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산동행(01)
서안 부도를 빠져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섬광격의 광휘와 분진 폭발의 굉음이 흑천맹 고수들의 이목을 죄다 끈 탓에 밤하늘을 활공하는 나를 발견한 자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추적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농꾼에게 확인했다.
- 없습니다.
농꾼의 대답에 활공을 끝내고 서안 서쪽으로 뻗은 관도로 내려섰다.
“미면나찰의 제자들은 오늘 본 넷 말고는 더 없지?”
- 예, 그 셋이 다입니다.
오늘 한 명이 죽었으니 셋 남은 게 맞다.
“정리하는 게 좋으려나?”
미면나찰이 살아 있을 때는 미면나찰을 죽이는 일에 모든 신경이 쏠렸다.
당연했다. 천문위 아닌가.
어쨌든 간신히 미면나찰을 끝장내고 나니 그제야 뒤처리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미면나찰의 제자들이니 색공을 배웠을 게 뻔하다. 배운 게 색공인데다가 미면나찰이라는 롤 모델도 존재한다. 미면나찰이 하던 짓을 그녀들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거기에 미면나찰에게 공력을 받아먹던 흑도거마들도 있다. 미면나찰의 제자들이 가만히 있으려 해도 꿀을 빨아본 흑도거마들이 그녀들을 부추길 가능성이 컸다.
- 당장 수확에 부정적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은 적다 봅니다.
“천문위가 아니니 미면나찰처럼 초극의 내공을 빨아먹겠다고 설치지는 않을 것이다?”
수확 대상자 전원이 초극 이상이니 지금 당장은 미면나찰의 제자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농꾼의 말이다.
- 예, 리퍼. 흑천맹의 위치와 규모를 생각하면 수확에 긍정적인 요소도 있을 것으로 계산됩니다.
흑천맹과 그에 연계된 흑도거마들이 활발히 움직이면 섬서의 정파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자연스레 마찰이 생길 것이고, 그 마찰은 인근 수확 대상자들의 경험치가 되어 무공 향상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그 전에 나를 잡겠다고 설칠 수도 있다. 하지만 미면나찰의 제자는 하나가 아닌 셋. 미면나찰이 남긴 흑천맹의 패권을 잡기 위해 서로 경쟁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 그냥 놔두는 것으로 하지.”
거기다 섬서 무림이 평온한 것보다는 혼란스러운 것이 수확에 도움이 된다. 뭔가 위험이 있어야 수확 대상자들이 소속된 섬서 정도 무림에 은혜를 팔아먹기 쉬워지니 말이다.
“흑천맹에 대한 감시는 계속 유지한다. 나를 찾아내려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으니 키워드 설정 잘 해놓고.”
- 예, 리퍼.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
“사형, 난데없이 무슨 소리요? 말을 키워 보라니?”
사제 녀석이 뭐 잘못 먹었냐? 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 말대로다. 말을 키워 마장(馬場)을 하자는 거지. 너도 알다시피 말은 돈이 되는 짐승 아니냐.”
“그걸 누가 모르오? 하지만 마장이 한번 해보자 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소?”
맞는 말이다. 말은 예민한 동물이다. 그냥 키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돈이 되게 키우려면 전문가가 필요했다.
아니 좋은 말로, 비싼 말로 키우려면 단지 전문가만으로는 부족하다. 타고난 혈통이 중요했다. 좋은 혈통의 말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고 말을 잘 키우는 전문가들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뭐, 보통의 경우야 그렇지.”
씨익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딴 걸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
“그게 무슨….”
사제는 내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정색을 했다.
“그 마귀의 수작을 사용하자는 것이오?”
“그래.”
우리에게는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재주꾼 농꾼이 있다.
“뭐, 그 마귀는 온갖 짐승을 부릴 수 있으니 말을 키우는 것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겠구려.”
나노 머신 때려 박고 호르몬 분비에 손 좀 대면 이 시대에 명마로 불릴 정도의 말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 나노 머신으로 제어하는 알파 개체 하나 만들어 그 알파 개체를 통해 말들을 통제하면 되니 말이다.
갑자기 왜 마장을 만들 생각이 들었냐 하면 절강에 가서 만들 조사대 때문이다.
