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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62화 (62/175)

62화

절강행(42)

농꾼이 인도한 곳은 장원을 둘러보기 좋은 위치의 전각 최상층으로, 내가 수전을 날렸던 곳 중 하나다.

전각의 벽면을 박차고 단숨에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네 놈은….”

내가 날린 수전에 사지가 꿰여서 바닥에 박제되듯 박혀 있는 놈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지금은 놈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니다. 재빨리 다가가서 놈의 혼혈을 눌렀다.

“포탄 떨어졌나?”

장원을 뒤흔들던 소음이, 화포의 발포음과 착탄 충격음이 갑자기 멎었다.

- 아직 장원 곳곳에 숨겨진 포탄이 있습니다.

장원의 평면도가 뜨면서 장전된 자포가 숨겨진 곳들이 곳곳에 표시되었다.

“그럼 왜?”

그 이유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호장우가 한 방향으로 돌진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포격이 집중되었다.

나라면 뒤로 몸을 물릴 상황. 하지만 호장우는 뒤로 몸을 물리기는커녕 앞으로 나가는 발걸음을 굳건히 하며 칼을 휘둘렀다.

호쾌한 도격이 누런 불광을 일으키고 곧 그의 전신은 불광을 토해내는 칼이 그리는 궤적으로 뒤덮였다.

쾅, 콰쾅!

묵직한 포탄 둘이 호장우가 그리는 궤적에 걸려들어 궤도가 비틀어져 엉뚱한 곳을 박살냈다.

날아드는 포탄은 그뿐만이 아니다. 화포가 토해낸 수백의 강철 화살이 그 뒤를 따라 호장우를 덮쳤다. 하지만 호장우의 발걸음과 칼질은 멈추지 않았다.

타타타탕!

콩 볶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다 튕겨 냈다.

“미친!”

내 입에서 절로 나오는 소리다. 내가 전한 화기의 대응은 단일 포탄은 나노 머신으로 궤도를 읽어 피하고, 산탄은 호신강기를 씌운 피풍의를 이용해서 막는 정도다.

그것도 정면으로 막아내는 것보다는 미처 피하지 못한 것들을 막아내는 정도. 즉 회피에 중점을 둔 방법들이었다.

그런데 호장우, 저 자식은 힘으로, 칼질로 포탄을 받아낸 것이다.

- 리퍼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내 감탄에 농꾼이 대꾸했다.

“그냥 피하라며?”

- 경우가 다릅니다. 그때는 리퍼께서 포탄을 자르려 하셨기에 한 소리지요.

그렇게 호장우가 한 놈과 거리를 줄이자 놈이 불랑기포를 내던지고 칼을 뽑았다.

“끼요옷!”

호거술을 사용하며 강기를 휘두르며 놈이 저항하고 있을 때, 다른 다섯이 칼을 들고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화포가 안 통하는데 칼로 덤빈다?”

당연하다. 상대는 초극 고수 하나다. 화포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 해도 저들은 개개인이 절정 무인이오, 거기에 호거술을 사용하는 강기 사용자다. 그뿐이랴? 비벼 볼 언덕도 있었다. 지하 비밀 통로에 웅크리고 있는 초극 고수 넷. 그 정도면 확실히 뒷걱정 안 할 든든한 언덕이다.

뭐, 그 언덕은 이미 나에게 작살나고 파헤쳐져서 하나 죽고 둘이 잡히고 하나만 간신히 도망간 상태지만 말이다.

어쨌든 저들이 저렇게 나온다면 내가 굳이 탄궁으로 저격할 필요가 없다.

여섯과 호장우가 한데 어우러졌다. 시퍼런 도강이 공간을 번뜩이고 이에 맞서 누런 불광이 굵은 궤적을 그렸다.

“끼요옷!”

여섯 자루 왜도가 요란한 기합을 앞세우며 호장우의 요혈을 노렸지만, 그는 수확 대상자로 나노 머신을 품은 초극 고수다.

여섯의 강기 사용자가 빈틈없이 몰아치는 협공이라지만 나노 머신은 능히 그 빈틈을 찾아낼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빈틈은 바로 호장우에게 ‘직감’이라는 형식으로 제공된다.

초극 고수의 육체가 바로 반응해서 그 빈틈을 쑤시니 여섯이 하나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냥 놔둬도 호장우가 이길 싸움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려 줄 필요가 없었다.

전각 바닥을 박차고 피풍의를 펼친다. 단숨에 격전장을 향해 활공한다.

양손에 스피커를 형성, 그들의 머리 위에 당도했을 때 스피커가 울부짖는다.

어헝!

사자후의 공능에 놈들의 호거술이 깨지며 번뜩이는 왜도의 강기가 사라졌다.

호장우도 사자후의 영향에 잠시 멈칫했지만 그뿐이다. 바로 정신을 차렸다. 얼빠진 모양새로 틈을 보이는 절정 무인 여섯을 제압하는 것은 초극 고수인 호장우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고했네.”

내가 호장우 곁으로 내려서며 웃었다.

