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보복행(15)
귀몰색마가 흑천맹으로 들어선지 이틀째. 나는 여전히 기루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 앞에서 아리따운 예기가 자신의 탄금(彈琴) 솜씨를 뽐내고 있지만 내 신경은 흑천맹 중심에 자리 잡은 전각, 미면나찰의 거처로 쏠려 있다.
= 아무래도 분위기가 시작하려는 것 같지.
- 예, 평소와 달리 미면나찰의 제자들이 전각 최상층과 일 층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각기 자신의 전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미면나찰의 제자들이다.
평소 자신의 전각에서 색공 단련을 힘쓰던 그녀들이 번을 서듯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미면나찰의 목을 따는데 방해가 될 인원들이 분명하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천문위에 이른 미면나찰이 귀몰색마를 잡아먹을 때는 호위가 필요할 만큼 무방비가 된다는 말도 되니깐 말이다.
미면나찰의 제자는 넷. 둘씩 짝을 지어 있는 것을 보면 합공이나 협공에 능한 아줌마들로 보는 게 옳다.
사 층에는 혈주마군이란 작자가 미면나찰이 선심 쓰기를 기다리고 있다. 저 작자도 상당한 거물일 게 분명했다.
어쨌든 일이 시작되면 초극인 저들 다섯을 뚫어야 했다.
- 미면나찰 움직입니다.
농꾼의 보고. 귀몰색마를 잡아먹기 전에 이 층에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던 미면나찰이 드디어 움직이는 것이다.
“그만하고. 밤을 보낼 아이를 들이거라.”
“예, 대인.”
내 말에 예기가 물러났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기녀가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방안의 불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기녀도 나도 옷을 벗었다.
그리고 내 손길에 기녀의 몸이 허물어졌다. 수혈을 짚어 재운 것이다.
왼손이 검게 물들고 스피커가 만들어졌다.
“아아, 대인!”
그리고 거기에서 쓰러진 기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기루에 들어온 첫날에 수집했다.
스피커로 어제 녹음한 소리들을 틀어놓고 나는 짐을 풀어 검게 물든 무복과 피풍의를 걸쳤다.
비수들을 확인하며 품 곳곳에 채워 넣고 소도 두 자루를 허리 뒤춤에 찔러 넣는다. 그리고 공방에서 배달된 금속 분말 가득한 열 냥짜리 주머니들을 품속에 챙겼다.
“아아, 아!”
왼손은 여전히 여인의 신음소리를 토하지만 나는 눈앞에 펼쳐진 화면에 집중했다.
두 색마의 나신이 뒤엉키고 있었다. 색마들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아니 싸움도 아니다. 귀몰색마가 멀쩡해도 무림 최고의 색마인 미면나찰을 상대하기는 어려운 일인진데, 농꾼이 움직이는 꼭두각시 따위가 미면나찰을 상대로 제대로 된 대결을 벌일 수는 없다.
농꾼이 귀몰색마의 데이터로 어떻게든 움직여봤지만 이 각이 한계였다.
귀몰색마는 곧 천정을 보고 드러누워 위에 올라탄 미면나찰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고작.
미면나찰이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거칠게 움직인다.
귀몰색마의 얼굴에서 생기가 서서히 사라진다. 흡정(吸精)이 시작된 것이다.
타인의 진기를 체내로 빨아들이기 위해서는 호신강기를 해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흡수하려는 진기와 호신강기가 충돌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경지에 이른 색공은 신체의 호신강기 일부를 해제하는 방법이 있다. 귀몰색마가 익힌 색공에 언급된 내용이다.
그러니 지금 미면나찰도 신체 일부의 호신강기를 해제했을 가능성이 컸다. 이번 일은 이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건 계획.
= 지금!
쾅!
열락에 휩싸인 공간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미면나찰의 나신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귀몰색마의 하반신이 폭발한 것이다.
쿵!
미면나찰의 나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빨리 화면을 훑는다. 오 층과 사 층, 일 층의 반응을 살핀다.
삼 층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는데도 각 층의 고수들은 별 동요가 없다. 그동안 미면나찰이 얼마나 거칠게 놀아왔는지를 알려 주는 모습이다.
다시 전각의 삼 층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바닥에 쓰러진 미면나찰의 다리 사이로 꽤나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커헉!”
그리고 토혈까지 한다. 미면나찰이 위아래로 쏟아낸 피를 향해 서생원 하나가 잽싸게 다가간다.
- 토혈에서 내장 조직 확인. 하혈에서 역시 타격 예상 부위의 조직이 확인되었습니다.
