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절강행(65)
“허락할 수 없네. 위험 부담이 너무 커. 그리고 내가, 멸왜단이 찬성한다 해도 신창양가는 찬성하지 않을 것이고.”
진우탁이 고개를 흔들었다.
“남궁세가를 거절할 명분은 있으시고요?”
“각을 세우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 인간 이미 대책이 있으면서 나를 불렀다. 그리고 그 대책은 분명 나와 관련이 있는 방법일 터. 그렇지 않으면 나만 이렇게 따로 부를 리 없다.
“흐으, 후!”
심호흡으로 정신을 맑게 만든 다음 머리를 맹렬히 돌린다. 그리고 이내 진우탁이 부릴 만한 수작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남궁세가에 암중 세력의 손이 닿았을 수도 있다. 뭐 이러면서 거절하실 생각이셨군요. 그래도 동맹을 원한다면 검증을 받아라! 하면서 절 내세우실 작정이셨고.”
내 앞에서 명분이 없네, 방법이 없네 하고 징징거린 이유는 뻔하다. 내 생각을 그쪽으로 유도해서 내가 자발적으로 나서게 하려 한 것이다.
“뛰어난 식견. 자네가 여기 앉는 게 어떻겠나?”
진우탁이 배시시 웃으며 얼버무림을 시도한다.
“멸왜단 그만둘까요?”
어디 또 사람 발목을 잡으려고!
“농담일세.”
“하아!”
이 좋은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려야 하나라는 아쉬움에 한숨이 나온다.
“자네는 조사대를 결성해서 써먹을 일이 있는 모양이군?”
내 마음을 꿰뚫듯 말한다. 허투루 단주 자리 앉아 있는 양반이 아니라니깐.
“있지요.”
“그럼, 자네 말대로 하세. 남궁세가가 이쪽의 제의를 거부하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에라도 찬성하면 신창양가도 반대할 명분이 없어지네.”
검증에 찬성하면 남궁세가를 탈탈 털어서 뭔가 약점을 잡으라는 소리다.
그런데 진우탁이 저렇게 나온다는 것은 남궁세가가 동맹에 참여하는 것이 멸왜단에게 나쁜 일이 아니라는 말인데….
신창양가를 견제해야 할 일. 남궁세가는 찬성해도 신창양가는 반대할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멀리 보시는군요.”
지금 막 동맹이 결성된 때니 시일이 한참 흐르고 진행될 일이 될 것이다.
“좋은 기회 아닌가. 그러니 시도는 해봐야 된다 생각하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예.”
나중에 심신이 편해질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같이 가세나.”
진우탁이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진우탁과 함께 멸왜단을 찾은 남궁세가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
“오래 기다리셨소.”
진우탁이 들어서며 건넨 인사에 안의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간단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해한다는 듯 응대를 하는 것은 두 사람 중 사십대의 중년인이다.
“멸왜단에서는 이번 일에 어떤 결론을 내리셨는지요?”
“그 이야기는 여기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시오.”
중년인의 말에 진우탁이 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뇌응대주 이도연이라 합니다.”
“남궁가의 ‘상청’이라 하오. 이쪽은 내 조카인 강이고.”
남궁상청이 갓 스물이 되어 보이는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궁가 사람의 이름이 외자라는 것은 직계 혈족이라는 소리다.
대강의 인사를 한 다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남궁세가가 동맹에 합류하기로 한 소식은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소?”
내 말에 남궁상청이 물었다.
“동맹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시지요?”
“신창양가와 멸왜단의 분란을 조장한 암중 세력에 대처함이 아니오.”
“예,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있지요.”
남궁상청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한 뒤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행동에 남궁상청의 표정이 굳어졌고 남궁강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대주! 지금 그 말씀은 본가를, 우리 남궁세가를 믿을 수 없다. 그 말씀이시오!”
남궁강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런 남궁강을 한번 쳐다보고는 대답 대신 남궁상청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대주, 지금 본인이….”
“강아!”
남궁강이 목청을 키우자 남궁상청이 그의 말을 끊었다.
“숙부, 지금 보셨지 않습니까. 감….”
“좀 다물어라!”
