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산동행(07)
“군웅들은?”
섬광격에 당한 자들은 자기 눈부터 챙기기 바쁘겠지만 소림 고수들처럼 소식이 늦어 뒤늦게 온 자들은 활공으로 성벽을 넘는 나를 봤을 게 뻔하다.
- 당장 추적해 오는 자들은 없습니다.
농꾼이 임청 주도 인근의 화면을 띄운다. 내가 타 넘은 성벽 인근을 수색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성벽 위에 올라 사방을 살피는 작자들도 있다. 낮이면 모를까 밤이다. 거기다 거리도 상당하다. 어둠과 구분되지 않는 시커먼 피풍의를 펼치고 땅에 붙듯 달리고 있는 내가 보일 리 없다.
“일행들은?”
열심히 발을 놀리며 물었다.
나를 못 찾으면 저들이 할 일은 뻔하다. 내 일행들에게 몰려가 나를 내놓으라고 하겠지.
- 계획대로 움직이는 중입니다.
신창양가의 세 사람과 남궁화청은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자들. 무기 감춘 뒤에 옷 갈아입고 죽립 벗으면 그들이 정의맹 사람인 줄 알 만한 사람이 없다.
뭐 만나기 무섭게 추종향을 뿌려놓은 개방은 알겠지만 말이다.
“인근에 몸을 숨길만 한 산이나 숲은 없어?”
장보도로 뭔가를 꾸미는 자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니 능력 된다고 장보도를 들고 멀리 도망가서는 안 된다. 지친 척하고 추적이 따라붙기를 기다려야 하니 적당한 장소를 찾는다.
- 남쪽으로 6km. 야산이 하나 있습니다.
농꾼의 말에 열심히 바닥을 박차 야산에 도착했다. 둘레가 1km도 안 되는 동네 뒷산 같은 규모다.
그래도 제법 나무가 있어 사람 한 명 숨기에는 충분했다. 야산에 올라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주저앉는다.
반 시진 정도 쉬었을까?
- 리퍼, 추적자가 따라붙었습니다.
농꾼의 경고와 함께 화면이 떠올랐다. 내가 움직인 경로를 따라 내달리는 인영이 셋이다. 장보도에 발라진 추종향을 쫓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전원 초극입니다.
여차하면 나를 죽이고 장보도를 회수하겠다는 수작일지도 모른다.
“어디에 속한 놈들이야? 인원은 저 셋뿐?”
임청 주도 내에 있었던 초극 고수라면 응 시리즈의 감시망 아래 있던 자들이다. 놈들에 대한 데이터를 찾을 수 있단 소리.
- 감시 데이터상 저 셋 말고 다른 일행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분이 드러날 발언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중요한 이야기는 전음으로 대화를 한 듯합니다.
도청 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육가장 새끼들 아냐?”
서생원들의 감시하에서도 나 모르게 강남 흑도련을 결성한 전적이 있는 육가장이다 보니 덜컥 의심이 든다.
- 육가장의 초극 고수 이상은 통신 벌레와 꿈틀이가 붙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번 일에 동원되었다면 제가 모를 리 없습니다.
육가장은 아니라는 말이다.
“강남 흑도맹일 가능성은?”
- 강남 흑도맹이 이번 일에 끼어들기는 했지만, 그들이 파견한 인원은 응 시리즈의 감시하에 있습니다.
농꾼의 장담도 있지만 생각해 보니 강남 흑도맹은 아니다.
장보도를 이용해 군웅들을 움직여 향후 적이 될 삼세동맹을, 정의맹을 어떻게 해볼 수작?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이다. 들통 나면 산동 인근의 굵직한 세력들은 죄다 적으로 돌리는 미친 짓 아닌가. 그들에게 쳐들어올 명분을 주는 짓이다.
게다가 강남 흑도맹은 육가장 덕에 내가 부리는 매들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냥 산 아래로 달려가 당장 셋을 때려잡아? 뭐 그것도 한 방법이지만, 단 셋이서 이런 일을 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개방의 비밀 거점을 찾아낸 것을 보면 그렇다. 초극 고수인 저들 중 누가 추종향을 따라 개방의 비밀 거점 근처까지 쫓아왔다면 매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을 리 없다. 그러니 분명 조직이 있다.
게다가 내가 직접 나서기보다 개방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
“일단 택향제 샘플부터 확보해.”
어쨌든 내가 움직인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추종향의 냄새를 맡고 있다는 뜻. 택향제부터 확보할 것을 명했다.
- 상황상 꿈틀이보다 통신 벌레가 샘플 확보에 적합하다 계산됩니다.
“그 부분은 알아서 판단해.”
- 시작합니다.
