏟아내는 강기가 내 진행 방향을 휩쓰니. 단번에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공에서 몸을 틀어 포위망 안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다.

“물러서! 다가오면 찢어 버린다!”

장보도를 활짝 펼쳐 양쪽으로 움켜쥐며 셋을 위협한다.

“또 네놈이군. 벽력응주!”

상 노개가 이를 간다.

“찢을 수 있으면 찢어 봐라!”

언외운이 성큼 한 발을 내디딘다.

“두 분 선배, 잠시만 기다리시오! 벽력응주 자네도!”

황보선이 인상을 쓰며 셋을 말린다. 그러고는 활짝 펼쳐진 장보도를 응시한다.

“그 장보도 진짜인가?”

황보선이 물었다.

“무슨 헛수작이오?”

내가 인상을 쓰자 황보선이 품에서 팔고 있는 장보도를 꺼내 들었다.

“은자 한 냥짜리 장보도랑 별다를 게 없어 보여 그러네.”

황보선이 두 장보도를 비교하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군웅들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크기다.

세 세력의 고수들이 길을 막고 있어 나에게 다가올 수는 없지만 내 손에 들린 장보도를 살피는 데는 무리가 없는 군웅들이다.

저마다 품에서 은자 한 냥짜리 장보도를 꺼내 내가 들고 있는 장보도와 비교하기 시작한다.

“진짜잖아!”

“다를 게 없는데?”

누군가의 목소리에 상 노개도 언외운도 품에서 장보도를 꺼내 코앞에서 확인한다.

“정말이군.”

“진짜 똑같군.”

장보도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나를 일견한 뒤 상 노개가 몸을 돌렸다.

“물러난다.”

상 노개의 명에 남궁화청과 대치하던 개방의 고수들이 그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언가도 물러난다.”

그 뒤를 언외운과 언가의 고수들이 따르고 황보선과 황보세가도 물러났다.

“빌어먹을!”

나도 장보도를 땅바닥에 팽개쳤다.

“갑시다.”

남궁화청을 불러 그대로 물러났다. 그렇게 진짜 장보도는 가치를 잃고 장보도 쟁탈전은 끝이 났다.

= 농꾼, 진척은 있어?

연극을 끝내고 야산을 내려오며 농꾼에게 물었다.

단지 쟁탈전을 끝내기 위해 장보도를 복사한 것이 아니다. 숨어 있는 자들을 찾아내려는 방법이기도 했다.

상정 외의 상황이 터지면 상부와 연락하는 것은 기본 아닌가.

- 그들의 근거지를 찾아낸 듯합니다.

= 위치는?

- 청주(靑州) 부도의 서쪽 우산(牛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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