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퍼 - 무공수확자-75화 (75/175)

75화

절강행(54)

“세가의 혈족 명부를, 그것도 원본의 열람을 원하신단 말이오?”

양심관이 내 말에 인상을 있는 힘껏 찌푸리며 물었다.

“들으신 바 대로입니다.”

고개를 끄덕여 잘못들은 게 아니라고 확인해 준다.

“세가의 혈족 명부는 사본이라도 외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물건인데, 그 원본이라니 너무 과한 요구가 아니오?”

혈족 명부에는 혈족이 어디서 어떤 일에 종사하는지 나와 있다. 즉 그 세가의 힘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적에게 유출되면 세가 공략의 단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뿐이랴. 지난 혈족들의 행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명망 있는 자는 기리며 추모하고, 망종들은 그 악행을 상세히 적어 놓아 후손들에게 경고한다. 명부를 통해 어린 혈족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가문의 명성에 먹칠하는 짓을 하면 살아생전 잠시 욕먹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혈족 명부에 기록이 남아 대대손손 욕을 처먹으니 처신 잘하라고….

무림세가의 혈족 명부라는 것은 그런 성격의 것이기에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쪽은 분명히 양가창법을 쓰는 신창양가의 혈족에게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귀가에서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니 혈족 명부를 봐서라도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본은 옮겨 적는 와중에 조작 가능하니 원본을 보겠다는 것이다.

“본인이 뭐라 답을 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오.”

내가 완고하다 싶으니 그냥 답을 회피해 버린다.

“그럼,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야지요. 언제 돌아가실 겁니까?”

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같이 가서 신창양가의 가주에게 직접 청하겠다는 소리다.

“하아.”

양심관이 질린 얼굴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종일 양심관과 동행하다 거처로 돌아오니,

“대주 도화도주께서 찾으십니다.”

도화도주가 나를 찾았다. 도화도주에게 내 준 거처로 향한다.

“양가의 혈족 명부 원본을 보겠다고 했다던데?”

진우탁을 직접 보기 껄끄러운 양심관이 황학약에게 징징거린 모양이다. 뭐 신창양가를 추궁하는 서신에 황학약이 괜히 이름을 올린 것이 아니다. 제3세력의 수작일지도 모르는 상황. 조사차 영파부로 온 신창양가 인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그의 이름이다.

“세가의 혈족을 찾는 일에 이보다 빠른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가 직접 양주로 가야 할 텐데?”

혈족 명부의 사본도 아닌 원본을 외부로 내돌리지는 않을 터. 그것을 열람하려면 신창양가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럴 생각입니다.”

“자네 매가 습격자를 쫓고 있다 했지 않았나? 그쪽에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떤가?”

“대비가 상당하더군요. 현 상황에서는 종적을 놓친 상태입니다.”

“양주로 가겠다는 건가?”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신창양가에서 격하게 반응할 수도 있어.”

“그러면 서로 피 보는 거지요. 격하게.”

일단 신창양가가 관련되었다는 증거가 분명한 상황이다. 신창양가에서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진우탁이, 멸왜단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

영파 부도에서 신창양가가 있는 양주 부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항주만을 건너 가흥부에서 진강부로 이어진 운하를 타는 것이다. 진강 부도에서 장강 하류를 건너면 바로 양주 부도니 말이다.

복귀하는 신창양가 인원을 따라 양주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멸왜단 인원은 나 하나. 호위를 붙이려는 것을 내가 거부했다. 내가 호위에게 기댈 정도의 일이 터진다면 호장우 정도는 되어야 도움이 된다. 그런데 붙여 준다는 호위라는 것들이 뇌응대의 수하들이었으니….

녀석들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혼자 움직이는 것이 옳았다.

배가 상주부를 빠져나갈 때까지 선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흥부에서 상주부까지 육가장의 세력권이고, 나는 육가장의 원수다. 아무리 육가장이 지금 멸왜단과 싸울 여력이 없다지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감정으로 움직이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다. 혹여 그런 놈들과 마주치면 피곤해질 게 뻔하기에 몸을 사렸다.

= 신창양가에는 수확 대상자들이 몇이나 되지?

이번 일을 처리하면서 겸사겸사 수확도 할 생각이다. 일이 좋게 해결되면 대화로 해결되는 뒤끝 없는 수확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일이 안 좋은 쪽으로 진행된다 해도 전장에서 강제 수확이 가능했다.

- 지금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한 명입니다.

= 한 명?

