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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105화 (105/175)

105화

보복행(14)

시야 한쪽의 그래프들이 미친 듯 돌아가고 있다. 둘의 데이터를 동시에 수확하기 위해 농꾼이 모든 기능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기다린다. 어차피 놈들의 기억을 뒤지려면 수확이 끝나야 했다.

요동치는 그래프들이 잠잠해진다. 수확이 종료된 것이다.

“녀석들 나한테 왜 덤빈 거냐? 화산이나 공동에서 나를 잡으려 할 이유는 없잖아. 설마, 기녀에게 부탁이라도 받았나?”

농꾼에게 물었다.

환락가는 흑천맹의 영역. 나를 수상하게 본 흑천맹에서 이 두 녀석을 움직였을 수도 있다.

기루의 단골인 듯했으니 친한 기녀를 통해 수상한 자가 있다고 슬쩍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수작에 강호 경험 많은 초극 고수들이 걸려들 리 없지만, 이 녀석들은 나노 머신 빨에 초극 고수가 된 젊은것들이니 혹시 모를 일이다.

아니면 귀몰색마처럼 타락했을 수도 있고 말이다.

- 애초에 리퍼를 노린 것이 아니라, 그냥 둘의 싸움에 리퍼가 휘말린 듯합니다.

농꾼의 대답은 예상했던 것이 아니다.

“뭐? 상황이 앞뒤가 안 맞잖아. 그럼 내가 이게 뭔 짓이냐 했을 때 사과하고 물러나든, 무시하고 그냥 둘이 싸우든 했어야지!”

그런데 팔마검객은 노성을 내지르며 내게 명백한 살수를 날렸다.

- 둘의 기억 데이터를 검색한 결과 팔마검객의 현 별호는 주취검(駐醉劍)입니다.

“뭐?”

주취검, 늘 취해 있는 칼잡이라는 소리다.

- 팔마검객은 현재 공동에서 파문당한 상태입니다.

농꾼이 팔마검객의 기억을 읽으며 주욱 설명을 이어 갔다.

팔마검객, 아니 주취검은 귀몰색마와 상황이 비슷했다. 색공이 아니라 ‘팔황취괴(八荒醉怪)’라는 작자의 유물로 무공이 변질된 경우.

아니 무공만 놓고 보면 귀몰색마보다 더 악랄한 경우다. 귀몰색마는 색공에 의한 부작용으로 성욕을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뿐 형산 무공을 펼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으니깐.

하지만 팔마검객이 영약인 줄 알고 먹은 단약은 공동의 정종 내공을 잡아먹고 팔황취괴의 만사취행공(萬事醉行功)만을 강요했다.

공동 무공을 제대로 펼칠 수 없게 된 것이다.

문파의 무공을 못 쓰는 무인을 제자랍시고 둘 수 없는 법. 그래서 공동파에서 파문당했다.

보통 파문 제자는 단전을 깨트리고 근맥을 끊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특별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의 백부가 섬서 군부의 고위층인지라 다른 조치 없이 내보낸 것이다.

공동 복마검법을 못쓰니 마를 굴종시키다 못해 깨트린다는 팔마검객이라는 별호로 불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다고 초극까지 올라섰던 무인이 무공을 버릴 수 없다. 그러니 유일하게 익힐 수 있는 무공인 만사취행공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 만사취행공은 이름 그대로 수련에 술이 필요한 무공.

수련에 매진하려면 늘 취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팔마검객은 주취검이 된 것이다.

그런 사연이 있는 그에게 내가 공동의 자랑인 팔마검객 운운했으니, 주취검 귀에는 싸우자는 소리로 들리는 게 당연했다.

“그럼, 철매화가 기련신마를 들먹인 것도 수작이 아니라 오해라고?”

- 철매화는 친우인 주취검이 팔황취괴의 유산을 얻게 된 것이 기련신마의 수작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기련신마의 문하로 보이는 자를 잡아다가 친구가 원래의 내공을 찾을 방법이 없는지 알아내려 했다는 소리다.