“다른 녀석들은 자네가 제압했나? 이제 초극 고수들을 상대하는 일만 남았군.”

호장우가 칼을 고쳐 잡으며 전의를 드러냈다.

“자네가 이쪽에서 워낙에 잘해 준 덕에 그럴 필요 없게 됐어.”

“뭐?”

내 말에 호장우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봤다.

“자네가 저 녀석들 상대로 시선을 확실히 끌어 준 탓에 뒤를 치기 쉬웠어.”

“숨어 있던 초극 넷을 홀로 처리했다는 말인가?”

호장우가 어이없다는 눈이 되었다.

“놈들이 몸을 숨긴 지하 공간이 좁았거든. 넷이라는 수적 우위가 득보다 실이 되는 공간이었지. 그 탓에 일이 잘 풀렸어. 한 녀석 놓치고 한 녀석은 죽었지만 둘은 잡을 수 있었네.”

“둘을 잡아? 초극 고수 넷을 상대하면서 상대를 사로잡을 여력이 있었다고?”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잡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있는 꼼수들이 있지 않은가.

“자네 초극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나?”

“세상사에서 흔한 일이잖나? 얼마나 많이 일어난 일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전문 용어까지 생겼을까?”

“허, 허. 그걸 농이라고 하고 있나?”

고사성어까지 가져다 와서 둘러대는 내 말에 호장우가 허탈한 얼굴을 했다.

“자네는 여기 여섯을 지키고 있게. 나는 내가 쓰러트린 놈들을 데려올 테니.”

그렇게 말하며 지하 비밀 통로를 향해 발을 옮겼다.

일류 무인 스물둘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지 장원 한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 아, 그리고 뇌응대 불러.

총타에서 출발한 뇌응대는 지금 송강부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 예, 리퍼. 소식 전했습니다.

응4가 따라붙었기에 연락은 금방이다.

- 물길 92km에 육로 6km, 130분 정도 소요될 듯합니다.

곤산 인근을 흐르고 있는 황포강(黃浦江)은 송강부 부도를 지나 바다까지 이어져 있다. 그러니 쾌속선으로 그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곤산 코앞까지 올 수 있는 것이다.

지하 비밀 통로의 초극 고수 둘과 나에게 사지를 잃은 불랑기포 사수 셋을 호장우가 잡은 여섯 놈 옆에 던져 놓았다.

한 시진쯤 기다리자 화인천이 뇌응대원들을 이끌고 당도했다.

“화려하게도 저질렀습니다. 대주. 이 작자들 도대체 화탄을 얼마나 쏴댄 겁니까?”

불랑기포가 만들어 놓은 폐허를 보며 화인천이 혀를 내둘렀다.

“쏘고 던져 놓은 자포들 세어 보면 알 일이지.”

“그런데 다 때려잡은 겁니까?”

화인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할 일 남겨 놨다. 일류 무인 스물둘. 앞뒤 사정 모르는 호원 무사일 가능성도 있으니 너무 심하게 손을 쓰지는 말고.”

“예, 대주.”

화인천과 진혜예가 뇌응대원들을 이끌고 스물둘이 웅크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단주께서 일을 크게 벌일 작정을 하신 모양이군.”

호장우가 뇌응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사로잡은 인원들을 데리고 절강으로 빠질 줄 알았는데 여기 선풍장을 점령하는 모양새니 나오는 말이다.

“상대가 육가장이야. 확실히 하지 않으면 계속 일을 벌일 게 뻔하니 어쩔 수 없지.”

***

소주, 육가장.

태호 안에 자리 잡은 육가장이 본가이지만 그곳은 은퇴한 육 씨들의 거처이자 차세대 동량들을 키워 내는 곳이지 흑도 유일 세가인 육가장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곳이 아니었다.

소주 육가장이야말로 강호에서 말하는 흑도 유일 세가인 육가장의 총타다.

“선풍장의 함정이 실패했다고?”

육천경이 인상을 썼다. 팔순이 넘었지만 가주 자리를 넘겨주지 않는 육가장의 당대 가주 덕택에 쉰에 이르는 나이가 되도록 소가주라 불리는 그였다.

“말이 돼? 동원된 초극이 넷이다. 그중 셋은 각지에서 흑도의 패자로 굴러먹던 자들이야. 그뿐이랴? 마풍단(摩豊團) 전원이 동원되었어. 마풍단주에게 왜구의 비전을 배워 강기를 얻은 자들이 열넷이다. 어지간한 초극은 눈 아래로 보는 마풍단주까지 있는데! 그런 전력으로 갓 초극이 되었다는 애송이 하나를 못 잡아? 그 빌어먹을 매 때문이라고 하지 마. 그 잡아 죽일 매를 잡기 위해서 그 비싼 불랑기포를 몇 문이나 준비했는데!”

“뇌응대주가 선풍장을 빠져나간 정도가 아닙니다.”

“뭐?”

“마풍단주 홀로 간신히 몸을 뺐다더군요.”

