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산동행(04)
임청 주도가 가까워지자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죽립을 써 얼굴을 가렸다.
죄다 세가의 구린 일하는 사람들이다. 얼굴이 드러나면 나중에 일하기 힘들어지니 당연했다.
남궁세가와 신창양가에서 인선을 이렇게 짠 것은 무림의 시선을 온전히 내게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명성 있는 세가의 인사가 끼어 있으면 다른 세력과 접촉할 때 내가 뒷전으로 밀려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해 쨍쨍한 대낮인지라 임청 주도의 성벽을 타 넘을 수 없기에 성문으로 들어섰다. 당연히 검문을 피할 수는 없다.
“어디서 오신 분이시오.”
관병이 아니라 무인이 다가와 물었다. 도객에 검객, 창수가 셋인 일행이다. 거기에 나를 제외하고는 죄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관병이 아닌 무인이 나선 것이다.
“정의맹에서 왔소.”
“정의맹?”
무인이 의아한 얼굴이 된다. 당연하다. 정의맹 정안각주인 나도 엊그제 처음 들었던 명칭 아닌가.
“멸왜단과 신창양가 남궁세가의 연합이오.”
네 대답에 무인의 얼굴이 굳어진다. 하나만 해도 대단한 이름이 연달아 셋이 튀어 나왔으니 당연하다.
“불모의 장보도 때문에 오신 것이오?”
무인이 굳은 인상을 풀지 않고 물었다.
“그렇소.”
“정도를 걷는 분들이니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 믿소.”
무인이 물러나고 우리는 성문을 통과했다.
일단 거처부터 잡았다. 대다수의 객잔은 사람이, 무인이 득실거렸다.
응 시리즈를 움직여 초극 고수들이 없는 곳을 찾아 방을 빌렸다.
방 안에서 식사를 마치고는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개방과 접촉할 생각입니다.”
“정안각의 향후 행보를 생각하면 개방과 친해져 나쁠 것 없네.”
남궁화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중 세력의 실체를 모르는 남궁세가 인물다운 말이다.
- 개방이 정안각의 향후 행보에 동참하고자 하면 일이 골치 아파질 수도 있네.
양묵일의 전음이다. 정안각이 추적하는 암중 세력에 개방이 관심을 가지고 파고든다면 신창양가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것이다.
- 강남 흑도맹이 있지 않습니까.
여차하면 강남 흑도맹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면 된다. 아니 흑도맹이 안되면 섬서의 흑천맹도 있다. 정 안되면 마교의 수작으로 만들어도 되고 말이다. 다들 암중에서 수작을 꾸민다 해도 무리가 없는 단체들 아닌가.
- 개방을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닌가?
양묵일의 전음에 내가 뭐라 답을 할 필요가 없었다.
탁탁.
방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이어지는 목소리.
“정의맹에서 오신 분들 계시오? 개방에서 왔소.”
우리가 찾아가기 전에 개방이 우리를 찾아왔으니 말이다.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재빨리 벗어 놓은 죽립을 뒤집어썼다.
“들어오시지요.”
내 대답에 방문이 열리며 삼십 대의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개방의 일원답게 여기저기 헤지고 기운 옷을 입고 있지만, 옷 자체는 깨끗했다.
“개방의 장걸개(掌傑丐)께서 정의맹의 분들을 뵙자 하오.”
찾아갈 생각인데 저쪽에서 초대하니 거부할 이유가 없다.
일행과 함께 개방의 거지 뒤를 따라 걸었다.
개방의 거처는 주도 변두리 빈민가의 한 폐가였다. 아니 그냥 담벼락만 남아 있는 공터다.
공터 안에 있는 거지는 넷뿐이었다. 오십 대의 중늙은이 거지 셋과 흰머리가 성성한 늙은 거지 하나.
넷 다 호신강기를 이룬 자들, 최소 초극의 고수들이다.
“내가 자네들을 보자고 한 사람이네. 상 노개라 부르면 되네.”
흰머리가 성성한 늙은 거지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가 개방 십대 고수 중 한 명인 장걸개다.
