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산동행(02)
“하아.”
한숨이 나온다.
불모는 천강의 경지에 올랐던 고수다. 그런 사람이 남긴 장보도가 가리키는 곳에 무엇이 묻혀 있겠나. 천강의 고수가 남긴 비급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무인이라면 눈 까뒤집고 덤빌만한 일인 것이다. 온갖 고수들이 몰려들어 난장판이 벌어질 것이 자명한 일.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런 일에는 끼지 않는 게 정상이지. 불모가 남긴 비급이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천강의 경지라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니깐.”
내 한숨에 진우탁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타삼문의 기나긴 역사 중에 천강의 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타삼문의 비고에 천강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남긴 비급이 있고 진우탁은 그 비급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의 경지는 천강이 아닌 천문위다. 비급이 있다고 천강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지?”
“하아, 스스로 판 무덤이니 어쩌겠습니까?”
진우탁의 말에 한숨을 쉬며 답했다. 모든 게 다 그놈의 조사대 때문이다.
수확 대상자들을 편하게 만날 명분으로 내세운 게 무림 전체를 상대로 수작을 부리는 암중 세력의 존재고 그에 대한 조사다.
그런데 이번 장보도의 일은 그런 암중 세력이 수작 부리기 딱 좋은 일 아닌가.
여기에 어떤 대응도 안 하고 구경만 한다? 스스로 내세운 명분에 똥물을 끼얹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수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조사대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가야 했다.
“남궁세가와 신창양가에서는 어쩐답니까?”
“둘 다 아주 적극적이야.”
예상외의 대답이다.
“오대세가나 되는 곳에서 불모의 비급을 탐낼 리는 없을 텐데요?”
절강에서의 수확으로 보타삼문의 사정에 훤하듯 두 가문 역시 수확을 통해 내부 사정을 많이 아는 나다.
남궁세가와 신창양가가 괜히 오대세가가 아니다. 가문의 무공으로 천강에 오른 조상이 있고 그 조상이 남긴 비급이 있지 않은가.
선조가 남긴 비급으로도 천강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는데 계통도 성격도 다른 무공에 눈을 돌린다?
불모의 비급을 얻고, 그걸 참조해서 천강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 나오면 다행인데 나오지 않으면 뒷말이 나올 게 뻔했다.
선조가 남긴 무공보다 마교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여기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내부에서 나올 게 뻔하다.
고생해서 얻어 봐야 내부 분열의 단초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불모의 출신이 마교잖나.”
“아.”
진우탁의 말에 남궁세가가 적극적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장보도를 남긴 불모는 마교 출신, 마교 놈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끼어들 게 분명했다. 마교의 수작질에 큰일 날 뻔한 남궁세가다. 마교 놈들 잘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불모의 유산이 누구 손에 들어가든 그게 마교 놈들은 아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창양가는 이번 일이 터진 곳이 산동이라는 것이 걸려서 나서는 것이겠네요?”
산동에서 운하를 타고 남하하면 바로 나오는 곳이 신창양가의 세력권이다. 쟁탈전이 산동에서만 벌어지면 몰라도 까닥 잘못하면 장보도를 얻은 놈이 신창양가의 세력권 안으로 기어들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장보도를 노리는 온갖 잡놈들이 그 뒤를 따라 신창양가의 세력권으로 들어와 난장판을 벌인다면 그 뒤처리는 보통 일이 아니게 된다.
아니 뒤처리도 뒤처리지만 신창양가의 이름값이 떨어지게 된다. 안 그래도 천문위인 가주가 죽어 전대 가주가 다시 복권한 신창양가 아닌가. 그런데 잡놈들의 침입을 허용하게 되면 신창양가도 이제 한물갔다는 소리가 떠돌게 분명했다. 그런 일을 허용할 리 없었다.
“장보도의 일로 신창양가에 불똥이 튀면 그걸 무난히 수습하기 힘들지. 힘으로 누르려면 아무래도 동맹의 힘을 빌려야 해. 아니 자네의 도움이 필수지.”
내게 빚을 지는 것보다 나설 수밖에 없는 내게 적극적으로 협조해 장보도의 난장판이 신창양가의 세력권까지 퍼지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인원을 보낸답니까?”
