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퍼 - 무공수확자-72화 (72/175)

72화

절강행(51)

“야, 나는?”

“부대주들끼리 오붓하게 한잔하러 가는 겁니다. 대주님이 끼실 자리가 아니지요.”

경철운이 눈을 부라렸다.

“그렇지. 대주가 낄 자리가 아니야.”

진혜예가 눈을 흘겼다.

“그렇다는데요.”

화인천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화인천의 폐관 수련은 팔 일만에 끝났다. 철검화가 예단심공의 공력은 귀원공으로 전환되어 무사히 안착했고, 지금은 그 축하를 위해 한잔하러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따돌린다. 이유가 없지는 않다. 육가장과의 전쟁이 막 끝난 터다. 이리저리 자잘한 업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쟁 중에 푹 쉰 경철운과 진혜예에게 모든 업무를 떠밀었으니 둘이 삐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너무하잖아!”

진짜 나를 두고 떠나는 셋의 뒷모습을 보며 푸념을 하는데, 화인천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 반 시진 정도 뒤에 진자루(眞炙樓)로 나오세요. 그 사이 제가 어떻게든 진 누님과 경 형님 마음을 풀어 놓을 테니.

- 그래, 역시 동생밖에 없다.

화인천의 전음에 전음으로 답하고는 시간이 되길 기다린다.

반 시진은 후딱 지나가서 막 일어나려는 찰나.

- 리퍼, 급보입니다. 육가장에 신원 불명의 초극 고수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현 시간부로 열이 넘었습니다.

농꾼의 보고가 귀를 울렸다.

육천경과 육천동이 육진성의 강요로 자살한지 보름이 지났다.

둘의 자살은 상식적인 선으로 소문이 났다. 멸왜단과의 전쟁에서 가문이 막대한 피해를 보자 그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쨌든 육가장의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인지.

= 소주 육가장에 열이 넘는 초극 고수가 방문했다고?

- 예, 리퍼. 각기 다른 세력으로 보였습니다.

농꾼이 소주 육가장의 정문 화면을 눈앞에 띄웠다. 그리고 오늘 하루 방문자들을 보여줬다. 초극 고수가 대표고, 그 일행들이 적게는 열에서 많게는 스물이었다.

꿈틀이의 초음파 스캔 데이터가 떴다. 정문을 통과한 열 무리의 사람들은 못해도 일류로 분류될 단련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꿈틀이들의 도청으로 곧 알 수 있었다.

= 남직례 흑도들이라고?

남직례의 여타 흑도들과 육가장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다. 흑도 유일 세가로 불리는 육가장이다. 그 강대함에 먹혀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로 하여금 육가장과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회합이라니!

참가한 흑도 세력이 열이 넘어가고 있다. 아니, 도청 내용을 보면 남직례의 굵직한 흑도들은 죄다 모인 격이다.

“야, 농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회합 장소가 육가장이다. 육가장이 이 모임을 주도했다. 그런데 육가장에 21세기의 최첨단 감시망을 깔아 놓았던 내가 저들이 모이기 전에 몰랐다는 게 어이가 없다.

- 감시 데이터를 검토하고 있지만, 이번 회합에 대한 이야기는 찾을 수 없습니다.

농꾼도 만능이 아니다. 육가장 측에서 자신들이 감시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수를 쓴 것이다.

나 혼자 알고 말 일이 아니었다. 육가장이 저렇게 남직례 흑도들을 끌어모아 하려는 짓이 무엇이든 간에 멸왜단은 얼마 전에 육가장과 전쟁을 치른 사이. 이런 일은 알려야 했다. 그래서 단주인 진우탁을 찾아갔다.

“단주, 뇌응대주입니다.”

“들어오게.”

멸왜단주 집무실로 들어가자 진우탁이 나를 뚱하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육가장 쪽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직도 육가장을 감시하고 있었나?”

내 말에 진우탁이 질린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흑도 유일 세가 아닙니까?”

“괜한 걱정하고는.”

진우탁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육가장이 무슨 심상치 않은 짓을 벌였기에?”

“남직례 흑도를 끌어들였습니다. 남직례 굵직한 흑도의 중진들이 지금 육가장에 모여 있단 말입니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진우탁의 모습에 내 언성이 높아졌다.

“오늘 이전에는 몰랐던 거군. 매로 감시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진우탁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깜짝 놀란 거군. 깜짝 놀라서 머리가 굳어진 거고.”

별일 아닌데 내가 호들갑을 떤다는 반응이다.

“…….”

나는 말없이 진우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직례 흑도들도 만만치 않지. 다 합치면 초극 고수의 수는 육가장보다 많을 걸세. 천문위가 없지만 말이야.”

진우탁이 싱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하나로 뭉쳤을 때 이야기고. 각기 지역에서 힘주고 다닌다지만 실상은 초극 서넛, 많으면 대여섯이 손을 잡고 사람을 끌어모은 널리고 널린 흑도방파일 뿐이지. 육가장은 그 점을 파고든 거네.”

