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절강행(68)
“남궁가의 세 숙질이 열람한 정보는?”
- 횡령 의심 대화 말고는 저쪽이 서생원 시리즈를 통해 알아낸 것은 없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농꾼 같은 인공지능의 도움이 없다면 서생원 시리즈가 만들어 내는 감시망은 21세기 으슥한 골목길의 CCTV와 다를 바 없다.
남궁세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생원들은 백 마리가 넘는다. 그 모든 화면을 사람 셋이서 완벽히 감시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뭐 그들 체내의 나노 머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모를까. 횡령 의심 대화도 농꾼이 눈에 잘 띄게 밀어준 탓에 찾을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침상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 뒤 그들의 방문 앞으로 갔다.
“이도연입니다.”
내 말에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이 대주, 무슨 일이십니까?”
셋 중 가장 어린 남궁호천이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당장 떠날 채비를 하시지요.”
“예?”
내 말에 남궁호천이 어리둥절한 눈이 되었다.
“마교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무슨!”
내 나지막한 말에 그 눈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바로 준비하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남궁호천이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안에서 연달아 대답이 터졌다. 죄다 초극 고수니 귀가 밝은 것은 당연했다.
남궁호천도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셋이 밖으로 나왔다.
한 무더기가 된 일행은 객잔을 나왔다. 우리가 있는 곳은 태평 부도. 장강을 넘고 이백여 리만 달리면 남궁세가가 있는 여주 부도다.
“장강을 넘을 배를 구….”
“세 분 다 초극 아닙니까?”
남궁호천의 말을 내가 끊으며 물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제대로 알고 계신 것 맞소. 나와 두 조카는 초극이오.”
내 물음에 남궁화청이 답했다.
“그럼 장강을 넘는데 별문제 없겠군요. 인적 없는 곳으로 가서 등평도수로 넘지요. 등평도수로 십 리를 달리는 것이 무리인 분 계십니까?”
태평 부도 근방의 장강 폭이 4km 정도 된다. 못한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당연하다. 남궁세가에서 작정하고 키운 검수들이 그 정도도 못 할 리 없다.
일단 태평 부도를 벗어나야 했다. 해 떨어진 밤인지라 부도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 성벽에 사람이 드나들 만한 개구멍은 없냐?
지역 흑도에서 야밤에 움직이기 편하도록 성벽에 은밀한 구멍을 뚫어 놓는 것이 보편적이기에 농꾼에게 물었다.
- 응 시리즈의 초음파 스캔으로 성벽을 훑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성벽을 타 넘는 수밖에 없다.
남궁가의 셋을 이끌고 성벽 쪽으로 움직였다. 남궁가의 뒷일을 처리하는 작자들답게 어둠과 그림자를 활용하여 능숙하게 몸을 숨긴다.
번초들의 눈을 피해 성벽 위를 기어오른다. 성벽 곳곳에 번을 서고 있는 군졸들은 여타 다른 지역과 달리 정병들이었다. 성인이 된 황태자가 머물며 통치 실습을 하기 위한 응천부(應天府)가 지척인 탓이다.
하지만 우리 일행들은 죄다 초극 고수, 번초가 정병이라 해도 그 눈을 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둠에 물든 성벽 위를 내달려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렇게 태평 부도의 성벽을 타 넘은 일행은 바로 검게 물든 강물 위를 내달렸다.
등평도수의 경공으로 장강을 넘은 일행은 인적 없는 강변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대주께서 발견한 마교의 흔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겠소?”
잠시 틈이 나자 남궁화청이 물었다. 뭐 숨길 것이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 농꾼, 놈들에 대한 정보를 넘겨.
- 예, 리퍼.
내 명에 농꾼이 움직이자 그들은 곧 마교 놈들에 대한 정보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나눈 대화와 그들의 현재 위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명두와 명옹이라. 확실히 마교 놈들이 아니면 쓰지 않을 호칭입니다.”
남궁산천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놈들 본가의 누군가에게 혈고를 쓸 생각입니다!”
남궁호천이 기겁을 했다.
“놈들이 숨어 있는 곳은 세가 내가 아니구려. 어떻게 찾은 것이오?”
두 조카와 달리 남궁화청이 차분하게 물었다.