농꾼이 재빠르게 서생원의 분석결과를 토해냈다. 제대로 중상을 입었다는 소리.
바로 몸을 움직인다. 기루의 창문으로 빠져나와 지붕 위로 올라간다.
지붕 위에서 내달리며 피풍의를 편다. 허공을 날아 흑천맹 총타의 높다란 벽을 타 넘으며 그대로 중앙을 향해 활공한다.
미면나찰의 거처는 땅 위로 간다면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도착하는 흑천맹의 심처.
하지만 허공으로는 그저 총타 외곽 담벼락과 수십 장의 거리를 둔 장소일 뿐이다.
몇 초 만에 그 거리를 날아 전각 삼 층 창문을 뚫고 들어가려는 순간, 나를 향해 날아드는 기세.
농꾼 믿는다!
바로 방수가 움직이고 피풍의가 변형한다.
쾅!
격한 충격이 몸을 흔들지만 내 몸은 원래 예정대로 삼 층 창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간다.
바닥을 굴러 몸을 일으키니 피로 물든 나신으로 가부좌를 튼 채 숨을 고르고 있는 미면나찰이 보인다.
“침입자다!”
사 층에 대기하고 있던 혈주마군이 경고성을 내지르며 나를 따라 삼 층 창문으로 뛰어든다.
손을 뒤로 뿌린다. 손짓을 따라 주머니가 날고 금속 분말이 뿌려진다.
“어림없는 수작!”
혈주마군이 장력으로 분말들을 밀어내려는 순간, 방수가 전격으로 불꽃을 튀겼다.
쾅!
분진 폭발이 혈주마군을 전각 밖으로 밀어낸다.
나는 그 폭발의 기세를 업고 미면나찰을 향해 몸을 날렸다.
끼요올!
호거술까지 동원한 칼질이 미면나찰의 목을 향했다.
쾅!
충격과 함께 칼이 튕겨 난다. 급히 뒤로 한 발 물러난다. 아니 뒤로 내딛는 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칼을 끌어당겨 재차 휘두르며 일보 전진!
쾅!
격한 충격. 흘리고 다시 칼질. 하지만 내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뒤로 당겨진다. 농꾼이 등 뒤의 방수를 움직인 것이다.
콰르르릉!
그리고 내가 서 있던 공간을 찢어발기는 희디흰 강기의 손톱!
미면나찰의 성명절기인 백강참조(白罡慘爪)다!
농꾼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저기에 휘말려 낭패를 당할 뻔했다.
씨발, 천문위! 그 정도 다쳤으면 좀 골골해야 하는 거 아냐!
“쿨룩! 큭, 쿠에엑!”
세상이 내 바람을 들었는지 미면나찰이 입으로 시뻘건 핏물을 게워낸다.
그래 댁도 사람인데 그 몸으로 호거술까지 동원한 강기를 받아내고 멀쩡하면 말이 안 되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칼을 고쳐 잡는다. 끝장을 내기 위해 발을 움직인다.
끼요옷!
호거술을 사용하며 치닫는데.
쿠쾅!
굉음과 함께 내 앞으로 하나의 인영이 치솟았다. 그리고 번뜩이는 것은 희디흰 강기의 손톱, 백강참조다!
쩌저저정!
바로 벽력의 그물을 그리며 강기의 손톱을 막아내고 뒤로 물러난다.
바닥을 뚫고 나와 내 앞을 막는 자는 중년의 미부. 미면나찰의 제자 중 하나다.
“삼 사매는 사부님을 보호해라!”
“예, 대사저!”
그녀의 말에 뚫린 구멍으로 대답이 들리더니 중년 미부가 하나 더 나온다.
“후우.”
호흡을 고른다. 호거술로 강화한 도강을 정면으로 받아낸 것을 보면 만만한 아줌마가 아니다.
시간을 끌면 추가로 들이닥칠지도 모를 다른 침입자를 경계하고 있는 오 층의 두 아줌마와 밖으로 튕겨난 혈주마군까지 합류할 게 뻔하다.
그러니 속전속결이 답!
도강을 거두고 도기로 전환. 전압 걸고 호거술, 섬광격이다.
오올!
휘황찬란한 백색 섬광에 내 앞을 막아선 중년 미부의 시신경이 박살났다.
“아악!”
눈을 감고 비명을 지르는 아줌마를 향해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쾅, 콰콰콰쾅!
아줌마의 손톱이 섬광격이 깃든 내 도격을 막아내고 튕겨낸다.
