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절강행(45)
스윽, 슥.
내가 쥔 단도가 농꾼의 인도대로 움직인다. 일은 할수록 느는 법이다. 세 번째라 그런지 처음보다는 확실히 빨랐다.
“끝났다.”
깔끔하게 베어 낸 육천월의 얼굴 가죽을 준비해 둔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제대로 된 인피면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복잡한 뒤처리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다.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는 나노 머신을 움직이는 것은 농꾼의 몫.
그의 칼과 신분패 등 육천월의 자잘한 소지품들을 챙겼다.
이제 얼굴 가죽을 벗겨 낸 시체를 처리하면 된다. 시체도 쓸 일이 있기에 썩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준비된 약품을 골고루 뿌리고 구릉 위에 대충 땅을 파 매장한다.
스물둘의 시체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기에 하나를 처리하는 것은 쉽다.
“응7에 좌표 전송해.”
- 예, 리퍼.
시체들은 매를 빌린 조구흥이 사람을 부려 거둬 갈 것이다.
“항주 흑도에 적당한 사람이 있으려나?”
일단 항주를 향해 내달렸다.
가흥부의 북쪽 끝단에서 항주 부도까지 최단 거리로 내달리면 이백 리가 넘는 거리였지만, 피풍의를 펼치고 내달리니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찾은 곳은 화선방이었다.
“오오, 이게 누군가. 벽력응주 아닌가!”
항주 칠선 중 하나이자 화선방의 전대 방주인 삭인 평현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래간만입니다. 평 노선배.”
“오래간만일세. 그런데 송강부 아니면 가흥부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는 어쩐 일인가? 일이 틀어진 건가?”
“단주께 대강의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대강의 이야기를 아니, 지금 묻고 있는 것 아닌가?”
“저 혼자 어떻게 해보려 했는데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공가 놈을 찾지 않고 나를 바로 찾아온 것을 보니 칼잡이가 필요한 일이군.”
흑도의 늙은 생강답게 내가 찾아온 이유를 바로 알아챘다.
“예. 초극에 이른 도객 둘이 필요합니다.”
“둘째 불러와!”
내 말에 평현이 즉시 사람을 불렀다. 잠시 후 사십 대 중반의 훤칠한 칼잡이 하나가 들어왔다. 평현의 둘째 제자다.
“부르셨습니까? 사부님.”
“이 녀석이면 되겠지?”
평현이 자신의 둘째 제자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나를 보며 물었다.
= 육천월이랑 비슷하지?
체격은 비슷했다.
- 얼굴형이 육천월보다 크지 않은 것이 가능합니다.
“좋군요. 그런데 평 노선배, 제가 필요한 사람은 둘입니다만?”
“둘 맞지 않나.”
평현이 나를 보며 웃었다.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이다.
“그 체격이….”
“내 한때 축골공(縮骨功)에 심취했던 적이 있네. 알고 온 것 아니었나?”
축골공은 골격의 크기를 임의로 조절하는 무공이니 체격 차이를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러니 반대할 이유가 없다.
“아, 그리고 항주 분들에게 통문을 돌려 주시겠습니까? 계획이 진행되니 당장 준비해 두시라고.”
“위치는 어디로 하겠나? 요 며칠간 공가 녀석 영업장에 세가 쪽 애송이들이 몰려와 골패 좀 만지고 있다던데 말이야?”
“그럼, 공 노선배 쪽으로 잡지요.”
“그럼, 그렇게 연락하지. 둘째야.”
평현이 자신의 제자를 불렀다.
“예, 사부님. 통문을 돌리지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좀 있습니다.”
평현의 둘째 제자에게 계획을 위해 준비되어야 할 것들을 적어 넘겼다.
“우리는 육가의 천행삼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져온 짐을 풀어 인피면구를 내놓으며 말했다.
“이거 인피로 만든 거군. 설마 당사자들 얼굴인가?”
평현이 자신 몫의 인피면구를, 육천일의 얼굴 가죽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가흥부로 가는 놈들을 덮쳐서 벗겨냈습니다.”
“역시 벽력응주! 대단하군. 이것들 합공을 익혀서 우리 늙다리들이 소주 나들이 다닐 때도 피해 다닌 것들인데.”
“각개 격파했지요.”
