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보복행(12)
저 인간들이 쾌속선을 점령하면 잡혀 있는 것은 귀몰색마밖에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염가중’이라는 존재가 공중에 떠버리는 것이다. 염가중의 체취를 쫓아왔다는 내 말이 시뻘건 거짓인 게 드러난다.
그렇게 되면 저들이 나를 의심하고 적대하는 것은 당연지사.
지금 내 능력으로 적대하는 천문위 둘을 상대로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도망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면 귀몰색마를 이용해 미면나찰을 상대하겠다는 계획이 박살나잖아!
저 둘의 무위가 천문위라는 걸 진작 알았으면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 텐데!
일단 당장은 강물 속에 몸을 숨기고 도망가는 수밖에.
= 농꾼, 저 작자들 천문위 아니라며!
- 천문위라니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새끼,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을 텐데 모른척한다는 거냐!
= 백라장의 두 늙은이!
- 저들을 천문위로 판단할 근거가 없습니다만?
= 저 작자들이 만들어 내는 환강이 안 보여?
- 천문위들의 데이터에 의하면, 저들이 쏘아낸 것은 환강이랄 수 없습니다. 주위의 온도 변화와 대상의 색감, 상대의 대응 등을 살펴봤을 때, 탄강(彈罡)으로 판별됩니다.
한옆으로 치웠던 영상이 다시 눈앞으로 돌아오며 물 위의 상황을 보여준다.
강기의 구슬에, 환강으로 짐작되는 그것에 기겁해 내가 보지 못한 영상이다.
강기의 구슬이 배를 향해 쏘아지자 쾌속선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 나왔다. 팔분산의 장원에서 나와 싸웠던 도끼 영감이다.
도끼 영감의 도끼질에 굉음과 함께 강기의 구슬이 터져 나갔다.
저게 진짜 환강이었으면 강기 서린 도끼질 따위에 터질 리 없다.
농꾼 말대로 그냥 강기를 뭉쳐 쏘아내는 탄강이었던 것이다.
안도의 한숨이 자연스레 나온다.
탄강지경(彈罡之境)의 고수도 내가 쉽사리 상대하기 힘든 수준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같은 초극으로 분류된다.
머리를 잘 굴리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지금 상황은?
내 말에 화면이 바뀐다.
물 위에서 팔분산 장원을 찾아왔던 세 노인과 백라장의 두 노인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등평도수로 물 위를 내달리며 서로를 향해 강기를 휘두른다.
세 노인도 귀몰색마를 빼내기 위해 온 자들. 개개인의 무위가 귀몰색마 못지않았다.
물 위에서 싸워대고 있는 저들 다섯 전원이 나보다 고수들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절정일 때도 초극 고수를 때려잡은 경험이 있는 나다.
초극에 이른 지금은 어떤가. 그때 당시보다 꼼수들은 더 늘었다. 그러니 애초 계획대로 진행한다.
전신을 감싼 피풍의가 풀어지며 내 사지가 밖으로 드러난다.
= 칼 떨궈!
손가락을 까닥여 명을 내린 다음, 사지를 놀려 슬쩍 상체를 물 밖으로 빼내니 하늘 위에서 내 칼이 떨어져 내린다.
끈으로 칼을 묶고 끈의 양쪽을 길게 남긴 것을 응4와 응5가 각기 한쪽씩 붙들고 날아다녔던 것이다.
그렇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칼을 손을 들어 받고는 다시 강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대감도를 풀어 도집째 강바닥에 박아 넣는다.
내 칼을 들고 강바닥을 걸어 저들이 만들어 내는 격전장으로 접근한다.
전력을 다하려면 아무래도 손에 익숙한 칼이 좋았다.
- 물속에서 저들을 기습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신경 쓰지 못하게 몰아쳐 주세요.
내 전음에 대꾸 따위는 없다. 위치를 알 수 없으면 보낼 수 없는 것이 전음이다. 그러니 물 밖의 저들이 물속에서 기척을 숨기고 숨어 있는 나에게 전음을 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내 전음을 듣고 둘이 셋을 몰아친다. 셋 역시 지지 않고 맞대응한다. 그렇게 물 밖의 싸움이 격렬해졌다.
나는 강바닥 위에 섰다. 두 쌍의 방수가 강바닥에 박혔다. 내 사지가 힘껏 물을 미는 순간, 방수가 나를 힘차게 내던졌다.
사지와 두 쌍의 방수가 가한 힘이 나를 가속시킨다. 목표와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촤악!
물 밖으로 튀어 나오는 순간, 바로 목표의 등판에 전력을 다한 일격을 올려쳤다.
“크아악!”
허공으로 치솟은 나의 발아래에서 목표의 비명이 뒤늦게 들리고.