“정의맹 정안각을 책임지고 있는 이도연입니다.”
일행을 대표해 예를 차렸다.
“정의맹이 남직례의 두 세가와 절강의 멸왜단이 연합한 곳이라 들었네. 맞나?”
장걸개 상 노개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내 길게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정의맹에서는 불모가 남긴 유산이 필요한가?”
상 노개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불모가 남긴 유산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직례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왔습니다.”
상 노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답한다.
“다들 말은 그렇게 하지.”
- 리퍼, 추종향으로 의심되는 물질이 검출되었습니다.
농꾼의 경고.
과연 개방이다. 농꾼이 아니었으면 개방이 추종향을 뿌리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게 개방이 우리를 부른 목적인가?
“개방은 어떻습니까? 불모의 유산에 관심이 있습니까?”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상 노개의 눈을 뚫어져라 보며 말이다.
“유산보다는 그 진위(眞僞)에 대해 더 관심이 있지.”
불모의 장보도가 누군가의 음모가 아닐까 의심한다는 말이다.
“정의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상 노개의 대답에 내가 다시 물었다.
“누군가가 신창양가와 멸왜단의 공멸을 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암중 세력에 대해 들어봤다는 답이다.
“이번 일도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기에 정의맹도 장보도의 진위에 관심이 많습니다.”
정의맹도 개방과 같은 생각, 이번 일을 누군가의 흉계로 의심한다는 말이다.
“그 말은?”
상 노개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정의맹과 연수하시겠습니까?”
“좋네.”
내 말에 상 노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자네들이 정의맹의 사람임을 증명해야겠지만 말이야.”
이런 것은 확실히 하는 것이 좋았다. 대충 넘어갔다가는 사칭범에게 뒤통수 맞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세가와 멸왜단에 연락을 넣어 인근 개방 분들을 초대하라 하지요.”
“일행의 기세를 보면 내가 알만한 인물들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않나 보군. 저기 남궁세가에서 온 분은 내 아래가 아닌 듯한데 말이야.”
내 말에 상 노개가 일행들을 둘러보다 남궁화청을 찍어 말했다.
“무림의 선배 앞에서 죽립을 벗지 못하는 사정이 있음을 상 노선배께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남궁화청이 상 노개에게 허리를 숙였다.
“세가에서 꽁꽁 싸매 둔 전력들인가?”
상 노개가 그 사정을 바로 짐작하고 말을 이었다.
“숨겨둔 전력을 꺼내 들었다는 것은 정의맹에 속한 양가와 남궁가가 이번 일을 가볍게 보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겠지? 최종 확인은 정안각주의 말대로 하기로 하고 지금 당장은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 증명하게.”
“당장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면?”
내 물음에 상 노개가 히죽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 이름이 이도연이라며? 절강 멸왜단의 벽력응주 본인이잖나. 혹시 동명이인인가?”
벽력과 매를 보여 벽력응주 본인임을 증명하라는 말이다. 뭐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한 손을 금속으로 물들인다.
파자작!
퍼런 뇌전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가볍게 노니는 것을 상 노개에게 보여준다.
“하늘을 보시겠습니까?”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머리 위 하늘을 가리켰다. 응1이 위장 장치를 끄고 모습을 드러냈다.
“상 노개께서 원하는 대로 날게 하겠습니다.”
“좌측으로 세 번 크게 원을 그리게 하게.”
상 노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응1이 움직인다.
“이렇게 움직일 수 있겠나?”
상 노개가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묘한 도형을 그리자 하늘 위의 응1이 상 노개가 그리는 도형을 허공 위에 그린다.
“대단하군. 진짜 매와 영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럼, 저 매로 초극 고수를 알아볼 수 있다는 소문도 사실인가?”
“예.”
“그렇다면 이 망할 놈을 잡을 수 있겠군.”
상 노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스산한 기운을 풍긴다.
“망할 놈이라면?”
“무면투괴(茂面偸怪). 지금 장보도를 들고 있는 놈이야.”
별호만 들어도 역용술이 뛰어난 작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일당은 없었습니까?”
