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절강행(47)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래? 멸왜단은 왜구 잡는 방파 아니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육가장에 전쟁 선포를 해? 왕 형 뭐 아는 거 있어?”
육가장을 상대로 한 멸왜단의 전쟁 선포에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을 리 없다.
“멸왜단이 육가장에? 정 형이 잘못 들은 거 아닌가? 나는 항주 흑도가 연맹을 결성해 육가장에 전쟁 선포했다 들었는데?”
“항주 흑도가? 그럼 내가 소문을 잘못 들은 것인가?”
“그렇겠지. 항주 흑도야 육가장이 매번 들쑤셔 왔으니 칼을 뽑아 들 수도 있잖아. 하지만 멸왜단은 좀…. 그쪽은 자네 말대로 왜구 쫓아다니기 바쁜 곳인데.”
“거, 두 형님 다 귀가 두 개인데 왜 소문은 하나씩 밖에 못 듣소?”
정가와 왕가 두 사람의 이야기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귀 밝은 거 자랑하는 놈이 왔군.”
“이런 쪽은 이 아우 자네가 전문 아닌가. 아는 거 있으면 털어놓게.”
아는 사이인지 먼저 온 두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맨입에?”
“내 한잔 사지.”
“왕 형님은?”
“사람이 술만 먹나? 내 안주를 사지.”
두 사람을 통해 술과 안주를 확보한 이 씨가 입을 열었다.
“흠, 형님들이 이렇게 원하니 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보죠. 멸왜단의 뇌응대주 아시오? 벽력응주 말이요.”
“벽력응주 이도연 말하는 거지? 알지. 내 절강 사람인데 모를 리 있나? 올해 절강 땅에 왜구가 사라지다시피 한 것이 그 사람 덕분이라던데?”
“멸왜단에서 물고 빨고 난리가 난 인사로 들었는데? 그 사람 이야기는 왜?”
두 사람이 귀 밝은 친구를 보며 이야기를 재촉했다.
“이번 일의 발단이 그 사람이오. 육가장에서 그 사람을 죽이려 했다더군.”
“아니 왜? 육가장이 왜구 앞잡이도 아닐 텐데?”
“혹시 뇌응대주, 벽력응주가 부리는 매 때문이 아닌가?”
“오, 왕 형님은 뭘 좀 아시는구려.”
“나도 벽력응주가 부리는 매 이야기는 안다고! 그 매들 덕에 왜구들이 절강 땅에 발도 못 붙인다고 들었어! 그런데 그거랑 육가장은 상관없잖아?”
“멸왜단의 매는 벽력응주가 훈련시킨 매들이고, 벽력응주가 원래 부리는 매들은 거의 영물이라더군. 초극 고수를 알아볼 수 있다는 거야.”
“왕 형님은 정 형님과 달리 귀가 좀 열려 있군요.”
“매가 초극 고수를 알아봐? 허, 대단하군. 그런데 그게 육가장이 벽력응주를 노릴 이유가 되나?”
“육가장은 항주에 진출하고 싶어 하잖나. 항주 흑도가 똘똘 뭉쳐서 그걸 막고 말이야.”
“왕 형님, 형님이 계속 이야기하실 거면 나는 입을 다물고요.”
“아니 아우가 하게. 나야 조금 밖에 모르잖나.”
“에헴. 그러면 아우가 이야기를 하지요. 벽력응주가 항주 흑도에 자신이 부리던 매 한 마리를 빌려 줬어요. 그 매가 항주에서 분탕질 치러 온 육가장의 초극 고수들을 귀신같이 찾아낸 거지요. 항주 흑도가 분탕질 치러 온 작자들을 그냥 둘 수는 없잖아요. 몰려가서 패죽였지요.”
“그 탓에 육가장이 벽력응주를 죽이려 했다는 건가? 자신들의 항주 진출에 방해가 되니?”
“멸왜단은 처음에는 육가장의 짓인지도 몰랐답니다. 화포까지 동원해서 매까지 잡아 죽이려 했다니 왜구 앞잡이들인 줄 알았다네요.”
“그럴 만도 하네.”
“그렇지. 왜구들이 매에 대해 알았다면 기를 쓰고 없애려 들것이니.”
“그래서 모든 힘을 다해 그 흔적을 추적했는데, 송강부에 그 흔적이 드러났다더군요. 그래서 송강부에 대거 전력을 투입했어요. 그런데 이게 육가장의 노림수였던 거죠.”
“육가장의 노림수?”
“설마?”