세가의 무공은 그 혈족들의 체질에 맞춰서 발달해 왔다. 그런 탓에 혈족이 아니면 같은 재능으로 같은 노력을 했다 해도 그 성취가 혈족을 따르기 힘든 단점이 있다.

그런 탓에 세가에 배정되는 나노 머신이 정도 팔대 문파를 비롯한 다른 명문 거파보다 적기는 했다. 하지만 체질만 맞으면 속성도 가능하기에 21세기 헌터들에게 제법 수요가 있는 것이 세가의 무공들이다. 거기다가 세가에 혈족을 위한 무공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 세 명 아냐?

- 다른 두 명은 초극 이후로 행적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초극 지경에 이르면 호신강기로 인해 통신 두절이 일어나니 그 행적은 무림의 소문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 천문위냐?

- 신창양가의 천문위는 전대 가주와 현 가주입니다. 둘 다 수확과는 무관합니다.

초극이라는 소리다.

= 누군데?

- 가주의 조카인 양언직입니다.

시야 한쪽에 양언직의 프로필이 떴다. ‘천룡창(踐龍槍)’이라는 살벌한 별호를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 신창양가에서 부린 수작이면 이 녀석이 범인일 가능성이 있는 거 아냐?

습격자가 진우탁의 사자후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모습이 떠올랐기에 하는 소리다. 당시의 나처럼 체내의 나노 머신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가능한 일이다.

- 양언직과 습격자의 체형이 다릅니다.

축골공을 사용해 골격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화인천도 나름 초극 지경의 고수다. 축골공을 유지하기 위해 공력과 신경을 소모하고 있는 상대에게 그렇게 형편없이 깨질 정도는 아니었다.

선실에서 농꾼과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막 상주부를 빠져나갔다 싶었는데….

- 리퍼, 초극 고수가 접근 중입니다.

농꾼의 경고와 함께 화면이 떴다. 맞은편에서 배 한 척이 접근하고 있었다.

초극 고수 둘이 타고 있는 배다. 내가 탄 배와 같은 형태의 쾌속선. 선수에 나풀거리는 표기도 같다. 신창양가에서 온 배라는 말이다.

마중이라도 나온 것인가? 아니 그전에.

= 신창양가 내의 초극 고수들에게 벌레 붙인 거 아니었어?

신상 파악도 안 되었기에 물을 수밖에 없다.

- 서생원 시리즈 배치 이후 신창양가의 장원에 출입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냥 응 시리즈 하나 보내서 양주 전역을 훑어 모든 초극 고수들에게 벌레를 붙였어야 했나?

= 양주 도착하면 응 시리즈로 한번 훑어서 초극 고수들 파악하고 다 붙여 놔.

- 예, 리퍼.

두 배가 서로 맞닿은 것은 일각이 흐른 뒤였다.

“자네들이 여긴 어쩐 일인가?”

양심관이 다른 배에 탄 둘을 보고 물었다. 양심관 앞에 얼굴을 내민 자들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쌍둥이였다.

“가주의 명을 받아 멸왜단의 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둘 중의 하나가 답했다.

“자네들이?”

그 말에 양심관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가주의 명이 있었습니다.”

“허, 가주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양심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화면을 시야 구석으로 치우고 선실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본가에서 마중을 나왔소.”

내 물음에 양심관이 답했다.

“멸왜단에서 오신 분이오?”

양심관과 대화를 나눴던 자가 물었다.

“뇌응대를 맡고 있는 이도연입니다.”

“아, 벽력응주의 이름은 많이 들었소이다. 신창양가의 양묵일이오. 이쪽은 내 동생인 양묵월.”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견문이 짧아서 두 분의 명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오. 우리는 가문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아 이렇다 할 명성이 없으니 말이오.”

내 말에 양묵일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묵자 돌림이면 신창양가의 현 가주와 같은 항렬의 서얼들이라는 소리다.

어쨌든 신창양가 출신에다가 초극 고수, 거기다 쌍둥이다. 무림에서 유명해질 조건을 갖췄는데 대외적으로 퍼져 있는 신창양가의 인물 목록에 없을 정도로 이름이 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양심관의 부정적인 반응.

그것들을 대강 조합해 보면 이 작자들은 신창양가의 구린 일을 맡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멸왜단의 손님께서는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시오?”

“무슨 연유로 그러십니까?”

“가문에 당도하기 전에 사전 조율을 원하는 분이 계시오.”

“사전 조율이라면?”