이번 일을 핑계로 끌어모았다는 소리다. 항주 흑도가 멸왜단을 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육가장이 당했다. 제대로 뜯겼다. 다음은 어디일 것 같으냐? 육가장이라 안 망하고 버텼지 너희들은 어떨 것 같아? 뭐 이런 소리로 말이다.

“그들이 어떻게 모였냐가 아닙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육가장이 그렇게 얻은 힘으로 다시 전쟁을 시작하지 않겠냐는 것이지?”

“예.”

“우리와 전쟁을 해서 육가장이 얻을 것이 있나? 육가장이 노릴 만한 것은 항주의 이권인데 이게 쉽지 않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 멸왜단이나 보타산 속가를 항주 흑도와 분리해서 항주 흑도만 상대해 승리하고 항주의 이권을 얻었다 하세. 그 이권을 온전히 육가장이 가져갈 수 있다 보나? 열이 넘는 남직례 흑도와 나눠야 해.”

전쟁을 택하지 않으면 육가장은 절강 무림의 북상을 막기 위한 방패를 자처해서 남직례 흑도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열 곳이 넘는 굵직한 흑도들의 금전 지원은 이번 일로 휘청이는 육가장의 재정을 빠르게 회복시킬 것이다.

그리고 남직례 흑도들이 끌어 주는 인적 자원들로 무너진 외당을 복구할 수도 있었다.

“전쟁을 할 이유가 없군요.”

“해도 이길 수도 없지. 저쪽이 전쟁을 시작하면 협정 파기가 되니 보타산 속가들이 나설 명분이 되거든.”

생각해 보니 보타산 속가에는 진우탁을 제외해도 천문위가 둘이나 더 있다.

“거기에 이번 일에 끼지 못해 입이 튀어나온 신창양가가 반색을 하며 달려들 게 뻔하거든.”

협정을 깨면 절강 무림뿐만 아니라 육가장이 관리하는 운하를 노리는 신창양가까지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애초에 우리는 명분일 뿐이고 육가장은 신창양가를 견제하기 위해서 남직례 흑도를 끌어들인 거란 말입니까?”

“그런 거네. 우리에게 당한 그대로 있었다면 신창양가가 운하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 찔러 볼 게 뻔하니 말이야.”

세가 줄어 위험에 노출되기 무섭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남직례 흑도를 끌어들여 방패로 써먹는 것도 부족해서 그들의 돈으로 회복을 꾀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괜히 흑도 유일 세가가 아니군요.”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그걸 앉은 자리에서 파악하고 있는 당신도 못지않아!

시야 한쪽의 화면에서는 육가장의 주인인 육진성이 강남 흑도맹의 결성을 선포하고 있었지만 이제 관심 밖의 일이다.

이야기를 끝내고 일어서려는데 농꾼의 보고가 날아들었다.

- 리퍼, 신원 불명 초극 고수의 습격입니다.

갑자기 내 눈앞에 떠오르는 지도. 총타 밖, 영파 부도의 성안 한 곳에 붉은 점이 찍혔다.

영파부에 자리 잡고 있다지만 멸왜단의 일은 왜구 관련 일이다. 치안 유지나 여타 일은 영파 부도를 담당하고 있는….

“젠장!”

현장을 보여주는 화면에 내 입에서 욕이 튀어 나왔다.

대로에서 죽립을 뒤집어쓴 창잡이와 싸우고 있는 것은 뇌응대의 부대주들이었다. 창잡이가 노골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은 진혜예. 초극인 화인천까지 낀 삼대일의 싸움이지만 부대주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바로 튀어 나가려는데 강한 힘이 팔목을 움켜쥔다. 진우탁이다.

“무슨 일인가?”

내가 갑자기 욕을 하며 튀어 나가려 하자 잡고 묻는 것이다.

“진 누님이 위험해요!”

“어디냐!”

내 답에 진우탁이 얼른 잡은 팔목을 놓으며 묻는다.

“저쪽!”

내가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기 무섭게 그의 몸이 튀어 나간다. 나 역시 바로 그 뒤를 따랐다.

피풍의가 전개되며 바로 그의 등에 올라탔다.

“무슨….”

내 행동에 진우탁이 무슨 소리를 하려 했지만 내 입이 더 빠르다.

“제가 업히는 게 단주님 혼자 뛰는 것보다 더 빠릅니다.”

내 말에 진우탁은 바로 입을 닥치고 바닥을 박찼다. 뛰어난 경공을 지닌 무림인답게 길 따라 달리는 것보다 건물 위를 달린다.

= 현장까지 일직선으로!

- 예, 리퍼.

달려야 할 방향으로 화살표가 그려진다.

“이대로 직진이요!”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며 외치니 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후렸다.

작정하고 달리는 천문위의 등에 날개를 달자 그 속도는 가공할 정도다.

순식간에 총타 담벼락을 벗어나 영파 부도의 성벽을 향해 내달린다. 성벽에 도착하는가 싶더니 이미 성벽을 넘고 있다.

