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보복행(09)
도강에 잘려 나간 정문을 지나서 장원 안으로 들어선다.
천천히 들어서자 무인들이 튀어 나와 나를 멀찍이 포위한다.
저들도 머리가 있기에 강기가 이글거리는 칼을 든 적에게 섣불리 덤벼들기 싫은 것이다.
“어디서 오신 분이오?”
나와 있는 놈들 중 제일 강한 기세를 가진 놈이 묻는다.
대답을 바라고 묻는 것이 아니다. 나를 상대할 만한 고수가 나올 시간을 끌려는 것이다.
뻔한 수작에 어울려 줄 필요 없다.
탁!
바로 바닥을 박차 거리를 좁히고 크게 칼을 휘두른다.
“컥!”
놈이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지기도 전에 그 옆의 놈들을 향해 발을 움직인다.
“막아!”
다섯 자루의 검이 나를 향해 뻗어 오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따다다당!
격한 금속성이 들리며 검들이 튕겨 난다. 나는 그저 틈을 노리고 칼을 휘두를 뿐.
“크아악!”
“아악!”
비명이 난무하며 피가 뿌려진다. 내 발은 몰려 있는 무인들을 향해 거침없이 옮겨지고, 내 손은 그들의 생명을 끊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
타다다당!
살아남기 위해 휘둘러지는 그들의 무기는 전혀 내게 닿지 않고 금속성을 토하며 튕겨 날 뿐이다.
내 등 뒤에서 튀어 나오는 방수가 두 자루의 소도를 쥐고 내게 쏟아지는 공격을 후려치는 것이다.
하수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말이다.
방수가 있으니 하수들과 난전에서는 거의 무적이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오직 공격에 정신을 쏟는 초극 고수의 공격을 일류와 절정의 무인이 어떻게 당해낼 리 없다.
순식간에 수십의 무인을 벴다. 주위를 피바다로 만들고 남은 무인들을 향해 발을 옮기려는 찰나.
“멈춰라.”
노성과 함께 머리 위로 덮쳐드는 매서운 기세.
칼을 들지도 발을 움직이지도 않고 농꾼을 믿는다.
우웅!
코앞으로 강기가 지나가며.
쾅!
바닥이 박살난다.
회피 모드의 방수가 잽싸게 바닥을 잡고 내 몸을 뒤로 당긴 것이다.
물론 그 움직임은 내 뒤를 완전 덥듯 펄럭이는 피풍의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네놈, 누구기에 백라장에 와 살육을 벌이느냐!”
쉰쯤 먹어 보이는 건장한 검객이다. 백라장의 외당주다.
내가 해 뜬 뒤에 왔으면 무창으로 출발해 백라장에 없었을 사람이다.
뭐, 미면나찰이 갑자기 튀어 나오지 않았으면 어차피 내 손에 제일 먼저 죽었을 사람이기는 했다.
“놈!”
대답이 없자 노성을 내지르며 나를 덮쳐들었다. 검강이 표홀히 내 어깨를 노리지만. 나는 방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카캉!
검강은 내 어깨에 닿기 전에 튕겨 났지만 내 칼은 예정대로 백라장 외당주의 배를 갈랐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뻔한 소리 내뱉기 전에 내 칼이 번뜩이며 그 목을 날려 준다.
“맙소사, 외당주가 한 합에!”
“보통 놈이 아니오.”
“협공합시다!”
“그 수밖에 없겠소.”
한 마디씩 하면서 기세를 뿜어내는 노인 넷이다. 백라장의 호법들로 죄다 초극들이다.
뱀눈, 칼자국, 매부리코, 흰수염이라는 각기 인상적인 특징을 가진 노인들이다.
넷의 기세는 출중했지만 하나로 얽혀들지는 않았다. 같은 형산 속가 출신이라 해도 그뿐, 서로 공력을 더하는 합공법을 익히지는 않은 듯했다.
= 회피 모드 방수의 움직임과 적 공격 경로는 시야 표시가 아니라 직감 동조로 전환.
- 예, 리퍼.
두 쌍의 방수를 등 뒤에 숨기고 네 명의 초극 고수를 향해 그대로 돌진한다.
좌우에서 덮쳐드는 검강. 방수에 맡기고 정면으로 강격!
카캉!
막히는 즉시 상대의 좌측으로 빠지며 배를 베어낸다.
카르릉.
금속성과 함께 손에 걸리는 저항감. 막혔다. 거기에 정면으로 검강이 들이닥친다.
휘잉!
몸이 허공으로 던져진다. 순식간에 네 명의 노인들과 거리를 벌리며 뭉쳐 있는 백라장 무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콰자자자작!
바닥으로 내려서며 휘두르는 칼에 인근 무사 여섯의 몸이 허물어졌다.