“세가 내의 인원 중 평소와 달리 움직이는 인원을 확인했지요.”
내가 대충 놈들을 찾을 수 있었던 방법을 설명했다.
“사람이 셋이나 되는데 그쪽으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소.”
남궁화청의 자조에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오늘 남궁세가의 검술을 배운다고 당장 남궁세가의 검술로 세 분 중 한 분을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게 다 제가 세 분보다 오래 매를 다룬 덕입니다. 세 분도 익숙해지시면 가능한 일입니다.”
호신 강기를 사용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무리겠지만 호신강기를 억제하고 서생원 시리즈에 접촉한다면 나노 머신이 개입할 여지가 커진다. 그렇게 되면 내가 농꾼의 도움을 받듯 저들도 체내 나노 머신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약당 의원 중에 놈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면 놈들은 이번에 제조되는 청심단에 혈고를 섞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남궁호천의 말이다. 최근에 남궁세가에서 영약을 만든 모양이다.
“숙부, 호천의 추측대로라면 일이 급합니다. 청심단이 만들어지면 제일 먼저 누가 먹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가주가 혈고가 든 영약을 먹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청심단을 만들면 먼저 소가주가 시식하는 전통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산천, 네 말대로다. 호천, 네가 본가로 달려가 이번 일에 대해 가주께 고해라.”
조카들의 말에 남궁화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숙부.”
“잠시 기다리시지요.”
남궁호천이 막 자리를 뜨려는 것을 막았다. 세 숙질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바쁜데 왜? 하는 눈이다.
“염왕적의.”
내 말에 셋의 눈은 뭔 개소리야? 하는 눈이 되었다. 나는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절강에서 저에게 붙여 준 다른 별호입니다. 염왕과 맞설 정도로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리지요.”
명색이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다. 이번에 새로 청심단을 만들었다면 한두 개 만들지 않았을 터. 못해도 수십 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 혈고가 섞여 있는 약이 있다면 남궁가에서 세울 대책이라는 것은 뻔하다.
아깝지만 전량 폐기다. 그렇게 되면 청심단을 얻고자 하는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은 당연지사.
“청심단에 섞여 들어갔을지도 모를 혈고를 찾을 방법이 있다는 소리요?”
남궁화청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방법이 있다면 아까운 청심단을 폐기하지 않아도 될 일이니 눈을 반짝일 만했다.
“괜히 바쁜 분을 불러 세웠겠습니까?”
“이 대주에게 혈고를 찾을 방법이 있는 듯하니. 이 사실도 가주께 전해라.”
내 말에 남궁화청이 조카에게 말했다.
“예, 숙부.”
남궁호천이 대답과 함께 남궁세가를 향해 내달렸다.
“그럼 우리는 마교 놈들을 잡으러 가볼까요?”
***
열심히 달려 여주 부도에 당도했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탓에 여주 부도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쪽으로.”
남궁화청이 앞장섰다. 성벽을 따라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여주 부도는 남궁세가의 앞마당.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개구멍을 남궁세가에서도 만들어 놓은 듯했다.
남궁화청이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성벽을 더듬었다.
그르릉!
돌 미끄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성벽 아래의 땅이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렸다.
개구멍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관을 장치해 성벽 아래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행이 구멍 안으로 들어서자 다시 돌 미끄러지는 소리가 나며 구멍이 사라졌다.
통로는 상당히 길었다. 그리고 우리가 빠져나온 곳은 성벽 아래가 아니라 여염집의 곳간 같은 곳이다.
막 곳간을 나서는데 농꾼의 보고가 올라왔다.
- 리퍼, 놈들의 수가 늘었습니다.
초극 하나, 절정 넷이 초극 둘, 절정 열이 되었다.
= 더 있는 거 아냐?
한 번 늘어났다면 두 번도 늘어날 수 있기에 물었다.
- 근처의 인원이 합류한 것이 아니라 여주 부도 외부에서 들어온 자들입니다. 다른 인원이 있나 살피기 위해 그들이 온 방향으로 초음파 탐지를 실시했으나 다른 무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농꾼의 대답이다.
“마교 놈들의 수가 늘어났소. 초극 둘, 절정 열.”
“도망간다면 전부 잡기 힘든 숫자니 본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 말에 남궁산천이 남궁화청에게 묻는다.