화면에 몇 개의 점이 표시된다. 그 점들이 내달리는 인영들의 정면을 향해 접근한다. 통신 벌레다. 바람을 타고 그 셋에게 자연스레 들러붙는 것이다.
세 명이 갑자기 코를 풀거나 재채기를 한다. 통신 벌레가 그들의 코에 들어간 탓이다.
“신호가 사라졌는데?”
- 호신강기와 접촉, 해당 개체들의 기능이 정지하였습니다.
“실패했다는 거야?”
내 물음에 화면이 바뀐다. 나를 쫓는 셋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비추는 것이다. 그곳에서 수백의 점들이 반짝이고 있다. 통신 벌레들이다.
- 확보했습니다.
추적자들의 코에 들어간 탓에 호신강기와 접촉해서 망가진 통신 벌레들을 찾은 것이다.
몇 분 앉아 있자니 놈들이 산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한 놈이 남고 두 놈이 좌우로 갈라져 야산의 둘레를 돈다.
추종향 냄새로 내가 야산으로 올라간 것을 아는 그들이다. 그러니 야산 둘레에 추종향 냄새가 나는지, 내가 야산을 빠져나간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 샘플 도착했습니다.
농꾼의 보고에 입을 벌렸다.
윙윙하는 벌레 나는 소리와 함께 입에 이물감이 느껴진다. 놈들의 콧속에 들어갔던 통신 벌레를 다른 통신 벌레들이 들고 와 내 입에 넣은 것이다.
- 분석 시작합니다.
그래프가 요동친다. 농꾼이 열심히 일하는 티를 낸다. 몇 초 뒤 요동치는 화면이 멈췄다.
= 어때 추적 가능해?
산 아래 있는 놈들을 의식해 육성이 아닌 손가락을 움직여 대화한다.
- 가능합니다.
= 응4로 임청 주도부터 훑어.
- 예, 리퍼.
그렇게 농꾼과 대화하고 있자니 세 놈이 다시 한자리로 모이는 게 화면에 잡혔다.
셋 중 하나가 왔던 길을 되짚어간다. 군웅들을 몰고 오기 위해 임청 주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각 정도 지났을까?
- 하오문에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화면이 뜬다. 하오문 지부를 감시하는 응5의 시야다. 거기에 여기서 달려간 놈이 보였다.
잠시 후 하오문 지부에서 수십의 인원이 쏟아져 나왔다.
화면을 치웠다. 이제 군웅들이 몰려오기를 기다렸다가 적당히 싸우다 장보도를 흘리면 된다.
= 그리고 강남 흑도맹 놈들 따로 표시해 줘.
타지에서 옆 동네 사람 만났으니 인사나 해줘야지.
어차피 칼질은 해야 하니 슬슬 몸을 푼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개떼처럼 달려오는 무인들이 보였다.
조용히 다가와 잡아챈다는 생각은 없나? 하긴 전후좌우 경쟁자들이 가득하니 서두를 수밖에 없지.
그런데 그리 요란하게 달려오면 나는 눈치 채고 도망치는 척해야 하잖아.
“하아.”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산 아래로 달린다. 순식간에 산을 내려온 나는 군웅들에게 등을 보이며 달렸다.
“놈이다!”
“저기 있다!”
목청 큰 작자들의 호통에 군웅들의 시선이 모두 내 등판으로 쏠렸다.
“놈은 정상이 아니다!”
적당히 달리는 내 모습에 누군가가 외쳤다. 그리고 그 소리에 군웅들이 더욱더 기를 쓰고 달렸다.
= 선두와 거리 표시.
시야 한편에 숫자가 떠올랐다.
쟁탈전에 말을 탄 무인 따위 없다. 경쟁자의 기동력을 줄이기 위해 모두가 노력하니 말 따위는 쟁탈전 초반에 죽어 나자빠진다.
이미 임청 주도에서 이십 리가 넘는 거리를 달려왔기에 앞장선 자들은 죄다 초극의 무인들.
123, 117, 109….
적당히 달리니 초당 거리가 팍팍 줄어든다.
30.
그리고 거리가 적당히 좁혀졌다 싶은 순간 칼을 들어 발아래를 후린다.
캉!
“큭!”
길가에 굴러다니는 괜한 돌멩이를 후려치며 맹렬히 바닥을 굴렀다.
누군가에게 암습 당한 모양새에 뒤따라오던 작자들이 기회라고 덮쳐든다.
카카카콰쾅!
도기에 전압을 걸어 유사강기를 만들어 모든 공격을 받아낸다. 그리고 낭패한 척 바닥을 구른다.
선두의 초극 고수들이 나와의 격돌로 잠시 주춤거릴 때 그 뒤를 달리던 작자들이 튀어 나온다.
몸을 일으킬 틈도 없이 각종 강기들이 날아든다.
캉, 카캉! 쾅!