“염가북!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내 기습에 형을 잃은 우중근의 노성이 뒤따랐다.
“백라장의 망할 종자를 하나 줄이는 일이지!”
나는 피풍의를 활짝 펴고 여유롭게 대답하며 허공을 맴돌았다.
우중근? 걱정할 필요 없다.
아무리 방수의 도움으로 급가속했다지만 내가 덮쳐드는 것을 우중원 정도 되는 고수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 막지 못했다.
뻔하다. 눈앞의 세 명이 가하는 공세에 나를 막으려 검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둘이 셋을 상대하는데 그렇게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우중원이 나자빠졌으니 혼자 셋을 상대해야 하는 우중근에게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나는 우중근을 걱정할 필요 없는 것이다.
우중원, 우중근 두 노인을 이용해서 어떻게 흑천맹을 후려치게 할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흑천맹은 거대 세력.
우 씨 노인들이 생각이 있다면 둘만으로 후려칠 생각은 하지 않을 터. 백라장에 연락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라장이 망한 게 드러난다.
백라장의 멸망을 흑천맹의 소행으로 여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형산 본산에 연락할 가능성이 커진다.
형산 본산이 나선다면 흑천맹이 귀몰색마를, 백라장 소장주 우백천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미면나찰을 후려칠 방도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미면나찰을 놔두면 내 사제가 위험해지니 나는 이 두 노친네를 정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제를 미면나찰의 표적이 되게 한 귀몰색마의 인척이니, 살려 둬선 안 되지’ 하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쾅, 콰콰콰쾅!
우중근이 탄강을 뿌려댄다. 흑천맹의 세 노인을 뿌리치고 어떻게든 몸을 빼려 하지만 그게 쉬울 리 없다.
나는 격전지와도 쾌속선과도 멀찍이 떨어졌다.
“염가북 이 저주 받을 놈!”
우중근은 그렇게 마지막 말로 저주를 남기며 세 노인의 공격에 전신이 토막 나 강물 아래로 사라졌다.
우중근이 진짜 저주를 내릴 능력이 있다 해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내 지금 이름은 이도연, 예전 이름은 박경표. 세상 어딘가에 있을 염가북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렇게 혼자 키득거리고 있자니 도끼 노인네가 보낸 전음이 귀를 간지럽힌다.
- 약속을 지키리라 믿소!
백라장의 두 노인과 만난 후 응2를 통해 서신을 보내 저들과 한시적으로 손을 잡았던 것이다.
백라장의 두 장로가 추격 중임을 알리고, 내 정체를 백라장에 원한 있는 사람으로 포장(?)했다.
귀몰색마를 잡고 사방팔방에서 사람을 불러들인 이유를 귀몰색마가 백라장 소장주임을 밝혀 복수하려 했던 것으로 위장했다.
백라장의 두 장로를 살해하는데 협조하면 귀몰색마는 포기하겠다 제의하고, 거부하면 형산 본산에 백라장 소장주를 납치한 것으로 알리겠다 협박했다.
물론 백라장이 망한 것도 슬쩍 첨부해 알렸다. 그러니 내 제의를 거부하지 못한 것이다.
까닥 잘못하면 백라장 패망의 책임을 흑천맹이 뒤집어쓰고 형산파와 전쟁을 치러야 할지 모르니깐 말이다.
거기에 귀몰색마를 구하려는 백라장의 두 장로가 없어지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득.
그래서 그들은 내 제의를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서신에 적힌 대로 쾌속선의 뱃머리에 흑포를 걸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탓에 백라장 두 노인네가 탄강까지 날리며 가한 기습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바로 격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물속에서 기습하겠다는 전음은 백라장 두 장로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다. 저들에게도 보냈었다.
어쨌든 이로써 백라장은 생존자 하나 없이 완전히 끝장난 것이다.
멀어져 가는 쾌속선을 바라보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강바닥에 꽂혀 있는 대감도를 찾아 다시 물 밖으로 나왔다.
이제 귀몰색마의 뒤를 쫓을 필요는 없다. 섬서 서안으로 가서 미면나찰이 귀몰색마를 잡아먹기 기다리면 될 일.
느긋하게 움직였다. 하루가 지나자 공방에서 두 쌍의 소형 방수가 배달됐다. 배달 온 수리에게 대감도를 넘기고 방수를 한 쌍씩 팔뚝과 종아리에 장비했다.
그리고 서안을 향해 피풍의를 펼쳤다.
***
서안에 도착한 지 나흘째, 간신히 고화질 인생으로 복귀했다.
섬서 서안은 안테나의 범위 밖이었다. 아니 무창 안테나의 범위 안이기는 했지만 다른 안테나의 범위 밖이라 안테나를 두 개나 세워야 했다.