“자네가 있으니 소수 정예가 움직이는 것으로 합의를 봤네. 한 명씩 붙여 준다더군.”
뭐, 매를 활용하면 장보도를 추적하는 일은 물론이오, 충돌을 피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그러니 괜히 여러 사람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초극 고수겠지요?”
“남궁세가에서는 자네도 한번 본 남궁화청이 움직일 걸세.”
남궁화청은 천문위를 앞둔 고수다. 남궁세가에서 세게 나온다. 역시 마교놈들 물 먹일 생각이 가득하다.
“신창양가에서는 아직 누구를 보낼지 정하지 않았다더군. 아마 자네가 신창양가에 도착하면 정해질 거야.”
육로로 산동으로 가려면 어차피 신창양가가 있는 양주 쪽으로 가야 했다.
“아, 그리고 우리 동맹의 명칭은 정의맹(正義盟)으로 결정이 났네. 그러니 자네가 맡게 될 직책은 정의맹 정안각주(正眼閣主)일세.”
“예? 동맹의 정예들을 각출해 상시 전력을 만들겠다는 겁니까?”
느슨한 동맹 체제가 아닌 즉각 대응이 가능한 상시 전력을 갖추면 강남 흑도맹과 긴장감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냥 명칭이 그렇다는 걸세. 명칭이. 암중 세력이 암약하고 있는 와중 아닌가. 그런 상황에 흑도맹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암중 세력 따위 있지도 않다는 것을 잘 아는 양반이?
“향후 흑도맹과 충돌을 계획하고 계신 겁니까?”
“어흠. 조사대, 그러니 정안각 일로 자네는 바쁘지 않나?”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자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말해 주지하는 눈빛이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저 수작에서 핵심 역할을 떠맡아야 할 것이 분명하다.
“바쁘지요. 그러니 정안각 일을, 암중 세력 탐문이나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어쨌든 단주는 멸왜단을 말아먹을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언제 출발할 건가?”
진우탁이 물었다.
“남궁세가에서 사람이 오면…. 남궁세가에서는 바로 신창양가로 간답니까?”
“그쪽이 빠르지 않나.”
“그럼 저는 해 떨어지면 출발하겠습니다.”
혼자 움직일 때는 사람 눈 피해 피풍의 펼치고 내달리는 게 편하다.
“그러게.”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거처로 돌아왔다. 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 내가 탈 말은 어떻게 되고 있어?
- 근골 강화와 유전자 조작에 400시간 정도 예상됩니다.
보름 이상 걸린다는 소리.
= 통신 벌레와 꿈틀이 넉넉하게 챙겨서 응5와 함께 산동으로 먼저 보내.
한 발 먼저 정보 수집을 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통신 벌레와 꿈틀이를 뿌리려면 장보도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가 필요했다.
= 염가동은? 코앞에서 터진 일이니 어떻게든 반응을 했을 텐데?
염가동은 태산 속가다. 몰락했다지만 태산파의 근거지가 바로 산동 아닌가.
- 염가동을 비롯한 태산 속가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철저히 단속하는 등, 태산 속가 전체가 몸을 사리는 중입니다.
자신들의 현재 역량을 깨닫고 모험 따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긴 항주 흑도에서 정기적으로 넘겨주는 비단 덕에 고정 수익이 생겨 세를 키울 토대가 만들어졌으니 모 아니면 도의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 염가동에게 연락해.
- 예전처럼 증강현실로 방문을 가장합니까?
농꾼이 연락방법을 물었다.
= 그냥 메시지로 처리해. 응5가 추적할 수 있게 장보도의 대략적인 위치만 파악하라고 전해.
- 예, 리퍼.
= 아, 그리고 남궁화청에게도 연락해. 내일 아침 신창양가에서 보자고 말이야.
남궁화청의 나노 머신은 서호 인근에 서식하는 서생원 시리즈와 연결되어 있으니 그쪽을 통해서 실시간 연락이 가능했다.
- 알겠습니다.