“도망가지 마라!”
매부리코의 노성과 함께 네 명의 노인들이 한 무더기가 되어 덮쳐든다.
좌우와 정면, 그리고 그 뒤를 받치는 하나. 누구 하나와 부딪치는 순간, 순식간에 포위되는 진형이다.
그렇다면 안 부딪치면 그뿐.
바닥을 박차고 덮쳐드는 노인들을 향해 나도 몸을 날린다.
좌우의 매부리코와 칼자국은 방수에게 맡기고 정면의 뱀눈 노인네를 향해 발을 놀린다.
격하게 바닥을 박차고 마지막 거리를 줄이고 충돌하기 직전, 내 몸이 허공에서 뒤로 당겨진다. 방수가 땅을 잡고 내 몸을 당긴 것이다.
그로 인해 내 머리를 쳐야 할 격한 검격이 코앞을 지나간다.
그리고 내 칼이, 지나가는 검격을 뒤이어 뱀눈 노인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방수의 개입으로 나는 검격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고 뱀눈 노인은 내 도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탓이다.
“네놈!”
허물어지는 뱀눈 노인의 뒤에서 흰 수염 노인이 노성과 함께 검강을 내질렀지만 내 몸은 내 발놀림과 상관없이 허공으로 던져지고 있었다.
이것도 방수에 의한 회피.
내 자세를 통해 내 움직임을 예측하던 노인들에게는 내가 순간 사라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딜!”
“죽어랏!”
하지만 그들은 시야에만 의지해 검을 휘두르는 애송이들이 아니다.
초극 고수의 예민한 감각으로 나를 잡아낸다. 바로 나를 쫓아 세 명의 노인들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그리고 휘몰아치는 검강의 폭풍!
하지만 저들 세 명이 총 세 자루의 검을 지니듯 나에게도 세 자루의 칼이 있었다.
캉, 카카쾅!
검강과 칼과 소도가 뿜어내는 유사 강기가 허공에서 격하게 충돌한다.
강기와 유사 강기가 만들어 내는 충격의 여파가 나를 허공으로 밀어 올리고, 세 노인을 땅으로 돌려보낸다.
힘 받을 때 없는 허공으로 튀어 오른 것이 당신들 실수. 나는 댁들과 달리 농꾼이 제어하는 피풍의가 있거든.
파라락!
피풍의를 펄럭이며 허공에서 자세를 바꾼다.
= 유사 기맥 off.
방수로 가는 공력을 잠시 끊고 내 칼에 온전한 공력을 실었다.
우우웅!
유사 강기가 아닌 진실 된 강기가 피어오르고.
끼요옷!
거기에 호거술까지 더해 힘껏 뻗는다.
쾅! 콰쾅!
발이 미처 땅에 닿기 전 덮쳐든 거력. 세 노인은 자신들의 무기로 어떻게든 증폭된 강기를 막아냈지만, 몸이 뒤로 밀려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십여 장쯤 밀려나는 노인들.
매부리코와 칼자국은 같은 방향이지만 흰 수염은 홀로 떨어진다.
노린 대로다.
나는 당연히 혼자 된 흰 수염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 on.
“이놈!”
“멈춰라!”
매부리코와 칼자국이 급히 흰 수염과 합류하려 했지만 내가 한발 빨랐다.
캉!
떨어져 내리며 내려찍는 내 칼을 흰 수염이 막아냈다. 하지만 내 칼은 하나가 아니다.
퍼퍽!
방수가 찔러댄 두 자루 소도가 고스란히 흰 수염의 양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소도가 뿜어내는 강기에 내장과 척추가 박살난 흰 수염이 허물어질 때 나는 몸을 돌려 덮쳐드는 매부리코와 칼자국을 맞이했다.
검강과 도강이 난무한다.
이대일의 격전.
두 자루의 검이 내 전신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지만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내 전방의 한 명뿐.
펄럭이는 피풍의 사이로 빛살같이 튀어 나와 휘둘러지는 두 자루의 소도. 방수가 휘두르는 그것이 한 명을 완벽히 막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내가 장착한 방수는 두 쌍. 내공이 딸려 남은 한 쌍이 도기나 유사 강기를 휘두를 수는 없지만 전격을 담을 수는 있었다.
파자작!
호신강기를 깨트리는 전격에 칼자국의 전신이 일순간 경직되니 내 칼이 그 틈을 놓칠 리 없다.
칼자국의 목이 날아가니 살아남은 것은 매부리코 한 명.
그도 바로 친우들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끄아악!”
“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한다.
나는 그저 발을 옮기고 있을 뿐, 백라장 정예들을 도륙하고 있는 것은 방수다.
두 쌍의 방수가 내 주위에 있는 주인 잃은 무기들을 잡아 던진다.