도착하기 무섭게 서안 부도 남쪽 종남산(終南山) 자락의 도관(道觀)에 안테나를 세우고, 다른 하나는 위하(渭河) 북쪽 강변의 칠산(㓼山) 자락의 도관에 세웠다.
비단옷을 차려입고 찾아가 부모의 건강을 비는 치성(致誠)을 위한 방법이라고 사기를 치고 한 달 기한으로 은자 오십 냥씩을 내놓으니 두 도관에서는 두말없이 안테나를 세우게 해줬다.
임시 안테나를 세우고 흑천맹에 통신 벌레들을 뿌렸다.
흑천맹 총타는 서안 서부에 몰려 있는 환락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동서로 일백 장, 남북으로 칠십 장 넓이에 담벼락도 이 장 높이인 것이 이건 장원이 아니라 아예 성이라 할 수 있는 규모였다.
백라장에서 재활용하는 서생원 시리즈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 공방에서 알파 개체를 더 만들어 와야 했다.
어쨌든 그렇게 사전 준비를 하니 닷새가 훌쩍 지나 있었다.
= 귀몰색마는?
방탕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위장해서 흑천맹 총타와 가까운 기루에 죽치고 앉아 있는 중이다.
- 이때까지의 이동 속도를 생각하면 내일이면 총타에 도착할 듯합니다.
= 새끼들 더럽게 느리네.
그게 정상적인 이 시대의 이동 속도지만 걸핏하면 하루 몇 백 리 뛰어다니던 생활을 하다 보니 그 속도가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다.
= 흑천맹의 초극 고수 규모는?
- 일단 서안 내 흑도 고수들은 죄다 흑천맹 소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총타와 환락가에 퍼져 있는 흑도의 초극 고수들은 예순아홉으로 파악됩니다.
= 정파 쪽 고수들은?
- 화산과 공동이 세를 다투는 곳이라 적지 않습니다. 자세한 분류는 아직 못했습니다만, 흑도 쪽을 제외한 고수들은 쉰일곱으로 파악됩니다.
= 항주보다 더한 복마전이군.
그 성의 모든 이권이 집중된 성도라지만 일개 지역에 초극이 일백 넘게 모여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다.
- 흑백양도에서 손에 꼽히는 세력 세 곳이 부딪치는 지역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될 때까지 조용히 술이나 마셔야겠다.
기루는 객잔이 아니기에 죽치고 앉아 있으려면 매일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객잔에 묵으려 했지만, 서안 서부의 환락가에는 객잔이 없는 것이다.
그냥 서안 내의 객잔에 있다가 흑천맹 총타로 달려가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상대는 천문위다.
일이 계획대로 흘러도 단번에 죽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니 미면나찰이 폭발의 충격에 정신을, 상처를 수습하기 전에 들이쳐 끝장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있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이 좋지 않은가 말이다.
“공자님, 오늘은 소녀가 모시겠습니다.”
매일 은자를 뿌려대니 기녀들이 달라붙는 것은 당연지사다.
명성 높은 기녀는 정중히 사양했다. 고수가 득실거리는 동네 아닌가. 괜히 이름값 하는 기녀를 옆에 앉혔다가 색에 빠진 고수와 실랑이가 일어날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다.
당장 내 윗방만 해도 흑도가 아닌, 누군지 모를 초극 고수 한 명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건넛방도 마찬가지.
한 기루에 나를 포함해 초극 고수가 셋이나 들어앉아 있다.
상황이 이러니 예기(藝妓)를 앞에 앉혀 놓고도 마음 놓고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기는 것은 절대 무리다.
술은 먹기 무섭게 농꾼이 알코올을 분해시킨다. 공력을 일으켜 날려 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윗방 초극 고수의 괜한 관심을 끌 수 있으니 농꾼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데 안 될 놈은 안 되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 보다.
쿵, 콰쾅!
갑자기 기루가 부서져라 굉음이 터지더니 지붕을 뚫고 내 술상 위로 시커먼 인영이 하나 떨어졌다.
“철매화(撤梅花)! 오늘 끝장을 보자!”
그리고 터지는 노성과 함께 내 술상 위로 떨어진 인영을 향해 살벌무비한 검강이 그어진다.
술상 위의 인영을 베기 전에 나를 베는 궤적을 그리면서 말이다.
애꿎은 검강에 맞을 수 없으니 양손을 검게 물들이며 강기를 일으켜 검강을 받아낸다.
쾅!
굉음과 함께 검의 주인이 방안으로 내려섰다.
“네놈! 누구기에 남의 싸움에 끼어드느냐?”
아나, 이 새끼 술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다. 고수란 놈이 자기 칼이 어딜 향했는지도 모르는 건가?
“뭐야, 이것들!”
내 중얼거림에 농꾼이 답하니.
- 리퍼, 둘 다 수확 대상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