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보복행(08)
설마? 미면나찰, 이 할망구의 먹잇감으로 사제가 당첨되었다는 건가?
“내용을 봤느냐?”
- 표정 보니 사형이 보낸 물건이 아니구려. 하긴, 사형이 내게 뭔가를 보내는데 사람을 쓸 리가 없지.
물품 배달은 주로 금정산 공방에 소속된 수리들을 활용하거나 중량이 나가는 물건은 해양 생물들을 썼으니 저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 그렇다면 누가 사형 이름으로 내게 수작질을 부리고 있다는 것인데…. 사형 짐작 가는 것 없소?
“회천대양신공. 백라장의 소장주 우백천이 귀몰색마가 된 원인이지.”
- 젠장, 사형이 귀몰색마를 잡아 죽였다는 것을 들킨 것이오?
사제가 잘생긴 얼굴을 힘껏 구기며 말했다. 백라장에서 보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백라장이 아니다.”
나는 사제에게 내가 본 영상을, 백라장의 영상을 보여줬다.
- 젠장, 내가 흑천맹주가 빨아먹을 보약으로 낙점되었다는 거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 고수에게 채음보양(采陰補陽)의 색공에 빠지게 하여 내공을 불리게 한 다음 채양보음(采陽補陰)의 색공으로 잡아먹으려는 것이다.
“그 빌어먹을 색공을 익히지 않으면 될 일이다.”
- 내용을 안 본 것이 천만다행이오. 그럼, 이 망할 색공은 태워 없애겠소.
“아니. 이쪽으로 보내.”
- 백해무익한 색공 아니오. 이걸로 뭘 어쩌려고 그러시오?
“다 쓸데가 있으니 그냥 보내기나 해.”
- 알겠소.
대화를 마치고 통신을 끊었다.
말은 익히지 않으면 그만이라 했지만, 세상사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다.
미면나찰 같은 인간이 한번 찍은 먹잇감을 그냥 넘어갈 리 없지 않은가.
아니 이런 일에 미면나찰이 직접 움직일 리 없으니 그 아랫것들이 알아서 움직일 게 분명했다.
사제가 회천대양신공을 익혀 색마가 되면 미면나찰에게 먹히고, 익히지 않으면 흑천맹이라는 거대 세력에 찍혀 개고생을 할 것이 뻔했다.
파양호 수채 뒤에 숨는다? 애초에 청도방이 파양호 수채의 휘하 세력이었다면 모를까, 그도 아닌 마당이다. 파양호 수채가 우리 청도방을 위해 흑천맹과 갈등을 일으킬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부, 사제와 함께 절강 땅으로 도망가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절강이라면 어떻게든 우리들을 지켜 주려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신상이 드러나고, 내 사문이 노출된다.
그렇게 되면 육가장이, 강남 흑도맹이 기를 쓰고 움직일 것이 뻔하다.
나를 비롯한 내 사문을 지워 버리면 절강 무림은 매를 잃게 된다.
매를 잃은 절강 무림은 외부로 뻗쳐 나오기는커녕 절강에서 왜구 상대하기 바빠질 테니.
“멸왜단과 절강 무림의 전력으로 흑천맹을 쳐?”
신창양가와 남궁세가까지 꼬드기면 흑천맹을 박살 낼 전력은 충분히 나왔다.
하지만 남직례와 섬서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거기다가 남직례에는 강남 흑도맹이 있다. 이들을 견제해야 하니 신창양가와 남궁세가의 전력을 차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
멸왜단도 왜구가 있기에 장기 원정 따위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절강의 안면 있는 천문위들을 모아 미면나찰을 급습해 해치우는 게 그나마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 뒷감당이 무시무시하다.
미면나찰, 흑천맹주. 그 망할 할망구가 강북 흑도에 영향력을 얻은 방법이 문제다.
여중제일인, 아니 중원 최고의 색마가 그녀다. 강북 흑도의 굵직한 거마들 중 그녀와 배를 맞춰 보지 않은 자들이 드물 정도.
자신이 미처 흡수하지 못한 내공을 방중술로 거마들에게 베푸니 그녀와 배를 맞춰 본 흑도의 거마들은 그녀의 애인임을 자처했다.
그런데 떼거리로 몰려가 그녀를 때려죽인다면 강북 흑도 거마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복수를 하려 나설 것이다.
강남 흑도맹이, 육가장이 이걸 활용하려 들것은 뻔하다. 그렇게 되면 절강 무림이 위기에 빠지는 것은 당연지사.