도착까지 앞으로 수십 초. 하지만 응 시리즈의 눈으로 파악한 현장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창 자루에 처맞은 경철운은 허공을 날고 있었고, 화인천은 복부를 피로 물들이며 쓰러져 있었다.

놈의 창은 이제 진혜예를 노리고 움직였다. 귀원공을 통해 이제 제대로 된 초극 고수라 할 수 있는 화인천까지 쉽사리 쓰러트린 놈이다. 절정 무인인 진혜예가 홀로 버티는 것은 무리.

창이 몇 번 움직이자 진혜예의 손에서 검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번뜩이는 창날이 진혜예의 가슴을 무심하게 찔렀다.

젠장!

정확하게 심장이다.

진혜예가 피를 뿜으며 쓰러지자 놈이 그 앞으로 다가가 여유롭게 창을 쳐들었다.

빌어먹을 확인 사살이다.

“단주, 사자후! 뭐든 천문위의 위세를 드러낼, 적을 멈추게 할 만한 일을….”

내 급박한 요청에 진우탁이 바로 반응했다.

휘잉!

내 몸이 진우탁의 등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던져진다. 진우탁이 나를 앞으로 힘껏 던진 것이다.

그러고는 바로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어헝!

천문위의 공력이 힘껏 담긴 사자후가 공간을 후려 패듯 뒤흔든다.

그 울림이 내 정신을 휘어잡고 급격하게 밑으로 끌어당긴다.

몰아지경에 강제적으로 빠져들려는 순간 찌릿한 전기 충격이 전신을 내달렸다.

농꾼이다. 농꾼의 도움으로 진우탁의 사자후에서 벗어나 계속 내달린다.

“저 새끼 뭐야?”

천문위가 내지른 사자후의 영향으로 시야 안의 모두가 행동을 멈췄는데 놈은 아니었다.

사자후가 터지기 무섭게 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앞서 달리는 나와 사자후를 쓰느라 잠시 뒤처진 진우탁을 발견했다.

달려오고 있는 우리 둘을 보기 무섭게 죽립의 창잡이는 바닥을 박차고 바로 내뺐다.

= 농꾼, 응5로 추적!

- 예, 리퍼.

응 시리즈 중 하나를 동원해 놈을 추적하게 하고는 전력을 다해 진혜예에게 달려갔다.

“스캔해!”

도착하기 무섭게 그녀를 안아 들고 상태를 살폈다.

- 심장 파열입니다. 216초 안에 산소 공급을 재개하지 않으면 뇌 손상이 일어납니다.

농꾼의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진우탁이 도착했다.

“예아야!”

진우탁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진혜예를 빼앗기며 바로 내동댕이쳐졌다.

씨발놈의 천문위!

바로 몸을 일으키는데 눈앞으로 숫자가 흐른다. 뇌손상을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단주, 시간 없습니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누님 진짜로 죽습니다!”

“살릴 수 있단 말이냐?”

내 말에 진우탁이 놀란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천문위의 예민한 감각이 이미 딸의 몸에서 생명의 박동을 찾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살리고 싶다면 비켜요!”

내 외침에 진우탁이 재빨리 진혜예의 몸을 내게 넘겼다.

“멍하니 서 있지 마시고 다른 두 사람의 상처나 봐 주시죠.”

내가 이쪽저쪽에 널브러진 화인천과 경철운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네.”

내 말에 진우탁이 바로 움직였다.

= 어떻게 해야 해?

바로 화면이 떠오른다. 나는 농꾼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진혜예의 상처에 바로 왼손을 쑤셔 박았다.

빠각.

뼈를 부수고 들어간 손이 창날에 박살난 심장을 움켜쥔다. 심장 치료는 농꾼에게 맡기고, 나는 공력을 일으켜 기로 막을 형성했다.

기로 형성한 막은 수동 호흡기의 형상이다. 그걸 움직여 진혜예의 몸에 공기를 공급한다.

진혜예의 몸속에서는 금속 이온을 활용해 인공 심장을 생성했다. 인공 심장이라 해봐야 그냥 피가 흐를 수 있고, 거기에 펌프질을 할 수 있는 단순한 구조다.

어쨌든 진혜예는 그렇게 간신히 살렸다.

“후우.”

파열된 심장을 농꾼이 땜질한 후 그 뒤처리를 했다. 손을 넣기 위해 부러트린 뼈를 붙이고 진혜예의 가슴에서 손을 빼냈다. 창날과 손이 들락거린 상처를 진혜예의 머리카락으로 봉합한다.

당장 생살을 뚫을 바늘이 없다? 나에게는 초극에 이른 공력이 있다. 머리카락에 공력을 주입하면 사람 살 꿰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렇게 처치를 끝낸 후 몸을 추스르고 있는 경철운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양가창이었다.”

“뭐가?”

“놈이 쓴 무공. 신창양가의 양가창법이었다고!”

아나! 이건 또 뭔 소리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