천문위의 단련을 받은 초극 고수답다. 도저히 시야를 상실한 상태라 믿을 수 없다.
- 19.
뒤로 한 발 물러났다 힘을 모아 내딛는다.
“타합!”
전력을 다해 내려치는 도격. 그녀는 떨어지는 내 칼을 향해 양손을 합쳤다. 백강참조의 강기로 보호되는 손을 이용해서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을 시도하는 것이다.
쾅!
굉음과 함께 내 칼이 멈췄다. 그녀의 합쳐진 양손 안에 내 칼이 끼어 있었다.
- 18.
하지만 그녀는 내 손에서 칼을 빼앗지 못했다.
오올!
내 등 뒤에서 터진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백색 섬광이 튀어나왔다.
“무, 무슨….”
섬광격에 두 눈을 당해 보지는 못해도 초극 고수의 기감으로 느낄 수 있는 그녀다.
허나, 내려친 도격을 양손으로 저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방수가 휘두르는 섬광격에 대책 없이 쪼개졌다.
무공만 따지면 나보다 확실히 고수라 할 수 있는 그녀다. 하지만 그 간격은 팔의 개수를 무시할 만큼 크지는 않은 모양이다.
- 8.
전력이 몰리는 칼날이 두 개로 늘어난 탓에 섬광격의 유지 시간이 반토막 났다.
섬광격의 효과가 가시기 전에 미면나찰을 향해 달려든다.
“야압!”
앙칼진 기합을 내지르며 미면나찰의 셋째 제자가 덤벼들었다.
섬광격의 광휘에 당한 두 눈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 두 눈을 감고 초극 고수의 기감으로 내 위치를 파악한 것이다.
눈먼 상태로 함부로 발을 옮기면…. 바닥에 늘여 놓은 방수에게 발목을 잡혀.
휘잉!
풀 스윙으로 전각 밖으로 던져질 뿐이다.
- 7.
그녀를 밖으로 던진 즉시 미면나찰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오올!
당연히 한 자루 더한 세 자루!
- 4.
시간이 다시 줄어든다.
쾅, 콰콰쾅! 카캉!
- 3, 2.
세 자루의 칼이 빛을 발하며 찌르고 베고 후리고 휘돌지만, 가만히 앉아 눈을 감은 미면나찰이 백강참조로 그려내는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콰콰쾅!
- 1.
그뿐이랴? 백강참조의 위력에 칼을 휘두르는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난다.
- 0.
카운트가 끝남과 동시에 세 자루 칼을 감싸던 광휘가 사라졌다. 섬광격의 효과가 끝난 것이다.
“큭, 커헉!”
미면나찰이 다시 한 번 피를 게워낸다. 멀쩡하지 않은 몸으로 섬광격을 맞받아쳤으니 충격을 받은 것이다.
도기를 온전히 한칼에 모아 강기로 만든다.
끼요올!
호거술로 강화해서 다시 미면나찰을 공격하려는 찰나.
등 뒤에서 뭔가 날아든다.
쾅!
막기 무섭게 연속적으로 들이닥치는 허연 궤적에 칼을 급히 휘둘렀다.
콰콰쾅!
격한 충격에 뒤로 밀려나니 곱상한 아줌마 하나가 허옇게 빛나는 손톱을 세우고 인상을 쓰고 있다. 나와 미면나찰 사이를 가로막은 상태로 말이다.
“사부님!”
그리고 다른 한 아줌마가 미면나찰에게 달라붙는다. 오 층에 있던 두 아줌마가 내려온 것이다.
“호법을….”
미면나찰이 그렇게 말하고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미면나찰이 몸을 회복하면 끝장인 상황. 방수의 기동에 기대어 돌파하는….
“맹주의 상세는 어떤가?”
분진 폭발로 튕겨 났던 혈주마군이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방수가 바깥으로 집어던진 아줌마를 부축하고 말이다.
아줌마가 눈을 깜박이는 것이 슬슬 시신경이 회복되고 있는 듯했다.
젠장! 욕 나온다.
배터리가 충전되려면 아직 190초 이상이 남았다.
섬광격은커녕, 도기에 전압을 걸 수도 없다. 방수를 써 세 자루의 칼로 싸운다 해도 도기에 호거술로 저들과 싸워야 한다.
이 자리에 있는 연놈들은 죄다 강기에 호거술을 걸어야 어떻게 싸움이 될 정도로 공력이 심후한 자들.
그런 자들 셋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포위되면 끝장이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는 없다. 중상을 입고 골골거리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미면나찰을 끝장낼 기회 따위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