남궁상청의 호통에 남궁강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꼴을 보니 경험을 위해 집안 어른이 달고 다니는 중인 것 같다.
“이 대주, 말씀을 하지 않으면 우리 남궁세가는 조카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소.”
남궁상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남궁세가는 정도팔문, 팔대문파와 함께 정도 무림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오대세가의 하나지요. 무림 정파 어디서 오대세가를 허투루 대할 수 있겠습니까만은, 제 목숨을 노렸던 사람들은 놈들의 수작질에 속은 신창양가의 협사들이었습니다.”
같은 오대세가 중 하나인 신창양가도 그 꼬라지가 났는데, 남궁세가라고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남궁세가가 이렇게 달려온 이유도 신창양가의 경우를 보고 위험을 느껴서 아닙니까?”
“그렇소.”
내 말에 남궁상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정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내 말에 남궁상청의 표정이 확연히 어두워졌다.
“큼.”
갑자기 들려온 기침 소리. 진우탁이다. 진우탁은 헛기침으로 시선을 모은 다음 입을 열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남궁상청이 급히 물었다.
“단주, 그 방법은 남궁세가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괜히 말해서 남궁세가와 얼굴 붉힐 일 만들어야겠습니까?”
“이럴수록 뭉쳐야 하는 법이다. 의심암귀(疑心暗鬼)의 수작에 넘어가 동도끼리 서로 분열한다면 놈들만 좋은 일을 시켜주는 꼴이지.”
내 말에 진우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단주!”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이 대주와 하시오. 내가 말한다 해도 이 대주가 안 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말이오.”
남궁상청의 재촉에 진우탁이 내게 모든 것을 떠넘겼다.
“대주.”
“방법은 간단합니다. 남궁세가에 놈들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을 검증하면 됩니다.”
“검증이라 하면?”
“남궁세가를 드나드는 모든 인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서 수상한 자들을 솎아 내는 거지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오?”
“남궁세가의 모든 거점을 감시하는 것은 무리지요. 하지만 핵심 거점을, 남궁세가 본가를 감시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같은 방법으로 신창양가에 숨어든 놈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때는 암중 세력에 대해서 모르고 신창양가의 수작으로 알고 있었던 터라 신창양가의 허락 따위 받지 않았었지요.”
내 말에 남궁상청의 얼굴이 핼쑥해진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남궁세가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말과 다름없으니 당연했다.
단순하게 허풍이라 생각할 수도 없다. 육가장과 신창양가라는 사례가 있었다.
멸왜단이 보타산 속가를 동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력을 비교하면 육가장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결과는 육가장의 항복이다. 아니 육가장이 멸왜단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강남 흑도맹을 결성할 정도다.
신창양가를 노린 암중 세력의 경우는 어떤가. 천문위인 가주를 살해할 정도로 은밀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인 자들이었다. 하지만 멸왜단을 적으로 돌리기 무섭게 끝장나지 않았나.
이런 결과가 나오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내 말을 도저히 허풍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본인이 판단하여 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구려. 가주께 여쭙고 답을 드리리다.”
객청에 남궁세가의 사절단을 남겨 두고 진우탁과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밑천을 다 까발려도 되는 것인가?”
단주 집무실로 돌아가는 중에 진우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좋아 죽으려는 거 다 표 나거든요?”
진우탁의 말에 내가 뚱하니 답했다. 항주 흑도의 일로 매의 색출 능력은 이미 소문이 났으며, 육가장의 일과 신창양가의 일로 감시 능력도 알음알음 소문이 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언젠가는 소문이 날 일. 널리 소문이 나면 온갖 잡놈들이 내 능력을 노리고 몰려올 터. 그 전에 잡놈들이 범접치 못할 정도로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랬나?”
진우탁의 얼굴이 언제 걱정이 서려 있었냐는 듯 환해졌다.
진우탁 정도의 인물이 내 그런 속셈을 읽지 못했을 리 없다. 내가 세우는 울타리의 핵심이 멸왜단임을 모를 리 없고 말이다.
“어쨌든 자네의 능력을 그렇게 까발린 덕택에 남궁세가는 곧 동맹에 들어오겠군.”