초극 고수가 제공하는 공력을 무기에 주입해서 인공 근육이 만들어내는 톤 단위의 근력으로 던져대니 일류 무사에 불과한 백라장 정예들은 날아드는 무기를 막을 수 없었다.
피하면 되지 않냐고? 피하는 것도 쉬울 리 없다.
방수는 인공 근육 덩어리. 사람 팔과 달리 그 움직임에 관절이라는 제약이 없다.
사람 팔로 던지는 것과 궤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소리.
호법들과 나의 싸움을 지켜본 백라장 정예들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
- 절정 열둘, 초극 하나. 초극 둘, 절정 여덟로 이루어진 두 무리가 접근 중입니다.
농꾼의 경고. 눈을 돌리니 후원 쪽에서 건물 지붕을 박차고 달려오는 무리가 보였다.
백라장주와 내당주였다. 또 하나의 무리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상에 잡혔다. 집법당주가 이끄는 자들이다.
“빨리도 온다.”
백라장 정도 규모가 되면 한쪽에서 일이 터졌다고 그쪽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킬 수는 없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탓도 있지만 보통 습격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이고 처음 공격은 대개 미끼일 가능성이 크니 말이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수작에 대비했다가 다른 습격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딴에는 최대한 빨리 오는 것이다.
두 쌍의 방수를 장착한 나다.
초극 셋에 절정 스물로 내게 위협이 되려면 죄다 합공을 익힌 자들이어야 했다.
아무리 백라장이 형산의 삼대 속가 중 하나라지만 합공을 익힌 자들이 그렇게 많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느긋하게 저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도착하기 무섭게 맞닥뜨린 살육의 현장에 눈을 부릅떴다.
“외당주와 호법들까지….”
백라장주가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우리 백라장과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런 살육을 벌인 것이냐?”
백라장주가 외쳤다.
“귀몰색마.”
그 한 마디로 백라장주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네놈, 귀몰색마와 한 패인 것이냐!”
사정 모르는 자, 백라장의 집법당주가 이를 갈았다.
“원한이 있는 쪽이지.”
사실을 말해 주면서 칼자루를 고쳐 잡는다.
“귀몰색마와 원한이 있으면서 왜 우리 백라장을….”
“저 악적을 죽여라!”
장주의 노성이 집법당주의 말을 덮었다. 그리고 백라장의 절정 무인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절정 무인의 협공 따위 방수를 쓸 것도 없다. 본신의 근력과 공력, 그리고 몸무게를 앞세워 묵직하고 빠르게 칼을 놀린다.
칼을 들어 공격을 받고 받기 무섭게 바로 발을 옮기며 반격한다.
한 걸음에 한 칼, 공수가 겸비된 한 동작에 한 생명이 사라진다.
검을 들어 칼을 막아도 소용없다. 찍어 누르는 칼질에 검신이 밀려나고, 밀고 들어오는 칼질에 육신은 동강난다.
다섯 걸음 내딛는 동안 여섯의 생명이 사라졌다. 마지막 칼질이 호쾌하게 호선을 그리며 두 명을 벤 탓이다.
순식간에 여섯이 죽어 열넷이 되니 주춤거릴 수밖에 없다.
“비켜라!”
“타합!”
“헙!”
수하들의 죽음으로 내 실력을 가늠한 백라장의 초극 고수들이 한 몸이 되어 달려든다.
하나 같이 경지에 이른 원공검. 여기에 내 대응은 공력을 잔뜩 집중시킨 걸음으로 뒤로 분분히 물러나는 것이다.
쿵, 쿵, 쿵, 쿵!
내 발이 바닥을 찍을 때마다 발밑의 청석이 가루가 된다.
아니 발만 움직이지 않는다. 뒤로 물러나며 빈손도 열심히 휘두른다.
팡, 파파팡!
빈손에서 뻗어 나간 장력이 바닥을 후려치니 내 발걸음에 빻아진 청석 가루들이 먼지가 되어 흩날린다.
“흥! 먼지를 일으키기에 딱 좋은 수법이구나!”
집법당주가 내 장력을 비웃으며 검을 휘두른다.
복면 아래 내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솔직히 집법당주 말대로다. 이게 전부 다 먼지를 피워 올리기 위한 수작이거든.
세 초극 고수의 협공을 피하며 그렇게 피어오른 먼지를 향해 다시 맨손을 휘두른다.
내 손짓을 따라 세 초극 고수들의 뒤편에 지름 한 자 크기의 기막(氣膜)이 형성되고, 형성된 기막은 빙그르르 회전하며 주위의 피어오른 먼지를 집어삼킨다.
그리고 내가 가볍게 튕긴 뇌전에 21세기의 흔하디흔한 과학 상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합공과 협공의 절대적 파훼법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콰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