앞의 둘은 막아내고 세 번째 공격은 몸을 굴려 피한다.
“어린놈이 개가죽마냥 질기구나!”
시퍼런 빛 날이 세상을 상하로 동강낼 기세로 호선을 그린다. 딱 봐도 위력적인 검강.
쾅!
공격을 받기 무섭게 몸을 띄우니, 마차 바퀴에 치인 돌멩이마냥 뒤로 튕겨 난다.
다섯 장을 날아 바닥을 두어 바퀴 구른 다음 몸을 일으키니 군웅들의 포위망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장보도를 내놔!”
“네놈 같은 핏덩이가 가질 물건이 아니다!”
사방 천지에서 탐욕에 찬 고함이 터진다. 말뿐만이 아니다. 각종 강기를 앞세워 그 탐욕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순간.
아미타불!!!
전신을 뒤흔드는 굉음이 그들 모두의 머리를 비워 버렸다. 사람을 강제로 몰아(沒我)로 밀어 넣는 불문의 음공 사자후다.
파라락!
그렇게 사자후의 음공이 효과를 발휘할 때 가사 자락 나부끼며 네 명의 민머리들이 내 사방을 둘러싸듯 내려앉는다. 소림 무승들이 이번에는 제때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그들의 발이 땅에 닿기 전이 기회. 나는 바닥을 박차고 맹렬히 바닥을 구른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빠져나왔다.
“헛!”
“이런!”
소림 무승들의 당혹성이 귀를 때리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소림이다!”
“망할 중놈들이다!”
강제적 몰아에서 벗어난 군웅들이 소림 무승들을 보고 기겁성을 내지른다.
소림 무승들이 그들을 지나 나를 쫓으려 하지만 인근의 군웅들이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막아!”
“저것들 손에 장보도가 들어가면 끝장이다!”
사생결단을 낼 정도로 적극적으로 덤벼드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소림 무승들을 향해 한두 번 강기를 휘둘러 그 발걸음을 늦추게 하는 자는 많았다.
= 놈들은?
목을 노리는 칼을 걷어내며 손가락을 놀린다.
- 좌측으로.
농꾼의 대답을 들으며 바닥을 구른다.
장보도를 노리는 자들의 공격이 사방팔방에서 쏟아지지만 당장 내 걸음을 막아설 만한 공격은 없다.
- 저자들입니다.
그렇게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내 앞에 강남 흑도맹의 무리들이 등장했다.
“죽어!”
마침 등 뒤에서 떨어지는 공격이 적당했다.
카르릉!
뒤로 돌아 막아내지만 상대의 도격이 내 도신을 타고 미끄러지며 내 허리춤을 베어냈다.
= 지금!
그와 동시에 품속의 방수가 움켜쥐고 있던 장보도를 찢어진 옷 사이로 투척한다.
“안 돼!”
내 당혹성이 군웅들의 시선을 모으니, 그들의 눈에 가죽으로 둘둘 말린 뭉치가 강남 흑도맹 무리에게 날아가는 것이 똑똑히 보일 것이다.
“내 장보도!”
내 외침에 나를 향하던 모든 것들이 강남 흑도맹의 무리로 향했다.
“신속히 이탈한다.”
얼떨결에 장보도를 손에 넣은 강남 흑도맹의 누군가가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
“쫓아!”
“저놈들이 장보도를 가져간다.”
그렇게 장보도를 털어 버린 나는 탈진한 모양새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장보도를 잃은 나는 군웅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군웅들은 주저앉은 나를 두고 장보도를 쫓아간다.
- 택향제 추적 결과가 나왔습니다.
장보도를 쫓아 멀어지는 군웅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농꾼의 보고가 올라왔다.
= 뭐가 이리 많아?
임청 주도 내에 택향제를 가진 자들이 백이 넘는다. 잠시 후 화면에 그들의 면면이 나왔다.
“관졸?”
택향제의 소지자들은 무인도 아닌 관졸이었다.
젠장, 관졸이 왜 이런 일에 동원되었느냐도 문제지만, 아니 저만한 관졸을 움직이는데 비밀 유지가 된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다.
어디 군진의 정병들도 아니고 지역 관아의 관졸들이다. 저들 중 하오문에 한 발 걸친 자들도 있을 텐데….
그 말은 하오문이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는 소리다. 산동의 거대 세력은 물론 산동 인근의 굵직한 방파 상당수가 나선 일이다. 거기에 무림 태산북두인 소림까지 있다. 이들을 죄다 속이는 일이다. 그런데 하오문이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이들 모두와 척을 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세력이라는 말이다.
그런 세력이 무림에 있나?
내 알기로는 없다. 아니 무림이 아니라면 없지는 않다.
천하의 주인, 황제를 등에 업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집단! 바로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