천문위쯤 되는 인간들이 이런 수순을 읽지 못할 리 없으니 절강 천문위를 모아 미면나찰을 급습하는 일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농꾼.”
- 예, 리퍼.
“마*카*투 델타라면 귀몰색마의 인체에서 폭탄을 생성할 수 있지?”
모든 일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미면나찰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
- 가능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화기의 사용은….
“화기 사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무공의 쇠퇴를 불러올 수도 있기에 그러는 것 아냐? 장기적으로 데이터 뽑아야 하니깐.”
- 예, 확실히 그런 의도입니다.
“당장 데이터 수확에 방해가 되는 게 뭔지 따져 볼까? 백라장 소장주인 우백천을 보자고. 그 녀석에게서 뽑은 초극 데이터. 어떻게 됐지? 못 쓰게 됐어. 왜? 회천대양신공이라는 색공에 오염됐기 때문이지. 색공에 오염되지 않았으면, 색마가 되지 않았으면 천문위가 될 때까지 뽑아 먹을 가능성이 컸다고! 그런데 없어졌어. 아무것도 못 건졌어. 그 망할 색공 때문에. 그런 마당에 사제에게 그 색공이 전해졌다. 그 색공이 전해지는 기준이 뭘까? 오 년 전 우백천과 지금 사제의 공통점. 비교적 젊은 나이, 서른도 되지 않는 나이에 초극으로 소문난 인재라는 거야. 이 색공이 이런 기준으로 뿌려지는 걸 방치하면 향후 우리의 수확이 어떻게 될지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겠어?”
나노 머신을 지닌 젊은 수확 대상자들에게 색공이 전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렇게 수확 대상자들 사이에 이 빌어먹을 색공이 퍼지면 무공 수확은 그 효율이 떨어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21세기 현대에 필요한 것은 S급 괴물을 때려잡을 초극 무공의 데이터지, 성욕을 주체 못 하게 하는 강간범을 양산하는 데이터가 아니니 말이다.
- 확실히 색공을 퍼트리는 원흉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화기 사용은….
“까놓고 이야기하자. 지금 내 능력으로 천문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초극 고수. 갓 초극이 된 무인치고는 상당히 강한 편이지만 천문위에 비비기에는 턱도 없다.
- 천문위를 상대할 경우 일 할 이하의 승률 밖에….
“그게 현실이고 내 능력이지. 그런데 지금 수확을 망치는 주범은 천문위네? 그것도 어지간한 천문위가 아니라 상당한 윗줄의 천문위!”
미면나찰의 무위는 신창양가의 구민신창보다 윗줄이라는 것이 무림의 일반적인 평가다.
“그런 천문위를 상대로 나보고 어쩌라고. 솔직히 내가 화기로 무장한다 해도 정면 대결로는 승부가 안 돼. 초극의 호신강기만 해도 어지간한 소총탄은 견뎌내잖아. 수류탄이 터져도 폭발에 뒤로 밀려날 뿐 파편으로는 큰 상처를 못 줘. 초극 고수도 이럴 진데 그보다 윗줄인 천문위는 어떻겠어?”
- 그 정도면 귀몰색마의 신체에 폭탄을 생성한다 해도 큰 효용이 없을 듯 합니다만?
“일단 폭탄 생성은 하겠다는 소리지?”
-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런데, 폭탄을 생성한다 해도 천문위에게….
“다 방법이 있다고.”
농꾼에게 몸 안에 폭탄을 생성한 귀몰색마를 어떻게 써먹을지 알려 줬다.
- 그 방법이라면 확실히 상대가 천문위라도 승산이 있겠군요.
“그렇지? 그러니 빨리 시작해.”
- 예, 리퍼.
“아, 그리고 꿈틀이랑 서생원들 준비해 둬. 통신 벌레들도. 귀몰색마의 행선지가 흑천맹이 확실해지면 그쪽에도 감시망을 깔아야 하니깐.”
미면나찰과 흑천맹이 배후일 가능성이 상당했지만, 아직 그들이라고 확정된 것은 아니다.
어쨌든 백라장 두 원로의 추측을 기반으로 한 가정일 뿐이니깐.
- 백라장에 배치된 자원들을 재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되겠네.”
- 백라장에 배치된 자원들을 재배치합니다.
“아니, 당장은 말고. 내 볼일 끝난 다음에.”