신창양가와 멸왜단의 공멸을 꾸민 암중 세력을 뒤쫓기 위한 조사대다. 물론 멸왜단과 신창양가, 남궁세가의 명성을 등에 업고 수확을 원활히 하기 위한 내 꼼수일 뿐이지만 말이다.
남궁세가야 전후 사정 모르지만 절강의 멸왜단은 내가 조사대를 만들려는 이유를 얼핏 알고 있다. 신창양가 역시 조사대가 추적하는 그런 암중 세력 따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내 사심이 듬뿍 들어가 조직되는 조사대에 초극의 무위를 가진 고수를 보낼 이유가 없다. 기껏해야 절정 무인들일 터.
조사대의 진실한 목적은 수확. 그러니 중원 전체에 퍼진 수확 대상자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짐 덩어리들을 달고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 짐 덩어리들은 내 행동에 명분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라 버리고 다닐 수도 없다.
평소처럼 경공으로 이리저리 내달릴 수 없다는 말이다. 한두 번이면 모를까 중원 전역을 계속 경공으로 내달리는 여정은 절정 무인들이라 해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말을 타고 다녀야 한다는 소리.
하지만 내 체중이 어디 보통 체중인가. 같은 체격의 사람보다 세배쯤 무거운 게 문제다. 힘 좋은 말이라도 나를 하루에 몇 시간씩 태우고 다니다가는 척추가 나갈 게 뻔하다.
그러니 공방에서 하나 만들 생각이 들고 그런 생각이 드니 그걸로 돈 벌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금정산으로 말 몇 마리 올려 보내.”
내가 타고 다닐 말이 가장 급하기는 하지만 사제 녀석도 나와 별 다를 바 없는 몸 아닌가. 거기다가 사부님에게 나나 사제가 타는 말보다 못한 말을 타고 다니라 할 수 없으니 종마로 쓸 알파 개체까지 치면 공방에 밀어 넣어야 할 말이 최소 네 마리다.
사제와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청도방을 나섰다.
금정산을 들렸지만, 사부를 만날 수는 없었다. 도대체 호거술로 무슨 대단한 무공을 만든다고 저러시는지 모르겠다.
마*카*원 알파를 이용해 한번 알아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사부가 알려 줄 때까지 꾹 참기로 하고 공방에서 금속 분말이나 넉넉하게 챙겼다.
피풍의를 펴고 온종일 내달려 절강의 멸왜단 총단에 도착했다.
“개인적 볼일은 잘 끝난 것인가?”
복귀를 알리기 위해 집무실을 찾으니 진우탁이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그럭저럭 잘 해결되었습니다.”
내 대답에 진우탁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해주기로 했던 감시망 말일세, 소환단으로 어떻게 안 될까?”
아나, 이 인간 또 징징거린다. 천문위나 되는 인간이 이러고 싶을까?
“이미 이야기는 끝난 것 아닙니까?”
절로 인상이 구겨진다.
“소청단 열 개야 어떻게 될 것 같아. 하지만 그 뒤가 문제네. 한 번은 어떻게 구할 수 있지만 매달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 않은가. 무당이 소청단을 소림의 소환단 마냥 자주 만들지 않으니….”
매달? 아, 그러고 보니 남궁세가와 같은 조건으로 해준다 했지.
남궁세가에서 유지비로 매달 청심단 세 개를 받기로 했다는 것을 들은 모양이다.
“그럼, 유지비는 소환단으로 받지요.”
사부가 호거술로 뭔가를 한다고 쓸어 간 탓에 소환단도 필요하기는 했다.
“고맙네.”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좋아하는 진우탁이다.
“소청단은 언제쯤 될 것 같습니까?”
“두 달 안에 어떻게든 될 걸세.”
“그럼, 감시망부터 만들어야겠군요.”
내 말에 히죽거리던 진우탁의 입매가 정상으로 돌아갔다.
“흠, 뭔가 일이 있는 건가? 감시망을 미리 만들어 주면 우리야 좋지만 말일세.”
절강의 바다를 감시하는 매도 선금 조로 소환단 일부를 받고 시작했던 내가 소청단을 하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감시망부터 깐다니 이상스레 보는 것이다.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내가 슬쩍 인상을 썼다.
“그 조사대 말인가?”
“예.”
진우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서두르는 느낌이 나는데?”
