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퍼 - 무공수확자-69화 (69/175)

69화

절강행(49)

육진성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리고 발을 옮겼다.

내가 할 말은 다 했다. 선택은 이제 저 양반이 하는 거다.

수백이 넘는 혈족을 책임지는 육가의 가주로 아들놈 희생해서 가문을 살리느냐, 아니면 아들놈 하나 살리기 위해서 가문을 몰살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느냐의 선택이다.

이번 협정이 무산되면 절강 무림을 동원하면 된다. 절강 무림은 왜구라는 족쇄를 벗겨 줄 나를 버리지 못한다. 거기에 명분은 내 쪽에 있다. 피 적게 흘리자는 내 제안을 육가장의 주인이 거부한 것이 되니 말이다.

천문위의 노림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내 위를 아프게 한다.

하지만 이미 육진성과 육진정, 육가장의 두 천문위에 대한 것들은 응 시리즈의 데이터에 등록되어 있고, 추적을 위한 꼬리들도 붙은 상황이다. 실시간으로 그 행보를 파악할 수 있다.

진우탁을 비롯한 절강 무림의 천문위들이 둘을 때려잡을 동안만 몸을 피하면 된다.

위험한 시기는 육진성을 코앞에 둔 지금 당장일 뿐이다. 여기도 진우탁이 있다. 육진성이 앞뒤 따지지 않고 나를 죽이려 든다면 천문위인 진우탁이 잘 막아줄 것이다.

그렇게 위에 부담 주는 천문위와의 거리를 벌리고 있는 내 귓가로 전음이 날아들었다.

- 뇌응대주, 요구 사항이 하나 빠졌지 않나?

기대하던 육진성의 항복 선언이 아니라 진우탁의 전음이다.

젠장, 진우탁의 말대로다. 멸왜단의 미래를 위해 요구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깜박하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적대하는 천문위를 코앞에 두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반쯤 멍청이로 만든 듯하다.

- 그 정도는 알아서 해요! 명색이 단주잖아요!

같은 천문위인데, 어째 이리 무게감이 다른지.

- 그 둘의 목숨만 확실히 거두면 되는 일이지?

- 예.

- 그럼 내 알아서 하지.

진우탁의 대답이다.

그렇게 남은 일은 진우탁에게 맡기고 나는 부담 천 배인 그 자리를 벗어났다.

“본가와 절강 무림의 전면 전쟁을 원하는 것이냐?”

육진성이 진우탁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곳에 자리를 마련한 것은 우리 쪽이고, 전쟁을 하고 마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육 노선배입니다만?”

진우탁이 뚱하니 말했다.

“저놈이 내건 마지막 조건이 들어줄 수 있는 조건이라 보느냐?”

“흑도 유일 세가의 주인께서 자식 사랑에 눈이 먼 것은 아니라 봅니다만?”

“저놈 요구대로 내가 내 손으로 가문 후계자의 목을 베어 저놈에게 바치라고?”

많은 혈족의 목숨을 책임지는 세가의 주인이 가문을 위해 아들놈을 희생시킬 독심도 없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형식이다. 가주가 소가주의 목을 딸 수는 있다. 소가주가 벌린 일이 가문에 큰 피해를 줬고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적의 위협에 굴해 그 목을 따는 게 문제다. 거기다가 그 적에게 그 목을 바치는 것도 문제고. 거기에 그 목을 바치는 대상이 세력도 아니고 세력의 수장도 아니다.

이건 육가장이 멸왜단도 아닌 뇌응대주 일개인에게 굴복하는 모양새가 된다.

흑도 유일 세가라 불리는 육가장의 드높은 자존심을 생각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이 육가장에 알려진다면 육가장의 혈족들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전면전을 외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열 받은 천문위 앞에 선다는 부담감에 중요 골자만 담아 입에 나오는 대로 지르다가 단어 선택에서 실수한 것이다.

다시 달려가서 ‘말실수니 그냥 그 둘만 어떻게든 죽여주면 돼!’라고 외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진우탁을 굳게 믿는 수밖에 없다.