육천경의 질책에 그의 사촌 동생이자 심복인 육천동이 답했다.

“그게 무슨 개 소리야? 진우탁, 그 빌어먹을 작자가 직접 오기라도 했다는 거야?”

“진우탁은 아니고 철륜도가 같이 움직였답니다.”

“철륜도라면 호장우? 보제사 금강불도(金剛佛刀)를 부활시킬 기대주라는 그놈 말하는 거냐?”

“예, 그 철륜도입니다.”

사촌 형의 물음에 육천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망할 녀석을 붙였다면 멸왜단에서도 선풍장이 함정인 줄 알았다는 소리잖아!”

육천경의 구겨진 인상이 한층 더 구겨졌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육천동이 그 말에 동조했다.

“우리가 꾸민 일임이 드러날 일은 없겠지?”

“마풍단원들이야 아는 게 없다 해도 흑도의 노물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풍단주가 사망을 확인한 자는 한 명뿐이라 했으니 두 노물은 잡혔다고 봐야지요.”

괜한 기대는 마라는 소리다.

“명색이 흑도의 노물들인데 쉽게 입을 열까?”

육천경이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육천동은 그런 사촌 형의 기대를 그냥 부숴 버렸다.

“멸왜단의 주축이 정파인 보타문이라 고문에 문외한들임을 기대하시는 겁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왜구를 상대해왔습니다. 군문의 고문 기술자들 못지않게 고문에 능통한 곳이 멸왜단입니다.”

“대책은?”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도 이 일을 공론화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걸 공론화하면 우리도 항주 흑도의 일을 공론화하면 되니까요.”

최근 항주 흑도의 공격으로 짐작되는 일들에 상당한 피해가 있었던 육가장이다. 육가장 초극 고수의 행보를 실시간으로 꿰뚫고 후려치던 그 공격을 생각하면 초극 고수를 감지할 수 있다는 벽력응주의 매가 동원되었음이 분명했다.

물론 그 일의 주체가 항주 흑도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증인 몇 만들어 내는 것은 육가장의 역량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항주 흑도에 매를 빌려 준 일을 공론화해서 항주 흑도가 그 매로 벌인 일을 물고 늘어진다면 우리가 뇌응대주를 공식적으로 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됩니다.”

암중으로 손을 쓰는 것은 조심스럽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명분을 얻어 손을 쓸 수 있다면? 동원할 수 있는 힘의 단위가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멸왜단은 본가와 전쟁을 각오해야 합니다.”

뇌응대주의 매들을 포기할 수 없는 멸왜단이다. 육가장이 뇌응대주의 목을 원한다면 기를 쓰고 막아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암중의 수작은 뇌응대주의 그 잘난 매를 활용한다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육가장과 본격적인 전쟁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멸왜단이 지금 본가와 전쟁을 벌여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왜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 지금 멸왜단이 육가장과의 전쟁에서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전쟁에서 지면 뇌응대주를 잃는다. 왜구들의 약탈에 신음하는 절강에서 왜구를 근절할 최고의 패를 잃는 것이다.

육가장이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 멸왜단인 것이다.

“급보입니다.”

수하 하나가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냐?”

육천동이 묻자 수하가 급히 입을 열었다.

“멸왜단이 벽력응주 암살 시도와 선풍장의 일을 공개했습니다.”

그 말에 육천경의 노성이 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야! 공론화 못 시킨다며!”

“진정하시지요.”

“진정?”

“일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차분히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야지요.”

원론적인 만큼 옳은 말이다.

“흐음.”

육천경은 사촌 동생의 말대로 슬그머니 호흡을 조절해 노기를 가라앉혔다.

“그래서 멸왜단이 이번 일의 배후로 우리 육가장을 지목하고 비난을 시작했느냐?”

사촌 형을 진정시킨 육천동이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저 암중 세력의 수작이라 발표했습니다.”

“암중 세력? 그저 암중 세력이라?”

수하의 대답에 육천동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멸왜단 놈들의 고문 실력이 생각보다 시원찮은 모양이군.”

육천경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

그와 반대로 육천동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멸왜단,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것들이!”

그리고 흘러나오는 노성.

육천경은 명색이 육가장의 소가주다. 사촌 동생의 반응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더 보고할 것 없으면 나가 봐라.”

육천경의 말에 수하가 냉큼 물러났다.

“네 반응을 보니 우리를 배후로 지목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인 듯한데?”

육천경이 사촌 동생에게 물었다. 하지만 육천동의 입에서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형님, 당장 가흥부와 송강부의 휘하 세력들에게 갑종 경계 태세를 내려야 합니다. 지원도 보내고요.”

“왜?”

“송강부는 암중 세력을 타도한다는 핑계로 멸왜단이 들이칠 겁니다. 가흥부는 항주 흑도가 도발할 가능성이 크고요!”

“눈치 빠른 아저씨네.”

히죽 웃으면서 서생원 시리즈가 보낸 영상을 껐다.

하지만 육천동의 대응은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육가장의 솔가(率家)로 송강부를 지배하던 심가장은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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