인피면구는 단순히 뒤집어쓴다고 끝나는 물건이 아니었다. 뒤집어쓰기 전에 얼굴의 형태를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고, 뒤집어쓴 다음에도 위화감을 줄이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럼, 작업 시작합니다.”
흑도 인생을 살아온 나라지만 그런 전문 지식은 없었다. 그러니 농꾼이 보여주는 증강현실의 지시를 따라 움직일 뿐이다.
상세한 지도와 초극 고수의 섬세한 손놀림이 합쳐지니 평현의 얼굴은 반 각 만에 육천일의 것이 되었다.
“이걸 드시지요.”
육천일로 화한 평현에게 환단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목소리를 바꿔 주는 약입니다.”
음성 변조 기능을 위한 나노 머신이 듬뿍 들어가 있는 물건이다. 천행삼도의 음성 데이터는 이미 샘플링이 끝나서 언제든지 흉내 낼 수 있는 상태다.
이 각 후 육가의 천행삼도가 된 우리는 조용히 항주를 나섰다.
목적지는 가흥부 부도에 자리 잡은 금선방의 총타. 이백 리 남짓한 거리다. 초극 고수로 이루어진 셋이라 해 뜨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금선방 총타 주위에 화톳불을 들입다 깔아 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총타를 둘러싼 담벼락 위에서까지 번을 서고 있었다.
“멈추시오, 어디서 오시는 분들이기에 이 야심한 시간에 본 방을 찾으시는 거요?”
수문 위사가 정문을 향해 다가서는 우리를 발견하고 외쳤다.
“육가장에서 왔다!”
천행삼도의 첫째 육천중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내가 나서서 대꾸했다.
“빨리 확인하고 방주에게 안내해.”
수문 위사를 향해 육가장에서 만든 패찰을 던졌다. 수문 위사는 그것을 냉큼 받아들고는 정문 옆의 쪽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정문이 활짝 열렸다.
“방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패찰을 돌려주며 안내인 하나가 붙었다.
우리가 안내된 곳은 대청이었다. 불을 환하게 밝힌 그곳에는 금선방의 중진으로 보이는 자들이 가득했다.
“어서 오시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난데없이 항주 흑도의 준동을 경계하라니.”
금선방주가 우리들을 맞이하며 물었다. 중진들과의 인사도 뭐도 없이 바로 본론을 꺼내 묻는다.
잡작스레 육가장에서 내려온 경계령에다가 육가의 혈족이 직접 나섰다. 그것도 하나도 아닌 셋, 그냥 셋도 아닌 합공이 가능할 것이라 보이는 천행삼도가 몰려왔으니 심상치 않다 느낀 것이다.
“방주, 멸왜단 놈들이 송강부에서 패악을 저질렀다는 소리는 들으셨습니까?”
“암중 세력이 멸왜단 뇌응대주를 암살하려 했다는 말은 들었네. ‘선풍장’이라는 곳에서 화포까지 동원해 뇌응대주를 공격했다는데….”
금선방주는 암살 건에 대해 모르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암살 같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휘하 세력에게까지 알릴 이유 없는 것이다.
“멸왜단 놈들이 그 암살 사건을 핑계로 송강부의 심가장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위협이 아니라 이미 박살냈지만, 아직 그 소식은 육가장에도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멸왜단이?”
금선방주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심가장을 쳐 봐야 멸왜단에게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암살의 배후가 육가장임을 모르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본가에서는 이걸 항주 흑도 놈들의 수작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점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멸왜단을 이용하여 육가장의 시선을 송강부로 돌린 다음 우리 금선방을 노린다. 항주 흑도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위에서 판단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이때까지와는 다른 대대적인 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이 소가주의 판단입니다.”
“크흠.”
내, 아니 육천중의 말에 금선방주는 인상을 썼다.
“육가에서 오신 분! 그 말씀은 항주 흑도가 전면전을 각오했다는 말로 들리오만?”
금선방의 중진 중 한 명이 물었다. 오십 대로 보이지만 초극 고수가 아니다.
“육가장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육 할 이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니 육가장에서 키워 낸 초극 고수의 자존심으로 말을 놓는다. 상대도 못마땅한 표를 내지 않는다. 흑도에서는 당연한 일.
“상부에서는 어떻게 대응할 생각으로 자네들을 보낸 것인가?”
금선방주가 물었다.
“방주께서도 눈치 채셨겠지만 단지 굳건히 지키기 위해 왔다면 우리 셋만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은, 역공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인가?”