“이 대주의 생각은 어떠시오?”
남궁화청이 내게 물었다.
“도망가면 도망가는 대로 좋은 일 아닌가 싶습니다만?”
내 말에 남궁화청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내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몇 명 도망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오.”
“아, 매로 추적을 할 수 있군요.”
남궁산천이 우리 둘의 말을 알아듣고는 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우리끼리 덮치기로 합의를 보고 놈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놈들이 숨은 곳은 부도 내 변두리의 허름한 객잔이었다. 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낭인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라 병장기를 가진 사람이 오가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곳이다.
우리 셋은 객잔 인근의 골목에 몸을 숨겼다.
“놈들이 숨은 곳은 어딘지 알겠습니까?”
“이 대주의 매가 알려 주고 있소.”
내 말에 남궁화청이 답하고 남궁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객잔 이 층의 객방 두 개를 사용하고 있는데, 지금 한 방에 초극 둘과 절정 넷이 모여 있었다. 다른 여섯은 옆방에서 쉬고 있는 모양새.
“초극이 있는 이 방부터 제압하지요.”
“본인과 조카가 먼저 들이치겠소. 놈들의 주의가 우리 쪽으로 몰리면 이 대주께서 다시 들이치시오.”
“시간차 공격을 하자는 말입니까?”
“그렇소. 대주가 들이칠 순간은 산천이 신호로 알려 줄 것이오.”
초극 둘을 먼저 사로잡자는 말이다. 다른 방의 여섯은 덤벼들면 모를까 도망가면 놔두자는 소리다.
“그렇게 하지요.”
우리들은 근처 건물의 지붕 위로 조용히 올라갔다.
두 숙질이 먼저 발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건물들 지붕 위를 달려 목표한 객방으로 들이쳤다.
파자작!
“습격이다!”
창이 박살나며 둘이 방안으로 들이치기 무섭게 경고성이 터진다.
캉, 카카캉, 카캉!
그리고 쉴 사이 없이 터지는 금속성. 객방의 창이고 벽이고 할 것 없이 난무하는 강기에 순식간에 박살났다.
방에서 시작된 싸움은 마교 놈들이 밖으로 튀어나오매 순식간에 객잔 앞 공터로 옮겨졌다. 옆방의 여섯은 습격자가 둘이라는 사실에 무기를 빼 들고 합류했다.
초극 둘과 절정 여섯이 객잔 앞에서 둘을 둘러싸는 모양새가 되었다.
박살 난 방에 있던 절정 넷은 남궁가 숙질의 습격에 당한 듯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객잔의 다른 손님들이 갑작스러운 난리에 머리를 내미는 것은 당연한 일.
“남궁세가의 일이다!”
여기에 남궁산천이 외쳤다. 관계없는 자들이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소리자 나에게 덮치라는 신호.
바로 발을 움직인다. 목표는 당연히 내 쪽으로 뒤통수를 내놓고 있는 초극 고수 둘.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두 놈의 등판을 향해 양손을 각기 뻗었다.
콰자자자작!
벽력에 뒤치기를 당한 두 명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파팍!
바로 그 둘의 마혈을 후려쳐 제압하고는 재빨리 그 둘을 확보한다.
초극 둘이 단번에 제압당하자 절정 여섯은 바로 도주했다. 여섯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는 것이다.
“어딜!”
남궁화청이 도망가는 한 놈에게 검을 던졌다.
“어억!”
놈이 입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꼬꾸라졌다. 남궁화청이 던진 검이 왼쪽 다리를 꿰뚫고 그대로 땅에 박힌 것이다.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남궁산천은 한 놈의 뒤를 바로 쫓았다.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절정 무인이지만 작정하고 쫓는 초극 고수의 발걸음에 이내 따라잡혔다.
“하압!”
놈이 발작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남궁세가에서 작정하고 키운 남궁산천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
타탕!
남궁산천이 그리는 검격에 놈의 검이 허공을 날고.
푹!
남궁산천의 검 끝이 요혈을 쑤시는 것으로 놈의 도주는 끝이 났다.
도망친 놈들은 넷.
= 죄다 벌레 붙여 놨지?
- 예, 리퍼.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놔 준 놈이 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