“가문에 들어서면 아무래도 눈과 귀가 많아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이야기를 할 수 없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요. 그런데 저쪽 배에 계신 겁니까?”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 눈을 피하기에는 배만큼 좋은 곳이 없다. 그런데 굳이 다른 곳으로 사람을 부른다?

저 둘을 상대로 칼질할 확률이 올라가는군.

“그럼, 안내를 부탁드리지요.”

양묵일의 배로 넘어갔다.

“손님은 우리가 모실 터이니 부당주께서는 먼저 복귀하시지요.”

그렇게 잠시 물길 위를 같이 흘러가던 두 배가 갈라졌다.

양심관이 탄 배는 물길을 따라 계속 흘러갔고, 내가 갈아탄 배는 뭍을 향했다.

나루터도 없는 강변에 배를 댔다.

“따라오시지요.”

양묵일이 앞장섰다. 내가 그 뒤를 따르자 양묵월이 내 뒤를 쫓았다.

이각 정도 지났을까? 묵묵히 앞장서던 양묵일이 발걸음을 멈췄다. 기다리는 사람 따위 없는 공터다.

“양 대협, 여기가 목적지입니까?”

내 물음에 양묵일이 말없이 뒤돌아서 나를 향해 창을 겨눴다.

뒤를 힐끔 보니 양묵월도 마찬가지로 창을 빼들고 있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양가의 주인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답니까? 신창양가와 절강 무림이 충돌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내가 칼을 뽑아 들며 물었다.

쉭!

대답 대신 창날이 날아왔다. 목을 노리는 창날. 하지만 간을 보겠다는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 수법인지라 칼을 휘둘러 가볍게 쳐냈다.

창! 차르릉!

금속성이 울리며 창날이 회전하며 칼을 휘감는다. 그와 동시에 양묵월이 움직였다. 등판을 노리고 짓쳐드는 창날.

양묵일이 내 칼을 묶어 두고 양묵월이 그 틈을 쑤신다. 간단하면서 효과적인 협공이다.

하지만 이렇게 날로 먹히기에는 내 손에 죽은 초극 고수들이 좀 많다.

캉!

빈손을 금속 코팅하며 창날을 쳐낸다.

파자작!

동시에 내 손에서 벽력이 친다.

한 번 더 쑤시려던 양묵월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전격에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우우웅!

동시에 내 칼이 날을 떨며 강기를 토했다. 이에 양묵일의 창도 강기를 토하니!

카앙!

강기와 강기의 힘이 반발력을 일으키니 칼과 창이 서로를 밀어내며 튕겨 났다.

내가 배터리 용량을 괜히 늘린 것이 아니다.

파자작!

벽력이 다시 한 번 쳤다. 이번에는 양묵일을 향해서다.

“허!”

양묵일이 허공으로 튀어 올라 뒤로 재주를 넘으며 크게 물러섰다.

나는 그 틈에 발을 움직였다.

촤아악!

기다렸다는 듯 피풍의가 펼쳐졌다.

“놈이 도망친다!”

양묵일의 외침이 터졌을 때 내 몸은 이미 십여 장은 내달리고 있었다. 앞뒤로 협공당하는 자리에 멍청하게 그냥 서 있는 취미 따위 없으니 당연하다.

그렇게 그대로 내빼려는데,

파파팡!

바닥이 갑자기 치솟으며 내 앞을 막았다.

쉬쉬쉭!

동시에 날카로운 기세가 내가 내디뎌야 할 바닥에서 치솟았다.

캉, 카카캉!

금속성과 함께 내 칼이 전면을 향해 큰 호를 그렸다.

촤앙!

내 앞을 막은 흙무더기가 금속성을 토해내며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한 무더기의 빛살이 나를 맞이했다.

카카카카캉!

창과 칼이 순식간에 격돌했다.

“젠장!”

입에서 욕이 나온다. 어쨌든 내 발은 멈췄고, 그 틈에 양 씨의 쌍둥이들이 내 후방 좌우로 도착했다.

“땅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군.”

땅속에 숨어 있었던 것은 내 전방을 막아선 초극 고수 하나만이 아니다.

내가 금속 코팅한 발로 짓밟은 창의 주인들과 내 앞을 막은 흙무더기로 덮은 쇠 그물을 일으킨 자들, 절정으로 보이는 여덟이 더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 새로운 초극 고수가 접근 중입니다.

농꾼이 화면을 띄었다. 이쪽과 정 반대 방향의 땅속에서 초극 하나와 절정 여덟이 기어 나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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