조사대가 조직되면 나는 뇌응대주의 직책을 내려놓아야 한다.
멸왜단에 이름을 올려놓기는 하지만 내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소리. 진우탁 입장에서는 당장 부려먹을 수 있는 커다란 패 하나를 놔줘야 하는 격이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냥 탈단을 할까요?”
“내 당장 신창양가에 연락하지.”
툭 내뱉는 한 마디에 바로 얼굴을 바꾼다. 진짜 이 인간 창 들고 싸울 때랑 사람이 너무 달라.
“남궁세가와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겠지?”
“예.”
= 서생원 시리즈와 꿈틀이를 넉넉하게 생산한다. 멸왜단 총타뿐만 아니라 영파 부도 전역을 감시할 수 있는 수량을 준비해.
손가락을 움직여 농꾼에게 감시망 설치를 명한다,
- 고정 감시망을 설치하는 것이라면 서생원들보다 꿈틀이가 더 적합합니다.
= 위치 변동이 없다면 초음파 그물망을 만드는 게 더 쉽다는 거지?
- 예. 리퍼.
= 그 부분은 알아서 조처해.
“그나저나 감시망을 총괄하는 사람을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나노 머신을 주입하면 끝날 일이지만 일단은 술법 계통이라 사기를 쳐 놓았기에 적성을 따진다고 알려져 있다.
“믿을만한 분을 단주께서 추천하시면 적성을 살펴보지요.”
“그러지.”
이제 조사대가 조직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거처에서 며칠 쉬고 있자니 단주가 보낸 사람들이 나를 찾았다. 전부 일곱, 죄다 진우탁의 심복들이다. 그중 둘에게 나노 머신을 주입했다.
화면을 보고 듣는 정도와 간단한 통신 기능, 화면 조작 기능 등 간단한 기능만 갖추면 되기에 농꾼이 자체 생산한 나노 머신을 많이 쓸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감시망에 대한 처리를 끝낸 다음 개인 연공실로 향했다.
뇌응대는 더 이상 내가 신경 쓸 필요 없다. 이미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연공실 중앙에서 귀원공을 일으킨다. 귀원공의 공력을 전신 곳곳에 돌려본 다음 미리 준비한 검을 들었다.
“남궁화청의 데이터를 몸에 적용한다.”
남궁화청은 천문위를 앞둔 초극 고수다. 그 전투 감각을 몸에 적용할 수 있다면 일반적인 초극 고수는 방수 없이, 다른 꼼수 없이 실력으로 쉽게 때려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적용할 수 있다면 말이다.
- 예, 리퍼.
농꾼의 인도에 따라 공력이 움직인다. 평소와는 다른 경로.
남궁세가의 천뢰기(天雷氣)의 운용이다. 몸 곳곳에서 평소와는 다른 격한 반응이 일어난다.
“크윽!”
천문위인 진우탁의 데이터는 적용하기 무섭게 혼절했지만 남궁화청의 데이터는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당장 쓸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
= 그만!
입을 열면 격하게 움직이는 공력의 수습에 문제가 생길 것 같기에 손가락을 움직여 데이터의 운용을 멈췄다.
“되는 게 없군.”
툴툴거리면서 대자로 누웠다. 그 상태로 농꾼이 내상을 치료하기를 기다린다.
- 리퍼, 치료 완료되었습니다.
농꾼의 보고에 몸을 일으키고 연공실을 나섰다.
“대주, 단주께서 찾으십니다.”
진우탁이 찾는다는 말에 단주 집무실로 향했다.
“단주, 찾으셨습니까?”
“산동으로 가줘야겠네.”
집무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진우탁이 하는 소리다.
“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 무섭게 진우탁의 말이 이어졌다.
“조사대의 첫 임무네.”
무슨 개소리야? 조사대는 내가 수확을 쉽게 하려고 만든 거다. 댁이 부려먹으라고 만든 조직이 아니라고!
“불모(佛母)가 남긴 장보도(藏寶 圖)가 나타났네.”
“불모라면 백 년 전 이름을 날렸던 마교의 여 고수 아닙니까? 영락 연간에 산동에서 반란을 주도했던?”
“그래. 천강의 경지에 올랐던 고수지.”
젠장. 외통수다. 안 갈 수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