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절강행(36)
“친자 확인이 필요한 일입니까?”
“친자 확인? 그래, 친자 확인이 필요하다네.”
조구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정인지요?”
“별일 아니네. 부잣집 아들놈이 기녀를 임신시켜서 후처로 들였네. 그런데 태어난 애가 아비를 닮지 않은 탓에 난리가 난거지.”
“그런데 단철귀수께서 이런 일에도 관여하시는 겁니까?”
항주 흑도의 일곱 거물 중 하나인 단철귀수 조구흥이 직접 챙기기에는 뭔가 격이 맞지 않은 일 아닌가.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뒷말 나올 일이면 곤란합니다만?”
일 자체야 어디서나 일어날 일이지만 조구흥이 나서는 일이었다. 그 일의 당사자들이 조구흥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위치의 작자들이란 말이다.
여염집에서 일어났다면 별것 아닌 일도 그 일이 일어나는 집안의 위치에 따라서 여러 사람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일이 될 수도 있기에 슬쩍 빼는 소리를 해봤다.
“자네가 매를 거둬 가면 아쉬운 건 나네.”
그 말대로다. 매 때문이라도 조구흥은 나와 척을 지지 못한다.
“어디의 부잣집입니까?”
그래도 최소한 상대는 확인을 해야 했다.
“호광 무창의 조가네. 무림의 세가는 아니고 장군가야.”
“장군가…. 그런데 조가라고요?”
눈앞의 영감님도 조 씨 아닌가. 혹시나 하고 조구흥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런 내 눈초리에 조구흥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한집안이네.”
세상은 넓고 사연은 많은 법. 멀쩡한 장군가의 혈족이 흑도의 노괴가 되는 일도 다 있다.
“지금 가주가 장조카고. 이번 일의 당사자가 막내 조카네.”
“근데 보통 이런 일이면 조카 편을 들지 않습니까?”
말투를 보면 어째 막내 조카보다는 후처로 들어갔다는 기녀를 편드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이 기녀지 반쯤 제자 같은 아이였네. 말년에 심심한데 정식 제자로 들여서 키워 볼까 하고 생각하던 중에 조카 놈이 홀랑 업어간 것이지. 일 년에 코빼기라고는 두어 번 비치던 놈이….”
호광 무창에 사는데 절강 항주에 일 년에 두 번 오는 거면 자주라 할 수 있지 않으려나?
“어떻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런 일에서 진실은 마냥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기에 물을 수밖에 없다.
“그냥 자네는 사실 그대로 말해 주면 되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일이 잘못되어도 원망하지 마시기를.”
“하, 자네는 내가 약관의 애송이로 보이는가?”
내 말에 조구흥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조구흥을 따라 발을 옮겼다.
조구흥과 함께 도착한 곳은 상화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적한 장원이었다.
“너희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왔으니 다들 나와 보거라.”
조구흥이 대청에 자리 잡고 소리를 치자, 잠시 후 중년의 남자와 아기를 안은 이십대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숙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요?”
중년 남자가 조구흥에게 물었다.
“막내 조카인 조자호네. 저쪽은 후처인 호상아. 이쪽은 절강에서 이름 높은 명의인 염왕적의 이도연, 절강 무림에서는 ‘벽력응주’라는 무명이 더 높기는 하지만 내 평생 본 의원 중 최고의 명의라 할 수 있네. 내 어렵게 모셨지.”
조구흥이 내 얼굴에 금가루를 뿌려댔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입니다만?”
중년 남자 조자호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조구흥의 말에 토를 달았다.
“네놈 견문이 얕아서 그런 거다.”
조구흥의 으르릉거림에 조자호가 입을 다물었다.
“노야, 이 분 의원께서 어떻게 우리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인지요?”
아기를 안은 미녀 호상아가 조용히 물었다.
“이 의원은 피 맛을 분별한다.”
“예?”
조구흥의 대답에 호상아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피 맛을 들먹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전문적인 것은 내 잘 모르니, 자네가 설명하게.”
조구흥이 나에게 떠밀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듯 피가 다릅니다. 하지만 피는 물려받는 것이기에 집안마다 독특한 형질이 있지요. 저는 그것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겁니다.”