“예, 솔직히 항주 흑도를 후려치는데 멸왜단이 걸리지 않습니까? 어쨌든 멸왜단의 가장 큰 금전적 후원자가 항주 흑도니깐. 그러니 전쟁에서 멸왜단을 배제할 수를 쓴 거지요.”
“허.”
“맙소사.”
“벽력응주의 암살 시도로 멸왜단의 모든 전력을 암살자를 찾게 만들고는 그 틈에 항주로 밀고 내려온 겁니다. 금선방이 동원됐고, 육가장의 식객 상당수가 동원됐다더군요.”
“육가장이 그렇게 작정을 했다면 항주 흑도의 피해가 커야 하지 않나?”
“도대체 어떻게 막았데?”
“항주 흑도에게 천운이 있었는지 육가장 내부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항주에 도착한 육가장 전력이 원래 동원한 전력의 절반도 안 됐답니다.”
“호.”
“진짜 천운이군.”
“반호수 육천우가 이끄는 육가장의 식객들과, 육가의 천행삼도가 이끄는 금선방의 전력이 항주에 도착했는데, 동시에 들이치기로 한 약속만 철썩 같이 믿은 금선방이 항주의 패선방을 후려쳤다가 도리어 끝장났지요. 육천우 쪽은 항주 외곽에서 다른 전력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다가 수색에 나선 항주 흑도에게 박살이 났고요.”
“천운이 겹쳤군.”
“항주에 도착한 전력도 만만치 않았네. 그래서?”
“이 음모가 금선방주를 통해 드러났기에 항주 흑도가 연맹을 해서 육가장에 전쟁 선포를 했고, 멸왜단도 발을 맞춰서 육가장에 전쟁 선포를 한 거지요.”
“허, 육가장이 흑도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명망 있는 가문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이권에 눈 돌아간 흑도였군.”
“아니 절강 무림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런 수작을 부려?”
절강에서 육가장에 좋지 않은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대로라면 멸왜단과 항주 흑도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절강 무림 전체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육가장의 입장을 밝히고 억울함을 호소해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슨 주장을 펼치려면 거기에 대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육가장이 가진 것은 심증뿐이었으니 말이다.
그에 반해 항주 흑도의 주장은 금선방주라는 살아 있는 증인이 있었고, 육가장이 항주 흑도를 공격했다는 증거들이 수두룩했다.
천행삼도와 스물에 달하는 육가 정예들의 시신은 물론이고 반호수 육천우와 육가의 식객 쉰하나의 시체도 있었다.
명분 싸움에서 육가장이 형편없이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
“여기가 오강(吳江)현 육가장 분가인 수감장(水監莊)이오?”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노인과 젊은이 중 젊은이가 물었다.
“그렇소.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수문 위사는 칼자루를 움켜쥐며 물었다. 멸왜단과 항주 흑도와의 마찰 때문에 육가장 소속 세력들에게 갑종 경계령이 내려진 탓이다.
“본인은 철륜도 호장우라 하오, 뒤에 계신 분은 단철귀수 조구흥 선배시고.”
젊은이, 호장우의 말에 수문 위사의 몸이 얼어붙었다. 호장우와 조구흥이라니, 멸왜단과 항주 흑도에서 유명한 초극 고수들 아닌가.
“뭘 멀뚱히 보고만 있느냐? 수감장 현판 내리러 온 거다. 기어들어 가서 싸울 준비 해야지!”
조구흥의 말이 수문 위사의 얼어붙은 몸을 깨웠다.
“저, 적습이다! 멸왜단과 항주 흑도 놈들이 쳐들어왔다!”
수문 위사는 귀가 울릴 정도로 목청을 돋우며 정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명색이 육가장의 분가인데 이래도 되는 겁니까?”
호장우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타탁!
초극 고수의 섬세한 손놀림을 따라 발출한 장력이 수감장의 현판을 두드려 아래로 떨어뜨린다. 현판이 땅에 닿기 전에 손을 뻗어 잡아 세웠다.
“자네는 여기에 초극이 몇이나 있을 것 같나?”
“넷 정도 될 듯 합니다만?”
“허, 귀신같은 감각이군. 조심해야 할 걸세. 죄다 육가의 혈족들이네.”
육가장의 어지간한 전력들에게는 이미 식별 표까지 붙어서 그 위치 정보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고 있었다.
응7과 연결된 조구흥이니 그걸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노 머신을 품은 호장우도 직감이라는 이름으로 그 정보를 공유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현판을 들고 있는 호장우를 지난 조구흥이 수감장 정문을 걷어찼다.
쾅!
초극 고수의 공력이 실린 발길질에 정문이 터져 나갔다.