대강의 준비를 끝낸 다음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
멸왜단 총타에서 양주 신창양가 본가까지 관도를 따라 움직이면 거의 이천 리에 가까운 거리지만 피풍의 펼치고 직선거리로 내달리면 팔백 리 내외의 거리.
밤을 달려 해 뜨는 시간에 맞춰 신창양가를 방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창양가의 객청에 이각 정도 앉아 있자니 사사혈창대의 양묵일 양묵월 형제가 이십 대의 청년과 함께 들어섰다.
“허, 명불허전이라더니 벽력응주는 정말 몰아치는 벽력같이 빠르군.”
“전서구를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오다니.”
쌍둥이가 나를 격 없이 맞이했다.
“서둘러야 하는 일 아닙니까.”
서로를 향해 창과 칼을 휘둘러도 봤고 손을 잡기도 한 사이다. 먼저 격 없이 나오는데 마다할 이유 없다.
“그런데 양가에서는 사사혈창대가 나서는 겁니까?”
뻔하게 오가는 인사 따위 생략하고 바로 묻는다.
“전부는 아니지.”
“우리 형제와 여기 이놈까지 셋이네.”
양묵일의 대답에 양묵월이 같이 온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멸왜단의 이도연입니다.”
초면에 인사를 안 할 수 없으니 공수의 예를 차린다.
“신창양가의 양연곤입니다.”
청년 양연곤도 가슴께에서 스스로의 주먹과 손을 맞대는 공수의 예로 답했다.
양연곤, 실제로는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농꾼을 통해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양묵현의 몸 안에 있던 나노 머신, NZ-03의 새 보금자리. 한마디로 새로운 수확 대상자란 말이다.
당연히 초극 고수다. 원래는 절정이었지만 내공 수련 도중 몸 안에 자리 잡은 NZ-03이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어 초극으로 만든 것이다.
뭐 NZ-03의 간단한 개입으로 초극이 될 만큼 단련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흠.”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양연곤을 한번 위아래로 훑어봤다.
“재능이 있는 듯합니다.”
“무슨 재능이 있단 말인가?”
밑도 끝도 없이 뱉는 말에 양묵일이 물었다.
“제가 부리는 매와 영성이 통할 재능 말입니다.”
어차피 산동에서 같이 작전을 뛸 사이. 흩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통신 채널 하나 열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작업을 끝내고 얼마 안 있어 남궁화청이 도착했다.
남궁화청이나 양씨 집안 쌍둥이나 둘 다 집안의 어둠에서 움직이던 인물들이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서로 뭔가를 격하게 동감하는 듯하더니 어느새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쾌속선을 탄다 해도 운하를 따라 올라가는 것은 느리니 말을 이용하지요.”
양묵일이 말했다.
“그 말대로네. 운하를 타면 편하기는 해도 속도를 기대하지 못하지.”
남궁화청이 양묵일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느립니다.”
내 말에 일행의 시선이 죄다 나에게 쏠렸다. 일행 중 나이와 무공으로 치면 남궁화청이 제일이지만 이번 일의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나다.
이번 일은 어쨌든 정의맹 정악각의 일이고 정안각의 각주는 바로 이 몸이시다.
“양주부에서 회안부를 거쳐 산동으로 가든지, 봉양부를 통해 서주를 거쳐 산동으로 가든 말을 타고 건널 수 없는 물길이 못해도 다섯 이상은 나옵니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말을 타고 다닌다면 그런 물길이 나올 때마다 말과 함께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합니다. 나룻배 하나에 말 다섯 마리를 한 번에 태울 수 없지 않습니까? 못해도 나룻배가 두 번 오가야 합니다.”
“우리 양가의 영역이니 미리 연락한다면 물길마다….”
내 말에 양묵월이 뭔가 대비책을 내려 했지만 내가 그걸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시간낭비입니다. 시간낭비!”
그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경공으로 내달리지요. 물길이 앞을 막아도 일행이 전원 초극 아닙니까? 그냥 등평도수로 건너면 됩니다.”
내가 몸무게 때문에 말을 못 타는데 다른 일행이 말을 탄다? 나 혼자 두 발로 뛰어다니라고? 그렇게는 못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