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보복행(07)
“백라장에 이제 소식이 갔는데?”
남로표국은 형산 속가. 백라장과 같은 형산 속가인 탓에 전서구를 통한 연락망이 갖춰져 있었다. 그 덕에 하루가 되기 전에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귀몰색마에 현상금을 건 다른 세력들? 그들은 아직 연락도 받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그러면 저들이 온 곳은?
“남로표국에 내가 돈을 주게 만든 자들이군.”
하오문이 귀몰색마의 정보를 차단하게 만든 세력에서 나온 자들이 분명했다.
“셋이 다야?”
눈앞에 떠오르는 영상을 보며 물었다. 얼굴을 당당히 드러낸 세 명의 노인들이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장원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매들의 탐색 기능을 총동원하여 확인했습니다. 다른 인원은 없습니다.”
“그래?”
저들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머리를 굴려 본다. 무림의 정보통인 하오문이 백라장보다 강한 곳이라 판단한 곳이 저들이 속한 곳이다.
저들에게 귀몰색마의 육체를 넘겨주고 백라장과 충돌시켜 볼까?
흠,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저들이 귀몰색마가 백라장 소장주인 것을 알고 있다면 도리어 그 사실로 자신들을 추적하는 백라장 인원들을 협박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나눠 상대할 수 있었던 적을 한 번에 상대해야 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적은 줄이는 것이 좋지.”
일단 귀몰색마를 넘겨준다. 어쨌든 귀몰색마는 이미 죽어 나자빠진 시체일 뿐이니 말이다.
백라장? 이미 귀몰색마의 정체를 아는 자들을 알아냈고, 그 세력 중 일부를 끌어냈으니 예정대로 상대하면 될 일이다.
세 노인 중 허연 수염을 가슴팍까지 기른 노인이 장원의 정문을 향해 움직이고, 다른 둘은 어둠에 몸을 숨겨 담벼락을 따라 움직인다.
쾅! 콰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허연 수염의 노인이 등에 멘 도끼를 꺼내 들더니 다짜고짜 장원의 정문을 찍어 박살 낸 것이다.
나는 귀몰색마를 대동하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장원의 내원 담벼락에 홀로 올라서니 장원 안으로 들어서는 노인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예의가 없으신 분이구려. 야밤에 이리 요란하게 방문하다니!”
뭐 가로세로 십 장 정도 되는 장원이니 내가 보이면 노인도 나를 볼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네놈이 귀몰색마를 잡았다는 조가인가?”
“그렇소.”
“귀몰색마를 내놔!”
호통과 함께 노인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줄이며 도끼를 휘두른다.
콰쾅!
굉음과 함께 내가 딛고 섰던 담벼락이 박살났다.
허공으로 치솟았던 나는 바로 떨어져 내리며 노인의 머리통을 향해 대감도를 내려쳤다.
쾅!
강기까지 서린 묵직한 대감도의 칼날을 노인이 도끼로 받아낸다. 아니 단순히 받아내는 정도가 아니다.
“타합!”
노인이 기합을 내지르며 도끼를 밀어내자 대감도로 찍어 누르던 내가 허공으로 튕겨 난다.
내가 땅 위로 내려서기 무섭게 노인이 달려들었다.
부우웅!
도끼가 공간을 패며 날아든다.
쾅!
대감도로 막기 무섭게 양발이 바닥을 긁으며 뒤로 밀려난다.
무지막지한 힘이다.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힘을 활용한 도끼질이 내 몸을 향해 이어진다.
쾅, 콰쾅, 쾅!
초격보다 이격이, 이격보다 삼격이 무겁다. 아니 이어지는 공격이 점점 무겁고 거세진다. 그야말로 연환의 묘를 잘 살린 도끼질이다.
날아드는 다음 도끼질에 땅을 박차고 뒤로 피한다. 이에 노인네는 도끼질에 몸을 맡기며 그대로 회전하며 발을 옮겨 따라붙으며 다시 내게 도끼를 날린다.
걸리면 손해가 클 공격. 하지만 내 발은 아직 허공에 있어 힘 받을 때가 없다.
피할 수 없는 공격.
물론, 그건 사지를 지닌 일반적 무인의 경우다.
부웅!
도끼질이 내 발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내 몸은 누가 잡고 던진 듯 허공을 날고 있다. 내 등에 달린 또 다른 손인 방수가 움직여 땅을 잡고 내 몸을 날린 것이다.