“그렇게 친한 둘이라면 왜 싸운 거야?”

- 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깐….

“늘 있는 일이라면 시시껄렁한 사연이겠네. 됐어.”

농꾼의 보고를 끊었다.

“철매화는 후속 조처를 해서 계속 데이터 뽑아 먹으면 되고, 주취검은 쓸 데가 있으려나?”

내가 본 팔황취괴의 무공은 상당했지만, 공동의 무공도 그 정도는 될 것이다.

초극 고수의 내공을 강제하는 것으로 봐서 팔황취괴의 생전 경지는 최소 천문위는 확실한데 술주정뱅이를 만드는 무공이란 것이 문제다.

21세기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할 무공이니 200개로 한정된 나노 머신을 생각하면 주취검을 죽이고 다른 공동 문인의 몸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나았다.

“근데, 지금 상황이 이 녀석을 죽일 수도 없단 말이지.”

주취검은 섬서 군부 고위층의 조카다. 거기다 친우인 철매화는 서안에서 가장 큰 표국인 장안표국(長安驃國)의 후계자.

주취검을 죽여 파묻고 철매화를 살려 준다면 철매화가 원한을 품을 게 분명했다.

철매화는 방수와 섬광격을 봤다. 방수는 내가 계속 써야 할 아이템이고, 섬광격은 이미 벽력응주로 많이 써먹은 기술. 철매화가 기를 쓰고 찾아다닌다면 벽력응주 이도연이라는 신분에 닿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된다면 섬서 쪽 수확에 무리가 가게 된다.

그렇다고 둘 다 죽여 파묻는다?

서안에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젊은 초극 고수 둘이 사라지면 제일 먼저 의심받는 것은 흑천맹의 미면나찰일 가능성이 컸다.

군부와 화산이 동시에 움직이면 아무리 미면나찰이라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터.

한가로이 귀몰색마랑 그 짓을 하기는 힘들다. 미면나찰이 귀몰색마랑 그 짓을 안 하면 내가 미면나찰을 죽일 가능성은 일 할 미만.

- SX-19 해킹을 시작합니다.

내가 잠시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농꾼이 철매화에 대한 후속 조치에 들어갔다.

보타산과 남궁세가의 수확은 우호적인 수확이었다. 신창양가와 귀몰색마는 아예 상대 뇌를 박살내 나노 머신이 다른 숙주를 찾게 했다. 적대한 상대를 살려 두는 것은 오늘이 처음. 고로 나노 머신 간 영혼의 맞다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영혼의 맞다이라 해도 내게는 별것 없다. 그저 시야 한쪽에서 그래프들과 문자열들이 미쳐 날뛰듯 움직이는 것 말고는 말이다.

- 리퍼, 도움을 요청합니다.

“나는 해킹 쪽에는 문외한인데?”

농꾼의 요청에 내가 물었다.

- 일단, 주취검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목덜미 경추(頸椎)를 잡고 계십시오.

주취검은 의식을 잃은 상태. 하지만 체내의 나노 머신이 육체를 움직여 도망갈 가능성도 있다는 말.

쓰러진 주취검에게 다가가 녀석의 경추를 잡아들었다.

- 움직인다 싶으면 그냥 부러트리십시오.

“그래.”

고개를 끄덕이자 농꾼의 요청이 다시 이어졌다.

- 철매화의 흉추 8번과 9번 사이로 칼질을, 신경을 끊어 주십시오.

“흉추 8번과 9번?”

- 예, 리퍼.

주취검을 움켜쥐고 칼을 빼 들고 철매화에게 다가갔다.

녀석을 등판이 위로 가게 뒤집자 녀석의 흉추 8번과 9번이 있을법한 위치가 붉게 물든다. 증강현실이다. 농꾼이 원하는 대로 그 사이로 칼질 한 번 해준다.