남궁세가를 들여다보는 것은 남궁세가의 허락이 아니라 내 마음이라는 소리를 면전에서 했다.
내 뒷배가 약했으면 바로 남궁세가의 전력이 칼 뽑아 들고 달려올 소리. 하지만 내 뒷배는 멸왜단을 비롯한 절강 무림 전체다.
그러니 남궁세가의 선택은 뻔하다. 어차피 감시당할 것이라면 검증을 핑계로 허락을 해주는 것이 나았다. 가문에 혹시라도 암중 세력의 손길이 닿은 곳이 있다면 찾아내 솎아 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다음날, 객청의 남궁상청이 다시 진우탁과 나를 청했다. 전서구를 날려 답을 받은 모양이다.
“가주께서 조건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남궁세가의 반응은 예상대로다.
“가주께서 큰 결심을 하셨군.”
남궁상청의 말에 진우탁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 대주.”
“그럼 이것을.”
진우탁의 부름에 나는 준비해 온 명단을 남궁상청에게 넘겼다.
“이것은?”
명단을 살피던 남궁상청의 눈이 커졌다.
“그 인원들을 이쪽으로 불러 주시겠습니까?”
“연유를 알 수 있겠소?”
남궁상청이 물었다. 왜긴 왜야 그 작자들이 남궁세가에 배치된 나노 머신들의 숙주, 수확 대상자들이기 때문이지.
“남궁세가와 저 사이의 연락을 담당할 인원들입니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준비해 둔 핑계를 꺼냈다.
“이들이 선택된 까닭을 알고 싶소.”
남궁상청이 안색을 굳히고 물었다. 내가 건넨 명단에 있는 셋은 남궁세가 내에서도 가문의 중진들 몇을 제외하고는 존재를 모르는 자들이었으니 말이다.
“남궁세가에서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남궁세가에서 은밀히 키운 자들, 세가의 숨은 검들이니 당연했다.
“본가의 대답 이전에 검증을 시작했었던 것이오?”
남궁상청이 불쾌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감히!”
남궁강이 발끈하며 목청을 돋웠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강아!”
“숙부님, 이걸 참아야 합니까! 이건 본가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방증 아닙니까!”
남궁상청이 말리자 남궁강이 분통을 터트렸다.
내가 측은한 눈길로 남궁상청을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파악도 못 하는 애송이를 달고 다니는 고생이라니.
“네 일은 이 숙부의 일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 숙부가 하는 일을 옆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다!”
남궁상청의 호통에 남궁강은 이를 악물었다. 남궁상청이 그렇게 애송이의 입을 닥치게 만들자 내가 입을 열었다.
“멸왜단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아주시지요. 그리고 이미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후우.”
내 말에 남궁상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멸왜단이 어떻게 육가장을 이겼는지 잘 알겠구려. 허, 진짜 앉은 자리에서 천 리 밖을 보다니.”
남궁상청이 그렇게 탄성을 터트렸다.
“살펴서 아시겠지만, 이들은 쉬이 밖으로 내돌리기 힘든 전력들이오.”
“그러니 이들이 움직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움직임을 몰라야 하는 자가 이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보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들의 움직임 그 자체가 불온한 생각을 가진 자들을 솎아 낼 방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 명이 한 번에 움직일 필요도 없습니다. 한 명씩 교대로 보내셔도 됩니다.”
“교대로 보내도 된다면 그냥 셋 중 하나를….”
“셋 다 제가 직접 만나 봐야 합니다.”
바로 남궁상청의 말을 끊었다. 어디 내 평온한 수확을 방해하는 수작을!
“그래야 매와 교감할 사람을 정할 수 있습니다.”
“매와 교감할 사람이라니 무슨 소리요?”
내 말에 남궁상청이 놀란 눈이 되었다.
“남궁세가 입장에서는 제 말만 믿기 힘들 것 아닙니까? 그러니 저와 같은 것을 보고 듣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매의 능력을 확실히 보여줘서 남궁세가를 확실히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 자네 너무한 거 아닌가! 우리 멸왜단은!
진우탁이 전음으로 징징거렸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