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산동행(08)
금의위나 동창이 이번 일의 주체라면 이번 일에 깊이 관여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발을 뺄 수도 없다. 지금 이대로 발을 뺀다면 향후 무난한 수확 계획에 걸림돌로 작용할 게 분명하니 말이다.
일단 개방에 알리고 같이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순리.
“벽력응주!”
나를 향한 호통에 고개를 돌리니 때마침 상 노개가 이끄는 개방도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만이라면 상 노개가 내게 호통을 내지를 필요가 없다. 그 뒤로 한 무더기의 군웅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장보도를 쫓는 군웅들 중 발이 느려 늦게 도착한 자들이다. 초극 고수는 몇 없었지만, 인원수는 나를 포위했던 군웅들의 배가 넘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탐욕이 이글거린다. 내게 장보도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감히, 개방의 뒤통수를 쳤겠다!”
상 노개가 노성을 내지르며 내게 양손을 뻗었다.
누런 강기를 휘두르는 황망장의 한 수에 나는 낭패한 몰골로 바닥을 굴러 피했다.
“도망가지 못한다!”
개방도들이 나를 둘러싸 포위망을 형성했다.
“이놈!”
상 노개의 양손이 나를 붙잡기 위해 움직였다. 두어 번 피하다가 붙들려 준다.
“커헉!”
마른기침도 한 번 토해 준다.
- 다친 데는 없나?
상 노개의 염려가 듬뿍 담긴 전언이 귀로 파고든다.
공식적으로는 내가 개방의 뒤통수를 치고 장보도를 털어간 것으로 되어 있으니 개방은 나를 겁박하는 모양새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개방 고수들의 포위망? 실상은 뒤늦게 당도한 군웅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 괜찮습니다.
전음으로 답하는 동시에.
“장보도를 쫓아온 것이라면 늦었소. 이미 내 손을 떠났소.”
나도 한 발 늦은 군웅들의 눈을 의식해 대답했다.
“헛소리!”
상 노개가 한 손으로 내 옷을 풀어헤친다. 내 품 안에 있던 많은 것들이 바닥에 떨어지지만 그 안에 장보도는 없다.
“장보도를 어디 숨겼느냐!”
“내 손을 떠났다 하지 않았소.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시오. 내가 장보도를 가지고 있었으면 살아서 여기 이렇게 팽개쳐져 있었겠소? 개방보다 앞서 왔던 군웅들이 왜 이 자리에 한 명도 남지 않았겠소? 설마 내가 그들 모두를 속여 넘겠다고 생각하시오?”
낭패한 내 몰골과 대답에 개방의 포위망 밖에서 눈을 밝히고 귀를 세우고 있던 군웅들은 재빨리 앞선 군웅들의 흔적을 쫓아 사라졌다.
“도망갈 생각은 버려라.”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눈을 의식한 상 노개가 그렇게 외치며 나를 거칠게 팽개쳤다.
“놈을 압송해!”
그 말에 개방도 둘이 달려와 나를 양쪽에서 제압하듯 부축해 준다.
- 제 물건들 잊지 말고 챙겨 줘요.
“장보도에 대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니 죄다 챙겨라.”
내 전음에 상 노개가 개방도 한 명을 시켜서 바닥에 떨어진 내 물건들을 챙긴다.
- 장보도를 버린 걸 보니 놈들에 대한 단서를 찾은 듯한데?
상 노개가 전음으로 물었다.
- 찾기는 찾은 것 같은데, 문제가 있습니다.
- 문제가 있다니?
- 이번 일의 주체가 금의위 아니면 동창일 가능성이 큽니다.
내 답에 상 노개가 와락 인상을 썼다.
- 자세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하세.
“교활한 놈이니 고문을 해봐야겠다.”
상 노개는 내게 전음을 보낸 다음 그렇게 외친다.
이 양반 연기에 맛 들였나?
근방에 사람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내가 몸을 숨겼던 야산뿐이니 그곳으로 올라갔다.
“주위를 철저히 경계해라.”
상 노개의 말에 개방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 이 근방에 개방도 말고 다른 인원은?