뻥 뚫린 정문으로 장원 안의 광경이 그대로 들어왔다. 멋들어지게 깔린 청석 위로 수십 명의 무인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수십 명이 끝이 아니다. 진을 치고 있는 무인들 뒤로 삼삼오오 짝을 지은 무인들이 계속 합류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구흥은 그런 무인들이 보이지 않는 듯 느긋하게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육가장에는 초극에 이른 식객들이 많다 들었습니다만? 이곳에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호장우가 현판을 들고 조구흥의 뒤를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올해 죽어 나자빠진 놈들만 스물이 넘네. 아무리 육가장이 흑도 유일의 세가라 불린다지만, 그 이상의 식객을 데리고 있기는 힘들지.”
“괜히 흑도 유일 세가라 불리는 것이 아니군요. 초극 고수를 그 정도나 잃었는데 아직도 전의를 잃지 않고 있다니….”
둘이 그렇게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허, 항주 흑도의 늙다리와 멸왜단의 애송이 놈! 본가가 우습게 보이느냐!”
“겨우 둘이서 우리를 감당하겠다고?”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군.”
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흔에서 쉰은 되어 보이는 나이대의 검객이 넷이다.
“육가의 철혈사수(徹穴四秀)? 맞나?”
조구흥이 그들을 보고 물었다.
“우리가 있는 줄 알면서 둘만 왔다고?”
여유로운 조구흥의 모습에 육가의 검객 넷은 움찔할 수밖에 없다.
“둘이 아니라 셋이지.”
조구흥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는 안 보인다.”
“그럼 치우지요.”
정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 육가 철혈사수의 시선이 조구흥의 뒤쪽, 뚫린 정문 너머로 쏠렸다. 하지만 그곳에 사람은 없었다.
우우웅!
귀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닥쳐드는 압력에 철혈사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떨어져 내리는 강기의 소용돌이!
“피해!”
콰콰콰쾅!
경고성과 동시에 굉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누구냐!”
“이딴 기습을!”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을 피했던 철혈사수가 각자의 검을 뽑아 들고 습격자를 향해 겨눴다.
“허, 진짜 얍삽하다니깐. 저 정도 되면 합공도 한번 받아 줄만 한데, 정중앙을 찔러서 저렇게 흩어 놓네.”
그 광경에 조구흥이 중얼거렸다.
조구흥의 말에 철혈사수는 자신들의 간격이 합공을 펼치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여!”
한 명의 외침에 셋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아니 먼저 움직인 것은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 속의 습격자다.
흙먼지를 뚫고 뻗어 나가는 시퍼런 빛살!
철혈사수 중 둘째가 자신을 노리는 빛살을 검강으로 맞이했다.
캉!
“큭!”
충돌과 동시에 전신을 울리는 충격. 아니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왼 다리가 허전해지며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출(出)!”
형제 하나가 당하는 순간에 셋이 모였다. 그리고 셋의 힘이 하나로 뭉쳐지려는 순간. 푸른 빛살의 폭우가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카카카카카카캉!
금속성과 함께 세 명의 몸이 사이좋게 밀려나고 있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말이다.
휘이이잉!
흙먼지를 휘감으며 강기의 소용돌이가 넷째를 덮쳤다.
카카캉!
금속음이 사라지며 휘몰아치는 강기의 소용돌이를 따라 핏줄기가 사방으로 뿌려진다.
후웅!
소용돌이가 하나의 빛살이 되어 막 바닥에 내려서는 셋째를 덮쳐들었다.
파학!
피가 튀며 셋째의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빛살은 그에 만족하지 않은 듯 마지막 남은 첫째를 향해 살벌한 궤적을 그렸다.
검강이 힘껏 빛을 발하며 그 궤적을 막아섰지만….
휙!
검강을 맞이할 생각 따위 없다는 듯 중간에 꺾여 버린 궤적이 첫째의 몸을 그었다.
그렇게 육가의 초극 고수 넷이 피바다에 허물어지자 빛무리가 사라지며 습격자의 실체가 드러났다.
한 자루 창을 든 중년의 사내.
멸왜단주 진우탁이다.
“수감장 현판을 내리는 것에 반대하는 자 있나?”
그 자리에 진을 치고 있는 수감장의 무인은 백을 훌쩍 넘었지만, 초극 고수 넷을 단매에 때려죽인 남자, 천문위의 고수 진우탁이 하는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응7과의 시야 동조를 해제했다.
“농꾼아.”
- 예, 리퍼.
“천문위랑 문제 생기면 도망은 칠 수 있는 거지?”
- 최대한 빨리 초극과 천문위를 구분할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야,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