“절강 무림 입장 상, 벽력응주가 전쟁을 원한다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아저씨야, 그게 아니잖아! 내가 전음으로 확인까지 해줬잖아!

“이 자리는 애초에 나를 우롱하기 위한 자리였다는 말이군.”

육진성의 입꼬리가 분노로 치켜 올라간다.

아나, 돌겠다. 영상으로 봐도 육진성의 눈에 어리는 살기를 인지할 정도다.

“벽력응주는 아직 젊은 아이입니다.”

진우탁이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냐?”

“중요한 것은 육천경과 육천동 그 둘의 확실한 죽음이지. 그들을 죽이는 형식이 아니라고 설득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하아, 그래 명색이 단주인데 이상한 소리로 판을 깰 리 없지.

“그 말은….”

육진성의 저 반응은 기대대로 아비이기 보다는 육가장의 가주로 결정을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인들의 설득이 먹힌다고 십 할 자신할 일은 아니지요. 아직 젊은 아이니까요.”

진우탁이 미소를 지었다. 거대 세력인 육가장의 주인인 육진성이 진우탁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리 없다.

“위험 부담을 안아야 하니 그에 상응하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예.”

“무엇을 원하는가?”

“육가장이 관리하는 운하 구간의 통행료를 무료로 해주겠다는 일회성 증서를 연간 열 장씩 오 년 동안 제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멸왜단의 이름으로 표행이 운하를 통과한다면 통행료의 이 할을 감해 주시고요. 기간은 육가장과 멸왜단, 항주 흑도련의 상호 불가침이 유지되는 동안으로 하지요.”

슬그머니 불가침까지 끼얹는 진우탁이다.

“좋다.”

“그럼 이 자리에서 밀약을 먼저 맺고, 좋은 날 공식적인 절차를 밟지요.”

***

협정은 이틀 뒤 오강 수감장에서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 절강 무림의 천문위들, 진우탁을 비롯한 보타산 속가의 천문위들이 모두 나섰다.

셋이나 되는 천문위들의 등장. 육가장은 힘에서 밀려 어쩔 수 없이 협정을 맺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식 협정에서는 밀약과 달리 육천경과 육천동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육진성이 이 둘에 대해 모른 척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다.

진우탁과 같이 수결한 밀약서가 존재했다. 밀약이 지켜지지 않아 다시 전쟁이 시작되면 육가장의 체면과 신용은 똥통에 빠지는 격이 된다.

아니 육가의 주인이 직접 수결한 계약도 지켜지지 않는 판인데, 도대체 육가장의 무엇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육진성은 소주 육가장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육천경과 육천동을 호출할 수밖에 없었다.

육진성이 내전 심처에 꾸며진 정원의 정자에 앉아 있자니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가주.”

“육천동, 가주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육진성은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 둘이 시작한 일로 본가가 입은 손해를 말해 보아라.”

“그것이….”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장 멸왜단과 항주 흑도련에 지불해야 하는 돈만 은자 사백만 냥이다. 그뿐이랴? 육가장의 솔가이자 송강부의 패자인 심가장을 재건하는데 드는 돈도 육가에서 감당해야 한다.

아무리 육가장이 항주와 더불어 중원 최대 향락지라 불리는 소주의 이권을 움켜쥐고 항주와 진강에 이르는 운하의 통행료를 걷는다고 해도 그만한 은자를 한 번에 지출한다면 재정이 휘청일 수밖에 없다.

“멸왜단과 항주 흑도련에 지급할 배상금과 심가장 재건에 들어갈 지원을 다 한다면 못해도 은자 오백만 냥 가까운 금전적 손실을 입혔습니다.”

육천동이 눈을 질끈 감고 답했다.

“돈이야 벌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육진성의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절강 무림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항주 흑도와 멸왜단 두 곳과 치른 전쟁치고는 사람이 많이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죽어 나간 숫자보다도 죽어 나간 인원들의 실력이다.

“네놈들 짓거리에 본가의 외당이 박살났다! 솔가인 심가가 박살나고 휘하 세력인 금선방이 사라졌다! 본가에서 심혈을 다해 키운 천행삼도와 철혈사수, 반호수가 죽었어! 혈족이 여덟! 외당에서 열둘! 금선방과 심가에서 여덟! 전부 스물여덟이다! 본가가 운영하는 초극 전력의 사 할을 잃어 가며 얻은 것이 무엇이더냐!”