“없었네.”
“임청 주도에서 빠져나갔을 가능성은요?”
군웅들이 임청 주도로 몰려온 것은 삼 일 전이다. 역용술이 뛰어난 고수라면 충분히 빠져나가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이틀 전 임청 주도 내에서 소림의 고수들과 충돌하여 큰 내상을 입었네. 주도 어딘가에 숨어서 내상을 치료 중일 걸세.”
“그런데, 소림과는 연수를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소림 이야기가 나와서 물었다. 개방이나 소림이나 불모의 유물보다는 피가 덜 흐르도록 하는 것이 목적 아닌가.
“이런 쟁탈전에서 소림의 대응은 하나뿐이네. 수거 즉시 현장 파기. 몇 번 뒤통수를 맞은 경력이 있어서 이런 쟁탈전에 한해서는 타 세력과 손을 잡으려 하지도 않네. 소림에서 내려보낼 때 아예 고집불통의 돌중들만 골라 보낸단 말일세! 뒤에서 수작 부리는 놈들을 찾아 뿌리 뽑을 생각 따위는 안 해. 당장 흐르는 피만 막고 보자는 거지.”
상 노개는 소림에 쌓인 게 많은지 이야기를 하며 열을 올린다. 어쨌든 물건의 진위를 가리고 있을지도 모를 배후 인물까지 대비하는 개방 입장 상 이런 쟁탈전에서 소림과 손을 잡기는 무리라는 말이다.
“소림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놈을 잡을 생각을 하세.”
“예.”
입으로는 상 노개의 말에 대답하며 손가락을 움직여 농꾼과 대화를 한다.
= 이틀 전에 내상 입고 사람 눈 피해서 드러누웠다면 응 시리즈의 감시망에는 없을 수도 있다는 소리지?
- 바깥출입이 전혀 없었다면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공중에서 내리쬐는 응 시리즈의 스캔 방식으로는 창고 같은 곳에 숨어 있는 초극 고수를 발견할 수는 없다.
= 서생원들을 공수해 주도 전체를 쫘악 훑어야 하나?
- 그보다는 리퍼에 할당된 통신 벌레들을 활용하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원활한 통신을 위해서 내 인근에 포진된 벌레들은 못 해도 수천 마리다. 예비용까지 치면 만 단위의 통신 벌레들이 있다.
= 통신 벌레들로 초극 고수를 찾을 수 있다고?
- 일정 공간 안 사람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고 호흡의 깊고 얕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극 고수의 가부는 꿈틀이를 투입해 알아내면 됩니다.
= 얼마나 걸려?
- 호신강기의 억제를 전제로 리퍼에 할당된 모든 개체를 동원하면 70분 정도 예상됩니다.
서생원을 공수해 오는 것보다 훨씬 빠르니 안 할 이유가 없다.
= 호신강기 억제하면 바로 시작해. 탐색 조건은 사람 눈을 피해 내상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초극 고수다.
- 예, 리퍼.
“한 시진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농꾼과의 대화를 끝내기 무섭게 상 노개에게 말했다. 시간은 일부러 넉넉하게 말한다.
“한 시진 안에 임청 주도 안의 초극 고수들을 모조리 파악할 수 있다니!”
뭔가 다른 소리를 하고 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조절해 호신강기를 억제한다.
70분이 좀 안 됐을까?
- 대상 확인되었습니다. 주도 내에 총 셋입니다.
농꾼의 보고가 올라왔다.
= 위치는?
내 말에 농꾼이 임청 주도의 지도를 띄웠다. 지도에 각각의 위치가 표시된다.
민가에 한 놈. 번듯한 장원의 창고에 한 놈. 임청 관가의 창고에 한 놈이다.
공력을 정상으로 돌리며 눈을 뜬다.
“몸을 숨기고 내상 치료에 전념하는 자들을 셋 찾았습니다.”
“벌써?”
내 말에 상 노개의 눈이 커졌다.
“누가 무면투괴인지 모르니 일행을 셋으로 나눠 단번에 제압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