대강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피 맛을 보아 집안사람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오?”
“직계 가족은 확실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조자호의 말에 내가 확답을 했다.
“어느 정도의 피가 필요하오?”
조자호가 바로 물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였소. 그러니 꼭 피가 아니라 머리카락으로도 가능하오.”
내 말에 조자호가 자신의 머리로 손을 올렸다.
“제대로 뽑은 한 올이면 족하오.”
조자호가 자기 머리를 뭉텅이로 뽑기 전에 한마디 한 후, 내가 직접 뽑았다.
“잠시 실례하겠소.”
그리고 호상아에게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안고 있는 아기의 머리카락 하나를 뽑았다.
머리칼을 뽑으며 아기 얼굴을 봤는데 아기가 조자호를 안 닮기는 안 닮았다.
= 어릴 때는 잘 안 닮을 수도 있지?
- 이렇게 안 닮은 경우는 좀 드뭅니다. 보통 한쪽은 닮기 마련인데….
농꾼의 말대로다. 아기는 모친인 호상아와도 별로 닮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머리카락을 차례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 친자 확인 들어갑니다.
농꾼이 모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결과가 나왔다.
- 99.87%의 확률로 친자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조자호의 애가 아니라는 소리다.
- 노선배,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만?
슬쩍 조구흥에게 전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 전음에 조구흥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실만을 말하게.”
조구흥이 단호히 말했다.
“친자가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내 말에 호상아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노야! 가가! 그럴 리가 없어요!”
“내 너를 믿었는데!”
조구흥의 얼굴색이 분노로 물들고 있었다.
“하아!”
조자호는 허탈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가가, 저는 가가 말고 절대 다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만하자.”
“가가!”
21세기의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만한 막장이 이제 실시간으로 눈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 대상의 생체 리듬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만?
농꾼이 호상아의 반응에 한마디 했다. 거기에 갑자기 생각나는 아침 드라마의 막장 전개가 하나 있었다.
“모두들 진정해 주시겠습니까? 아직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더 뭐를 확인한다는 말인가? 뭐 그런 눈초리다.
“부인, 부인의 머리카락을 하나 뽑겠습니다.”
호상아에게 허락을 구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 물었다. 그리고 결과가 나왔다.
- 99.89%의 확률로 모자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역시.”
아침 드라마라면 뭔가 한층 더 나아간 막장으로 가는 듯한 전개다.
“부인의 아이도 아니군요.”
내 말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는 건 무슨 의미지요?”
호상아가 물었다.
“그 말대로의 의미입니다. 부인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호상아가 낳은 아이일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인공수정한 수정란을 호상아에게 착상시켜 그녀를 대리모 삼아 태어난 경우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농꾼이면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
어쨌든 일반적으로 유전자 검사에서 불일치 판정을 받았다는 것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꿔치기 당했다는 말인가?”
조구흥이 물었다.
“임신과 출산이 거짓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그러지 않을까요?”
내 말에 조구흥이 자신의 막내 조카를 노려보았다.
“아이를 받은 산파가 누구였느냐!”
아이를 바꿔치기 하려면 산파의 회유는 필수다.
“그것이….”
조자호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대강 산파의 출신을 통해 범인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 듯한 얼굴이다.
“전부 마님이 꾸민 일이군요.”
조자호가 짐작하는 것을 같은 집에 사는 호상아가 하지 못할 리 없다.
아침 드라마의 전개가 불륜에서 시작해서 안방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로 흘러가고 있다.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것이 현명한 처사.
“제가 할 일은 끝난 듯하군요.”
“그런 것 같으이. 지금은 시기가 안 좋은 듯하니 나중에 이야기하세.”
내 말에 조구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물러나려는데….
“멈춰!”
조자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보이며 말이다.
“뭐 하는 짓이냐?”
이에 조구흥이 재빨리 나섰다.
“숙부, 저 의원을 그냥 이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뭐?”
막내 조카의 말에 조구흥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문의 명예가 걸려 있는 일입니다.”