금선방주의 눈이 커졌다.
“예. 금선방의 핵심 전력을 모아 주시지요.”
“항주 흑도에 기습 공격을 한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금선방의 중진 중 누군가가 이견을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항주 흑도에는 공중을 날며 초극 고수를 찾아내는 빌어먹을 매가 있지 않습니까?”
내 물음에 그가 답했다. 이에 육천일로 화한 평현이 육천월로 화한 제자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하! 하!”
이에 육천월의 탈을 쓴 평현의 둘째 제자가 크게 웃음소리를 냈다. 초극의 공력을 담은 웃음소리가 한 사람을 향해 집중되니.
“큭!”
초극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당사자는 인상을 쓰며 이에 대항하기 위한 공력을 일으켰다.
“그래서 지금 본가의 명을 무시하겠다는 거냐!”
노골적인 살기가 육천월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막내는 자중해라!”
“예, 형님.”
내 한 마디에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적과의 싸움을 앞두고 동도에게 뭐하는 짓이냐?”
자기가 시킨 주제에 평현이 육천일의 탈을 쓰고 동생 역할을 하는 둘째 제자를 꾸짖는다.
“둘째야, 이 형이 동도들에게 설명을 해야겠는데?”
“예, 조용히 하지요.”
내 말에 평현도 입을 다물어 줬다.
“좋은 지적이다. 벽력응주가 항주 흑도에게 빌려 준 매가 있다면 소수로 행해지는 습격은 별 효용이 없지.”
“그 말씀은….”
“본가는 이번에 항주를 손에 넣을 계획이다.”
금선방만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육가장의 전력들도 대대적으로 동원된다는 말.
“그리고 그 문제의 매는 지금 항주에 있을 가능성이 낮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내 말에 금선방주가 물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최초의 암살 시도 때 벽력응주는 자신이 부리는 세 마리의 매를 잃었다 합니다.”
“그게 사실인가?”
곧 보충하긴 했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예. 화포 공격에 그렇게 되었다더군요. 본가와 충분한 신뢰를 쌓고 있는 곳에서 나온 소식입니다.”
“하하.”
금선방주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아아.”
중진들 속에서도 탄성을 터트리는 자들이 속출했다.
내가 저들에게 말한 것은 비밀리에 행한 암살 시도의 결과다. 육가장의 일원인 육천중이 실패한 암살 시도의 결과를 상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생각을 하나로 몰 수밖에 없다.
벽력응주 암살 시도 뒤에 있었던 것은 육가장이다. 그렇다면 송강부에서 난동을 부리는 멸왜단의 행보는? 그런 멸왜단을 사주한 항주 흑도의 행보도? 전부 항주 공략을 위해 육가장이 그린 큰 그림의 일부인 것이다.
“벽력응주가 부리는 매는 원래 다섯. 그중 셋이 당했습니다. 그리고 벽력응주는 지금 송강부에서 멸왜단을 이끌고 본가가 지원하는 심가장과 전쟁을 치러야 하지요. 한 마리의 매가 아쉬울 때 아닙니까?”
항주 흑도에 대여해 준 매를 찾아갔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소리.
“그리고 매가 남아 있다 해도 사방팔방에서 들이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본가가 동원한 전력을 한눈에 알 수 있으니 포기하는 자가 나올 가능성도 크지요.”
육가장이 작정하고 그리는 그림이다. 그런 믿음이 금선방 인사들 사이에서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었다.
“멸왜단과 절강 무림의 일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항주를 점령한 뒤 본가가 제일 먼저 할 일은 항주의 유지로 멸왜단에게 항왜의 지원금을 건네는 것이 될 겁니다.”
“멸왜단이 아무리 항주 흑도와 친하더라도 육가장이 항주의 유지로 책임을 다한다면 항주 흑도를 도울 명분이 없겠군.”
“그렇지요. 설마 멸왜단이 항주 흑도의 편을 든다 해도 절강 무림은 그에 동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금선방은 오늘 육가장을 도와 항주 흑도를 친다! 이견 있는 자가 있느냐!”
금선방주가 중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들 한몸으로 방주의 명을 받들 뿐입니다!”
금선방 중진들의 우렁찬 답이 대청을 울렸다.
아니 육가장에 사실 확인도 안 해? 중간에 전서구를 낚아챌 준비도 다 했는데! 육가장에서 답신한 암호문도 만들어 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