허공에서 자세를 잡고 땅으로 내려선다.
“허, 그 상황에서 그런 움직이라니, 대단한 신법이군.”
노인이 도끼를 고쳐 잡으며 탄성을 터트렸다.
“마음 같아서는 날이 새도록 싸워 보고 싶지만, 오늘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날이 아니라 아쉽군.”
노인이 바닥을 박차 크게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나와 거리를 벌리는가 싶더니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허.”
허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귀몰색마가 안보였다.
잠시 도끼 노인과 투닥이는 사이 다른 노인 둘이 귀몰색마를 빼돌린 것이다.
“이런 뻔한 수작을!”
노성을 내지르며.
“서라!”
바로 도끼 노인을 뒤쫓는다.
물론, 진짜로 쫓을 마음 따위는 없다. 하지만 장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도끼 노인과 그 일행들은 귀몰색마와 함께 백 장쯤 앞에 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빠른 속도로, 하지만 초극 무인을 쫓기에는 무리인 속도로 내달린다.
노인들과 나의 거리는 계속 벌어지는 중.
열심히 달리다 장원에서 적당한 거리가 되자 발을 멈췄다.
“하아압!”
크게 기합을 내지르고.
쾅, 콰쾅!
여기저기로 격하게 칼질을 날린다. 강기가 서린 내 칼질에 애꿎은 팔분산의 산림이 작살났다. 그렇게 격전의 흔적을 잔뜩 만들어 낸 뒤 한숨을 돌렸다.
“귀몰색마는 따로 추적하지 않아도 되지?”
- 마*카*투 델타와 직접 교신이 가능하니 따로 추적할 필요는 없습니다.
농꾼의 말대로 귀몰색마가 보고 듣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으니 따로 응 시리즈를 붙일 필요는 없었다.
“그나저나 시체 하나가 필요한데. 주위에 갓 죽은 사람 없어?”
저 작자들이 귀몰색마만 데려간 것이 아니라 따라붙는 나도 죽인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 응 시리즈를 동원해 찾아보겠습니다.
“해 뜨기 전에 찾아야 해.”
해 뜨면 장원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나올 테니 그 전에 시체를 가져다 위장해야 했다.
- 예, 리퍼.
“아, 그리고 금정산에 두고 온 내 칼도 가져다 줘.”
확실한 위장을 위해 해야 할 것이 시체 말고 하나 더 있기는 했다.
- 예, 리퍼. 수리로 공중 수송을 해서 200분 정도 걸릴 듯합니다.
농꾼의 대답을 들으며 주위를 살폈다. 적당한 바위 하나가 보이자 대감도를 들고 그 바위로 향했다.
바위 앞에 서서 대감도를 거꾸로 들었다.
콱!
그대로 대감도를 바위에 꽂았다.
우웅!
왼손을 금속으로 물들이며 강기를 일으키고는 그대로 휘둘렀다.
쩡!
금속성과 함께 바위에 꽂힌 대감도가 반으로 분질러졌다. 오른손에 남은 대감도의 반절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다.
공방에서 만든 대감도는 이 시대 기준으로 보면 명장(名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보도(寶刀)에 비견될 품질을 지닌 것이다.
무인이라면 애지중지할 보도가 저 꼴이 되어 나뒹굴고 있으면 이 시대 무인들이 생각할 것은 뻔했다.
그러니 여기에 싱싱한 시체 하나 가져다 놓고 얼굴만 위장하면 완벽하다.
“얼굴이나 바꿔 볼까?”
귀몰색마를 잡은 조가는 이제 사라져야 했으니 다른 얼굴이 필요했다.
눈앞에 화면을 띄워 놓고 게임 캐릭터 만들 듯 얼굴의 부분들을 조절한다. 그렇게 얼굴이 완성되자 만들어 놓은 얼굴대로 얼굴이 변형된다.
목소리도 바꾼다. 이번에는 좀 정상적인 목소리를 택했다.
- 리퍼, 갓 봉분한 무덤을 찾았습니다.
“어디야?”
농꾼의 안내를 따라 시체를 얻기 위해 발을 옮긴다. 그렇게 열심히 내달리는데 눈앞으로 화면이 뜬다.
백라장의 상황이다. 보이는 것은 노친네 둘, 그리고 아직 덜 늙은 중늙은이 둘이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알렸어야지!”
호통을 내지르는 건 노친네 중 하나인 백라장의 장로 우중원이다. 백라장주가 귀몰색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백천이 잡혀 있는 곳이 어디라고?”