- 없습니다.
나도 농꾼을 시켜 주변을 확인했다.
“우리 말고는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금의위나 동창이라니!”
내 말에 상 노개가 급히 물었다.
“장보도에 바른 추종향을 추적하는 자들을 확인하고 그들을 통해 택향제를 입수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를 제압했단 건가?”
“수를 써서 택향제를 소량만 빼돌렸습니다. 그들은 제가 택향제를 빼돌린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매를 부려 택향제의 냄새를 쫓게 했습니다.”
“택향제의 냄새를 쫓았는데 금의위가 나왔다는 건가?”
상 노개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진다.
“임청 주도 관아의 관졸들이 걸려들더군요. 백이 넘는 관졸들이 죄다 택향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금의위나 동창이 직접 확인된 것은 아니군.”
심하게 구겨졌던 상 노개의 얼굴이 슬그머니 풀렸다.
“상 노개는 금의위나 동창이 아니라 생각하십니까?”
“주도 관아의 관졸들이 동원된 정도로 금의위나 동창을 언급하는 것은 너무 섣부르다고 생각하네만.”
내 물음에 대한 상 노개의 답이다.
“지역 관졸입니다. 하오문과 연관된 자가 있을 겁니다. 하오문이 모를 리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조용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하오문의 입을 알아서 닫게 할 정도의 세력이 어디겠습니까?”
내 주장의 근거를 내놓았다.
“현 상황에서 하오문의 입을 닫게 했다면 확실히 금의위나 동창을 의심할 만하네.”
상 노개가 내 말에 동조했다. 아니 이어지는 말은 동조가 아니다.
“하지만 그 전에 관졸의 입을 닫게 하는 수도 있지 않나?”
“정병도 아니고 백이 넘는 관졸들의 입을 모조리 단속할 방법이….”
“독.”
상 노개의 말대로다. 독을 썼다면 관졸들 입을 닫게 만들기 충분했다.
= 농꾼, 중독 확인. 가능하지?
- 예, 리퍼. 가능합니다.
“확인을 해보지요.”
관졸 하나 잡아서 중독됐는지 살펴보면 그뿐이다.
“당장 독에 정통한 사람을 구하기는 힘드네만.”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상 노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독에 정통했는데 저들이 독을 썼을 경우는 생각을 못 했다?”
뼈를 때리는 말이다. 내가 대답 없이 몸을 일으키자 상 노개가 다시 묻는다.
“놈들은 쫓지 않을 셈인가?”
“이미 매를 붙여 놓았습니다.”
붙여 놓은 것은 매가 아닌 꿈틀이다. 안테나 범위 안에서는 굳이 매를 쓰지 않아도 위치 파악은 된다는 말이다.
“그럼, 우리 둘이 후딱 다녀오세.”
상 노개가 몸을 일으켰다.
개방도들을 야산에서 쉬게 하고는 상 노개와 나 둘만 단출하게 움직인다.
= 남궁화청과 신창양가의 셋은?
- 주도 내에서 리퍼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택향제를 가진 관졸 하나 찍어줘. 조용히 제압해서 들통난 개방 비밀 거점에서 보자고, 이 각쯤 걸린다고 전해줘.
그렇게 관졸 납치를 사주하고는 주도를 향해 달렸다.
개방의 비밀 거점은 개방과 일행들이 벌였던 연극 때문에 곳곳이 박살 난 폐허로 변해 있었다.
지극히 개방과 어울리는 분위기로 변모한 곳에서 남궁화청이 신창양가의 셋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죽립을 뒤집어쓴 모습으로.
물론, 납치되어 정신을 잃은 관졸 하나와 함께다.
“각주, 별다를 거 없는 평범한 관졸이었소. 이런 자를 왜….”
“이야기는 잠시 뒤에.”
남궁화청의 말을 끊고 정신을 잃은 관졸을 살폈다.
= 중독 확인해.
- 대상자의 혈액을 채취해 입에 머금어 주시고 심장과 옆구리에 손을 대 주시지요.
농꾼이 시키는 대로 관졸의 몸에 상처를 내 피를 머금고 손을 움직인다.