- 그 말씀은 백라장을 타격하는 방향으로 다시 방침이 바뀐 것입니까?
“그래.”
백라장의 관심은 이제 흑천맹 쪽으로 흘러가게 된 상황.
좀 전까지만 해도 백라장을 건드려 형산 본산이 움직이는 상황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여기서 손을 떼는 게 아니라 미면나찰을 끝장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니 백라장을 후려치고 이 또한 흑천맹의 수작으로 만들어야 했다. 일이 잘 풀린 뒤를 대비하는 것이다.
형산과 흑천맹이 각을 세우게 만든다. 형산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면 호광 흑도들이 흑천맹과 동조하는 정도는 막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귀몰색마와 얽힌 탓에 사제가 미면나찰의 눈에 들어간 상황이라 백라장에 화풀이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칼은 백라장으로 보내 줘.”
금정산에서 무창보다 백라장이 가깝다.
“그리고 대감도 하나 준비해 둬. 똑같은 것으로.”
***
무창 팔분산에서 백라장까지의 거리는 육백 리 정도. 피풍의 펼치고 달리면 한 시진이면 충분했다.
백라장은 이름 그대로 장사부 상음현 북부의 평야 지대인 백라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장원이었다.
평야를 뒤로 하고 동정호로 흘러 들어가는 강을 내려다보는 것이 동정호 방면에서 보면 무슨 관문처럼 보였다.
새벽녘 사라지는 어둠의 끝자락에 숨어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자니 하늘에서 뭔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 리퍼, 금정산에서 배달입니다.
공방의 배달 담당 수리다.
녀석은 내 머리맡까지 날아와 보퉁이 하나를 떨구고 사라졌다.
금정산에 두고 온 내 칼과 사제가 보낸 회천대양신공의 책자다.
“백라장주의 숙부라던 노인 둘은? 무창으로 출발했나?”
책자는 품에 넣고 칼을 허리에 차며 묻는다. 백라장에서 껄끄러운 상대는 일단 그 둘이기에 위치부터 확인했다.
- 해당 인원들은 현재 백라장과 46km 거리에서 시속 53km의 속도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무창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는 소리다.
“뭐 그 정도 거리면 소식 듣고 달려올 일 없겠군. 백라장의 핵심 전력들 위치 띄워.”
내 말에 응 시리즈의 시야가 공유되며 장원 곳곳에 붉은 점들이 표시되었다.
장원 내의 초극 고수는 여덟.
“목표 설정 백라장주가 1번, 내당주가 2번.”
다른 작자들은 몰라도 이 둘은 확실히 죽여야 한다. 귀몰색마가 나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 그 정체를 알고도 입 닫은 이 둘이니 말이다.
그래야 내 화가….
나는 화풀이 하러 온 거 아니다.
어쩄든 목표를 지정하자 장원의 심처 붉은 점 둘에 1, 2의 숫자가 부여된다.
백라장주와 내당주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조용히 들어가서 그 둘을 죽이고 내빼면 그만이지만, 내가 백라장을 찾은 목적은 그것만이 아니다.
“방수 가동.”
흑천맹에서 크게 한 판 벌리기 위해서는 내 전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지금 내 전력을 끌어올리기 가장 쉬운 방법은 방수에 익숙해져서 그 기능을 십분 발휘하는 것. 백라장은 그러기 위한 좋은 연습 상대.
“한 쌍은 방어 모드. 한 쌍은 회피 지원 모드.”
양손의 장심에 방수와 연결된 유사 기맥이 들러붙는다. 뒤춤에 찔러 놓은 소도 두 자루의 무게감이 사라진다.
복면을 뒤집어쓰고 칼을 뽑았다. 그리고 백라장 정문을 향해 느긋하게 발을 움직인다.
“거기 누구냐?”
백라장 정문을 지키는 번초들의 눈에 그런 내가 안 보일 리 없다.
대답 따위는 없다. 복면 쓰고 칼 들고 오는 상대에게 뭘 묻냐고.
“적이다!”
삐이익!
경고성과 호각음을 들으며 칼을 높이 든다.
우우웅!
전압이 걸린 칼날이 울며 유사 강기를 토해냈다.
“초극 고수!”
“습격자의 무위, 초극 확인!”
번초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뒤로 뺀다.
도강이 커다란 호를 그리고.
쿠쿵!
깔끔하게 베어진 대문이 격한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오래간만에 깽판의 정석대로 움직이니 흑도인의 피가 들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