나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말로 들을 수밖에 없다. 조구흥이 도와 달라 해서 그냥 도와줬을 뿐이다. 그런데 이 일로 나에게 어떤 제재가 들어온다?
“조 노선배, 지금….”
조구흥에게 내 심기를 드러내려는 순간, 조구흥이 먼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터트렸다.
“이 정신 나간 놈이! 가문을 말아먹으려 작정을 했구나!”
퍼퍼퍽, 콰직 퍼헝!
순식간에 터져 나온 초극 고수의 손짓에 조자호의 전신이 걸레마냥 구겨져서 뒤로 튕겨 났다.
“노야!”
호상아가 기겁을 해서 조구흥을 잡았다.
“놔라! 저 앞뒤도 모르는 얼간이 놈, 단매에 쳐 죽여야 해!”
“노야, 더 때리면 진짜 죽습니다.”
“그냥, 지금 죽여야 해!”
조구흥이 노성을 내지르며 조자호를 향해 다가가려 하지만 호상아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크윽, 큭!”
조자호가 피를 한 사발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농꾼이 아무 소리 없었으니 초극은 아니다. 내 감각으로는 꽉 찬 절정 정도, 경철운과 비교할 만한 것이 조자호의 무위다.
무슨 소리냐 하면 제대로 된 초극 고수인 조구흥이 진짜 눕힐 작정으로 손을 썼다면 저렇게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숙부, 다짜고짜 이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냐고?”
조자호의 외침에 조구흥이 나를 슬쩍 본다. 내가 알아서 하시라고 나설 생각 없다고 두 손을 들어 떠밀어 보이자 조구흥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조카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막내 조카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본가에 어떻게든 피해가 안 가게 하려는 늙은 숙부의 발악이지.”
“예?”
조구흥의 말에 조자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눈에는 저기 저 사람, 이가에 ‘도연’이라는 이름을 쓰고 ‘염왕적의’라 불릴 정도의 의술을 지녔고, ‘벽력응주’라 불리는 무력을 지닌 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냐?”
“그, 그야….”
“이 숙부가 분명히 말했다. 어렵게 모셨다고. 네가 볼 때 숙부는 어떤 사람이냐?”
“그것이….”
“땅 위의 천당이라는 항주의 이권을 움켜쥔 흑도의 노괴다. ‘항주칠선’이라 불리는 흑도의 거물이야. 나만 해도 무창의 본가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 본가가 장군가라 해도 성의 군권을 죄다 틀어쥔 도지휘사도 아니잖아. 한 성에서도 상관이 한 손으로 다 못 셀 정도로 있고, 동급은 양손을 넘어서서 발가락을 동원해야 하는 지휘사밖에 안 되잖아!”
지휘사만 해도 정3품의 고관이다. 뭐 정2품인 도지휘사랑 비교하기에는 무리지만 어쨌든 만만한 집안은 아니다.
“숙부, 지휘사는 그런 단순한….”
“초극 고수인 내가 독한 마음먹고 본가를 후려치면 지휘사의 휘하 병력으로 막을 수 있을 듯 싶더냐?”
“본가 휘하 천호 중 초극 고수가 둘이고, 아시다시피 큰형님도 초극입니다.”
“본가 휘하 다섯 천호 중에 초극이 둘이다? 게다가 가주인 장조카도 초극이니 막을 수 있다? 허허, 이리 순진할 줄이야. 누가 초극이 셋이나 버티고 있는 집구석에 정면으로 덤벼든단 말이냐. 야밤에 초극을 피해서 후려치고 방화를 한다면?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
“너는 막는다고 장담을 못 하지? 하지만 나는 야습에 방화까지 확실히 할 수 있다 장담한다.”
조구흥 저 영감님은 내가 빌려 준 매로 육가장을 후려쳐 봤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다.
“본가는 장군가 입니다. 숙부가 본가를 치신다면 조정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 숙부 돈 많고, 항주에 놀러 오는 고관들과 면이 아주 많다. 그들에게 몇 십만 냥 안겨 버리면 조정이 누구 편을 들까? 망한 장군가 편을 들까? 아니면 아직 가져다 바칠 돈 많은 숙부 편을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