- 몇 가지 병은 찾을 수 있습니다만, 이렇다 할 중독 증상은 찾을 수 없습니다.
농꾼의 보고.
“중독 상태가 아닙니다.”
“뭐?”
상 노개의 눈이 커졌다.
“각주, 무슨 일인지 알고 싶소만?”
남궁화청이 내게 물었다.
“이번 쟁탈전을 조장한 자들이 금의위나 동창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 남궁화청과 신창양가의 셋에게 늘어놓았다.
“금의위의 행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양묵일이 나섰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상 노개가 물었다.
“금의위 일을 몇 번 해본 적이 있지요.”
금의위로 근무했다는 소리다.
“이번 같이 비밀스러운 일이라면 외부 사람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데 굳이 관졸을 쓸 이유가 없지요.”
“금의위에서 듣기로 동창 쪽은 금의위보다 더 은밀하고 확실하다 들었습니다.”
양묵일의 말에 양묵월이 말을 보탰다. 금의위 실무 경험자들이 금의위의 행사도 동창의 행사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굳이 중독시킬 필요 없지 않습니까?”
양묵월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을 시키는 동안 관졸들의 입을 막을 목적이라면. 관졸들이 중독되었다고 믿게만 만들면 되니까요.”
“독을 안 써도 중독되었다 하면 의외로 잘 속지.”
동생의 말에 양묵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 리퍼, 관졸들이 관아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농꾼의 보고다.
장보도는 임청 주도를 떠난 상황. 그렇다면 임청 주도 관졸들의 쓸모는 다했다는 소리. 해 떨어진 지 오래인 시간에 관졸들을 관아로 모으는 이유는 뻔했다.
관졸들에게 나눠 준 택향제 수거와 살인멸구(殺人滅口).
“각주, 일을 꾸민 자들이 아무래도 살인멸구를 택한 듯한데?”
양연곤이 나에게 말했다. 그도 매를 통해 관졸들이 관아로 모이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양연곤의 말을 못 들은 척 기절해 있는 관졸의 품을 뒤져서 택향제를 찾아냈다.
“상 노개, 챙기시지요.”
“이건?”
“택향제입니다. 그거면 장보도로 수작 부리고 있는 놈들이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여차하면 이 자를 증인으로 쓰면 되고요.”
별로 알고 있을 게 없는 관졸이지만 그 존재만으로 정황 증거가 될 수 있다.
“그 말은 놈들의 존재를 공표해서 공개적으로 쫓자는 말인가?”
상 노개가 인상을 쓴다.
놈들이 누군지 제대로 밝혀진 게 없는데 일을 공표한다는 것은 놈들을 놔주자는 소리와 다름없다.
“공표해 봐야 쟁탈전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흑도와 사파 쪽이 우리 말을 믿어 주지 않을 테니까요.”
말해 봐야 믿지 않을 놈들에게 입 아프게 말해 줄 의리 따위 없다.
“그 말은 말이 통할만 한 곳에만 연락하자는 것이군.”
“어쨌든 피해는 줄여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내 명성은 올라가고 나란 인물에 대한 신용이 정파 내에 형성된다. 정의맹 정안각의 활동에 명분이 더해지고 수확은 더 수월해지는 것이다.
“각주.”
양연곤이 나를 불렀다. 관졸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려는 모양새다.
“여리네요.”
아니 눈치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하아.”
내 말에 양묵일이 한숨을 내쉬며 양연곤의 한쪽 어깨를 잡았다.
“왜….”
“조용.”
양연곤이 입을 열려했지만 양묵월이 다른 한쪽을 잡으며 말했다.
“단련이 필요한 젊은이야.”
상 노개의 말이다.
“그렇지요.”
남궁화청도 양연곤과 같은 것을 봤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초극 고수. 양연곤이 내게 한 말을 듣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전부 그 일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 그게 뜻하는 게 뭔지 모르면 이쪽 일하면 안 된다.
그날 임청 주도 관졸들의 떼죽음은 장보도에 눈 뒤집힌 마인이 벌인 무도한 짓의 하나로 소문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