- 이번에는….

농꾼이 수십 초에 한 번씩 칼질할 부위를 알려 준다. 일단 철매화의 나노 머신을 먼저 해킹하는 듯하다.

“얍삽한데?”

농꾼의 수작질이 어떤 건지 대충 알겠다. 철매화의 체내에 있는 나노 머신이 해킹 전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숙주의 생명이 우선이니 새로운 상처를 계속 만들어 치료에 달려들도록 유도해 해킹 전에 참여하는 개체 수를 줄이는 것이다. 물론, 나노 머신이 숙주를 포기하지 않을 수준을 지키면서 말이다.

- 주취검의….

주취검 쪽에도 칼질을 부탁하는 농꾼이다. 철매화의 해킹이 끝나자 주취검 쪽으로 넘어가는 모양이다.

일단 제압한 김에 주취검 쪽도 제어 프로그램과 안전장치를 깔려는 것이다.

“안전장치로 둘을 위협해 써먹을 수 없나?”

- 안전장치는 말 그대로 안전장치입니다. 안전장치 발동 이후 리퍼가 숙주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한다면 바로 발동이 해제됩니다. 그리고 차후 안전장치의 기능이 멈출 가능성이 큽니다.

말 그대로 내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수확 대상자를 기절시킬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안 된다는 말이다.

“해킹전까지 벌여 설치한 보람이 전혀 없잖아!”

뭐 나노 머신과 영혼의 맞다이를 깐 것은 농꾼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안 되는 일에 대한 미련은 깔끔하게 버린다.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넘기면 괜찮으려나?”

팔황취괴의 무공을 현대에서 쓸 만한 구석을 생각하다 문득 귀원공이 생각났다.

“만사취행공을 귀원공으로 전환할 수 있으려나?”

만약 그게 된다면 주취검은 팔마검객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귀원공의 공력으로 공동파의 무공을 펼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섬서에는 후기지수에게 마공을 전해 마인으로 만드는 자, 기련신마라는 정파 공공의 적이 있다. 귀원공을 잘만 써먹으면 섬서에서의 수확은 확실히 쉬워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걸 써먹는 건 조사대가 구성된 이후의 일이다. 지금은 미면나찰을 해치우는데 집중할 때.

주취검과 철매화를 관도 밖의 한적한 곳에 던져 놓는다. 둘의 검도 곁에 박아 놓고 다시 서안 부도로 발을 옮긴다.

이번 일로 정체불명의 초극 고수가 철매화, 주취검 둘과 기루에서 충돌했다 정도로 소문이 돌 것이다.

기루는 흑천맹의 영역이니 이 얼굴은 이미 알려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지금 얼굴로 다시 서안 부도로 들어가는 것은, 흑천맹을 비롯한 서안 세력들의 괜한 관심을 불러들이는 격. 그러니 얼굴과 목소리를 다시 바꾼다.

그렇게 조용히 서안의 부도 성벽을 넘어 환락가로 갔다.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기루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조용히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

도저히 칠십 넘은 할망구로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이십 대 중반, 얼굴이 어떻고 몸매가 어떻고 따지기 전에 하반신으로 피가 쏠린다.

실물이 아닌 화면으로 봐도 이런 색기(色氣)라니 과연 중원 최강의 색마요, 색녀(色女)다.

저 미모에, 경지에 오른 색공이 더해진다 생각하니 전신이 오싹해진다.

실제로 마주친다면 칼자루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허리춤을 풀기 위해 손을 움직일지도 모른다.

그딴 꼴이 될 수는 없다.

“농꾼, 화면상의 인물 커스텀 가능하지?”

- 가능합니다만?

농꾼의 대답에 화면 속 미면나찰을 지정하고 그녀의 외모를 내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래서 그녀의 외모를 대폭 하향 조정했다.

“마주쳤을 때도 이 이미지로 덧씌워. 증강현실로 말이야.”