무림에 벌이 없는 무인들은 많다. 삼류와 이류 무인들은 널려 있으며, 일류 무인들까지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절정 무인 역시 돈이 많으면 어떻게든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초극 고수는 돈만 있다고 대거 모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넓디넓은 중원에 백만이 넘는 무림인과 이백만이 넘는 군병이 있다지만 초극 고수는 그중 일만도 되지 않는다.

“그럼,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까?”

육천경이 머리를 치켜들며 물었다.

“뭐라!”

“그 빌어먹을 벽력응주를 그대로 놔둔다면 수년 안에 절강에서 왜구들이 사라질 판이었습니다. 절강 무림을 절강에 못 박고 있던 왜구들이 사라진 뒤에 본가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야 했습니다! 절강 놈들이, 보타산의 속가 놈들이 팔대문파의 속가와 같은 놈들입니까? 흑도라면 인상부터 쓰는 놈들이냔 말입니다! 아니요, 보타산 속가 놈들의 대표적인 세력이랄 수 있는 멸왜단을 보십시오!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서 흑도의 돈을 거리낌 없이 받는 놈들입니다! 흑도를 당당한 무림의 한 축으로! 지역의 유지로 인정하고 어울리고 있는 놈들이란 말입니다! 보타산 본산 역시 그것을 인정했고요! 흑도의 이권을 부러워하고 탐내지만, 정파라는 체면과 본산의 규율 때문에 직접 손을 뻗지 못하는 팔대문파의 속가와는 완전히 다르단 말입니다!”

절강 무림이, 멸왜단을 비롯한 보타산 속가가 무림의 상식으로 보면 좀 이상하기는 했다. 항주 흑도와 친하고, 돈 필요하면 항주 흑도에 자금 요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다 왜구라는 공동의 적 때문에 만들어진 풍조다.

“왜구가 사라지면 절강 무림을 등에 업은 멸왜단이 항주 흑도와 손을 잡고 소주로 진격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 위험을 미연에 방지해야 했습니다! 육가장의 일원으로! 미래의 육가장을 짊어져야 할 소가주로!”

육천경의 열변에 육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과연 너는 우리 육가장의 당당한 소가주구나. 소가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구나.”

“아버지.”

육진성의 긍정에 육천경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어렸다.

“육가장의 당당한 소가주로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육진성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어 육천경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자진해라!”

“아버지,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말에 육천경이 놀란 눈이 되었다.

“육가장의 당당한 소가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것이냐?”

“가주, 소가주와 저의 실책이 큽니다. 저도 소가주도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가문의 현재를 생각하십시오. 가문의 현 상황은 초극 고수 하나가 아쉬운 형편입니다.”

육천동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자기 목숨도 같이 걸려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절강 무림과 협정을 맺었으니, 불가침 조약을 했으니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느냐? 협정서에는 공개하지 않은 별칙이 하나 있었다. 밀약에 대한 이행이 완료되지 않으면 협정은 자동 파기라고 말이다.”

“그 밀약에 소가주와 저의 죽음이 걸려 있는 것입니까?”

육천동의 말에 육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육천경이 조용히 단검을 뽑아 들었다.

“가주, 육가장의 소가주로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입니까?”

“그래.”

육가장의 소가주가 묻자 육가장의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아, 바로 보자.”

육천경이 사촌 동생에게 처연히 웃어 주고는 단검을 쥔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퍽!

정확히 심장을 파고든 검날에 육천경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소가주를 기다리게 할 셈이냐?”

육진성이 육천동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육천동이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천령개(天靈蓋)를 내려쳤다.

아들과 조카의 죽음에 육진성은 하늘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지붕 없는 데서 무슨 짓인가 했더니 나 보라고 그런 거군. 농꾼!”

- 두 사람 모두 본인임이 확인되었습니다.

“혹시 모르니, 시체에 감시 붙여!”

- 예, 리퍼.

육가장과의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