“무창 팔분산 중턱의 하원장(霞阮莊)이라는 장원입니다.”
숙부의 질문에 내당주인 우극일이 냉큼 답했다.
“경공으로 내달리면 아침이면 도착하겠군.”
“숙부, 백천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백라장주 우극현이 우중원을 보며 물었다. 대답은 우중원이 아니라 옆의 우중근에게서 나왔다.
“왜, 형님과 내가 우리 집 장손을 죽여 없앨까 걱정되느냐?”
“그것이….”
우중근의 물음에 우극현은 말꼬리를 흐릴 뿐이다.
“아비란 놈이 자식을 그렇게 못 믿고 형산의 제자란 놈이 본산의 내공을 그렇게 못 믿느냐?”
“예?”
우중근의 말에 우극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생각을 해봐라. 백천은 초극 고수다. 편법으로 그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라 형산 정종의 내공을 익혀 제대로 된 단계를 밟은 초극 고수.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어지간히 정욕이 들끓어도 사리분간을 못 할 리 없다.”
“그 말씀은?”
“들키지 않았으면 모르나, 들켰음에도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은 평소 백천의 심성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짓 아니냐? 그 녀석이 익힌 색공이 형산의 정종 내공으로 보호되는 심성마저 비틀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는 말이다.”
우중근의 말에 우중원이 몇 마디 보탰다.
“색공의 시작은 대다수가 도가의 방중술. 그러기에 도가의 정종 내공을 만나면 자연스레 합류하지 저렇게 비틀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애초에 색마를 만들 목적으로 누군가가 만든 심법이라는 말이다.”
“강호의 색마 중에 정종 내공으로 단련된 초극 고수의 심성마저 비틀 능력을 지닌 자가 누가 있겠느냐?”
“미면나찰(美面羅刹). 그 망할 년밖에 없지.”
“미면나찰이라면?”
두 숙부의 연이은 말에 백라장주의 눈이 커졌다.
“섬서 흑천맹(黑栫盟)의 당대 맹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여중제일인(女中第一人)’이라고까지 불리는!”
“여중제일인은 무슨, 천하제일의 색마(色魔)지.”
백라장주의 말에 우중근이 툴툴거렸다.
“두 분 숙부님은 흑천맹주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백천을 타락시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우극일이 물었다.
“그 색마 년 목적이야 뻔하지.”
“키워서 잡아먹으려는 거야.”
“예?”
“정파의 후기지수가 타락해 색마가 되었어. 본산이든 어디든 체면 때문에 사실을 밝힐 수 없지. 그렇게 만들어 부담 없이 잡아먹으려는 거야.”
“복수하려 나서면 잡아먹힌 자의 명예를 더럽히게 되니 나설 수 없게 되는 거지.”
“그렇다면 지금 백천을 잡아 두고 있는 쪽이 흑천맹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백라장주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미면나찰은 아냐. 그년이 이렇게 친절할 리가 없지.”
“그러니 미면나찰이 채어가기 전에 빨리 구해야지. 형님과 나의 공력이라면 그 녀석이 쌓은 색공을 폐하고 형산의 정종 내공을 살려 낼 수 있을 게다.”
들을 이야기 다 들었으니 영상을 치웠다.
하오문의 반응이 이제 이해가 갔다. 미면나찰과 흑천맹이라면 하오문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다.
미면나찰이 누군가. 여중제일인이라고 불리는 흑도 거물 중의 거물이다.
당연히 그 무위는 천문위.
그녀가 거느린 흑천맹 또한 대단한 곳이다.
흑천맹이 위치한 곳은 섬서.
팔대문파의 둘인 공동(崆峒)과 화산(華山)이 버티고 서 있는 땅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흑도 세력이 흑천맹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장만 확실히 하면 되는 거네.”
내가 괜히 백라장을 지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무덤에서 시체를 파내 팔분산으로 갔다. 그렇게 위장을 마치고 팔분산에서 내려올 때다.
- 리퍼, 마*카*투 베타의 통신입니다. 받으시겠습니까?
사제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야?”
- 사형, 사형이 사람을 시켜서 이걸 보낸 것이오?
사제 장철상의 영상이 눈앞으로 한 권의 비급을 들이밀고 있었다.
회천대양신공!
미면나찰이 만든 색공.
형산의 촉망받는 기재인 우백천을 귀몰색마로 만든 색공이다.
저걸 왜 사제가 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