- 예, 리퍼.

“그리고, 내 생리현상 말이야. 조작할 수 있지?”

- 성욕의 일시적 차단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장시간 차단할 경우 성기능 장애가 일어날 가능성이 80%입니다.

귀몰색마의 데이터를 현대에 풀어 놨다면 색마를 양산하는 게 아니라 고자가 양산됐을지도….

“어차피 저 할망구랑 길게 볼 생각 없으니 문제없어. 일 시작할 때 차단 부탁해. 그리고 내가 저 할망구와 마주쳤을 때 평소랑 다르다 싶으면….”

그렇게 화면을 보며 농꾼과 같이 할멈 같지 않은 할망구의 색공 대비책을 세웠다.

“흐음.”

미면나찰이 귀몰색마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귀몰색마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남자라면 당연히 일어나야 할 하반신의 반응도 없었다.

“왜 이런 상태지?”

미면나찰이 물었다.

“이틀 전 백라장이 몰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계속 그 모양입니다.”

귀몰색마와 함께 온 도끼 노인이 답했다.

“백라장이 망해? 거기 형산의 삼대 속가 중 하나잖아?”

“귀몰색마를 잡은 자들이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상금을 노린 낭인에게 잡혔다 하지 않았나?”

“백라장과 원한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도끼 노인이 만난 사람은 나 하나였지만, 팔분산에서 부딪칠 때와 양양부 강변에서 잠시 스쳐 지나갈 때 얼굴과 목소리가 서로 달랐으니 다른 사람으로 아는 것이다.

“귀몰색마의 정체를 알고 잡았다 들었습니다. 귀몰색마를 이용해 백라장의 명성을 떨어뜨릴 계획이었다더군요.”

“그들을 처리하고 온 것인가?”

사정을 아는 듯한 도끼 노인의 말에 미면나찰이 물었다.

“백라장의 두 장로가 자신의 조카손자를 구하려 쫓아 왔기에 그들 중 한 명과 손을 잡아 처리했습니다.”

“백라장을 몰살시킬 정도라면 개인이든 조직이든 꽤 쓸 만한 패가 되겠어. 한번 알아봐.”

“예, 맹주. 다른 하교는 없으신지요?”

“없어.”

“그럼, 속하는 물러나겠습니다.”

도끼 노인이 귀몰색마를 잡고 물러나려 하자 미면나찰이 입을 열었다.

“놔두고 가.”

“속하가 보기에는 맹주께서 만족할 만큼의 성취가 아니라 좀 더 수련이 필요하다 봅니다만?”

도끼 노인이 의아한 눈이 되어 물었다.

“심하게 망가졌어. 회생의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이 상태라면 며칠 안에 모은 공력마저 흩어질 꼴이야.”

뇌가 박살난 사실을 알지 못해도 귀몰색마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챈 것이다.

“그 정도로 망가졌다면 맹주에겐 아무런 도움이….”

“그래. 그러니 어쩌겠어. 선심이나 써야지.”

미면나찰이 도끼 노인의 말을 끊으며 미소 지었다.

“크음.”

미면나찰의 미소에 도끼 노인이 이를 꽉 물었다. 그렇게 색공의 영향에서 간신히 벗어난 도끼 노인이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누구에게 선심을 쓰시렵니까?”

“섬영수라(閃影修羅), 혈주마군(血蛛魔君). 둘에게 연락해. 먼저 도착하는 쪽에게 선심을 쓰겠다고.”

“예, 맹주!”

“놀래라, 일이 어그러진 줄 알았네.”

미면나찰의 선심이라면 뻔하다. 자신이 흡수하지 못한 공력을 상대에게 넘기는 것.

그런 선심을 쓰려면 일단 귀몰색마의 공력을 빼앗아야 했다.

색마가 색마의 공력을 빼앗는 방법이 뭐 있겠냔 말이다.

“크크크.”

절로 웃음이 나온다. 계획대로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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