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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53화 (53/175)

53화

염가동과 계면술법(02)

“슬슬 일어나보지?”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바로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칼을 잡는다.

“하아.”

상대를 확인하기 무섭게 한숨부터 나온다. 잠을 잘 때도 귀를 열어 놓아 팔방을 살피는 나지만, 저 인간의 기척은 목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천문위와 초극의 차이인가?

“기척은 좀 내고 다니지?”

“우리가 나쁜 사이는 아니지만, 만천하에 드러낼 관계는 아니잖아.”

내 말에 녀석이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맞는 말이긴 하다. 나와 저 녀석의 관계는 무림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

“무슨 일이기에 예까지 걸음 하셨나?”

절강에서 산동까지 일이백 리 길도 아닌데,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나에게 시킬 일이 있는 것이다.

“살마제일도가 나서 줘야겠어.”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소리다.

“육가장을 들쑤시라고?”

녀석이 시키면 할 수밖에 없는 게 내 입장이지만, 솔직히 육가장 같은 거대 세력은 다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왜구 하나 잡는 일에 초극 고수들을 몇이나….

“육가장처럼 부담되는 상대가 아니야.”

녀석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육가장이 아니다? 육가장 말고 살마제일도라는 허깨비가 필요한 곳이 있나?”

다른 곳을 상대로 뭔가를 해야 한다면 굳이 살마제일도의 이름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 이름을 써 봐야 육가장의 이목을 집중시킬 뿐 아닌가.

“처주부의 철산맹.”

녀석이 간단하게 답한다.

“철산맹? 아!”

절애도주 시절 얼핏 들어본 방파였다.

“절강 내륙의 방파지만 멸왜단과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의 상대다.

“나도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왜구를 부려 뒤통수를 치더군.”

“언제까지 절강으로 가면 되지?”

내 말에 녀석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연다.

“당장.”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진짜 사람 험하게 쓰는 녀석이다.

“그럼, 같이 가는….”

미치고 환장하겠군. 잠시 한숨을 쉰다고 눈을 뗐을 뿐이다. 그런데 녀석은 내 시야에서 벗어나 완전히 사라졌다.

무서운 천문위!

***

산동의 내 거처에서 절강 처주부 부도까지는 삼천 리 길. 계면술법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 눈을 피해 열심히 달려 닷새 만에 도착했다.

처주 부도의 허름한 객잔의 구석진 방을 잡았다.

“인터페이스.”

내공을 억제하고 외우는 계면술법의 주문에 눈앞으로 이제는 익숙한 문양이 떠올랐다.

“흠.”

전에 없던 서책의 문양이 파란빛을 발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으로 슬쩍 건드리자 서책이 펼쳐지며 글자들을 늘어놓는다.

철산맹, 처주부의 패권을 쥔 세력. 처주부는 산이 많은 고장이라 나무꾼과 광부가 많다. 철산맹은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만든 모임으로 시작됨. 임업과 광업에 관련된 이권이 많음.

대강 그렇게 시작되는 철산맹 관련 정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 또한 수록되어 있었다.

내가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매 대가리의 문양이 글자를 토해내고 위치 추적이 떠오른다. 그리고 몇몇 인물들이 그 대상으로 선정되어 매의 시야에 확연하게 표시되었다.

그들은 서책에 기록된 인물들, 살마제일도가 목표를 달성하는데 제일 큰 방해가 되는 자들이었다.

바로 철산맹의 초극 고수들.

“계면술법에 이런 식으로 개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망할 이도연의 대단함에 감탄이 떠올랐다. 그리고 드는 의문. 직접 찾아올 것이 아니라 그냥 이걸로 명령을 전하면 되지 않나?

“아니면 전날 왔기에 이렇게 술법에 개입할 수 있었던 건가?”

어쨌든 내가 쓰는 계면술법도 그의 통제 아래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저항할 생각 따위 깡그리 없애 버리는 이가 놈이다.

계면술법 안의 서책 덕택에 따로 정보를 모을 필요는 없다. 그러니 몸을 추스르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기 무섭게 첫 목표를 향해 발을 움직였다.

처주 부도에서 서쪽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태산(台山) 산중에 자리 잡은 금광이 목표다.

철산맹에서 운영하는 금광 중 채산성이 가장 좋은 곳이란다.

화약도 없는데 어떻게 금광을 무너트리라는 거야!

조용히 광산으로 들어와 그렇게 고심을 하고 있는데, 눈앞으로 갑자기 화살표가 생겼다.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는데 계면술법이 제멋대로 펼쳐진다. 계면술법 안의 서책에 있던 내용인지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다시 한 번 이가 놈이 두려워진다.

“후우, 하.”

심호흡으로 그 두려움을 떨쳐내며 화살표의 인도대로 광산의 심처로 발을 옮겼다.

금광의 갱도 안으로 꽤 깊이 들어왔다 싶으니 화살표가 사라졌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다! 허깨비처럼 뒤가 비쳐 보이는 내가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다!

내가 칼자루를 쥐자 내 얼굴을 한 허깨비가 몸을 돌려 내게 등을 보인다. 그러고는 내가 가진 것과 같은 왜도를 뽑아 광산 갱도의 버팀목을 향해 휘둘렀다.

허깨비의 칼이라 그런지 칼을 맞은 버팀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 않았다.

허깨비의 칼이 지나간 버팀목에는 그 궤적을 따라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글자가 떴다.

저 허깨비를 따라 버팀목에 칼질하란다. 선이 그어진 만큼만 칼을 박아 넣으라는 말도 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대강 알겠다.

버팀목을 향해 왜도를 휘두른다. 허깨비가 나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면 나는 그 뒤를 따른다. 허깨비가 표시를 하면 나는 그 표시를 따라 칼질을 한다.

허깨비가 빨라진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칼을 빨리 휘둘렀다. 그렇게 허깨비 뒤를 따라 칼을 휘두르며 밖을 향해 발을 옮겼다.

갱도 밖으로 나온 허깨비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왜도를 하늘 높이 쳐들었다.

허깨비의 칼이 빛났다. 강기보다 더한 빛을 뿜으며 커다란 갱도 입구를 향해 커다란 궤적을 그렸다. 그러고는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지막은 호거술로 큰 거 한 방 날려라. 그거지?

“끼요옷!”

전력을 다한 내 기합성이 밤하늘을 울렸다.

쾅, 콰콰쾅, 콰르르릉!

금광의 갱도가 굉음과 흙먼지를 내뿜으며 무너졌다. 적당한 곳에 남겨야 할 글을 남기고 객잔으로 돌아왔다.

***

이가 놈은 진짜 악귀 같은 놈이다. 내가 이놈에게 머리 숙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 같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놈이 찍어 준 금광과 은광 몇 곳을 붕괴시키면서 살마의 무사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던가, 살마의 무사는 배신을 용서 않는다는 등의 살마제일도를 떠올릴 수 있는 글귀 몇 자 적어 놓은 것이 다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철산맹 총타에서 사람들이 쭉쭉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철산맹이 운영하는 남은 광산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계면술법에 위치 추적이 되도록 등록된 초극 고수들도 동원되고 있었다.

성동격서의 뻔한 계책이지만 철산맹은 광산을 지키는데 온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광산은 잠채가 아니라 관에서 정식으로 불하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광산이 박살나면 나라에서 정해준 세를 바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무능한 관리로 낙인찍혀 쫓겨나는 것이 지방관의 운명.

당장 들어오는 뇌물도 좋지만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더더욱 좋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지방관들이다.

그러니 철산맹이 광산 경비에 힘을 쏟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살마제일도란 놈에게서 광산을 지키지 못하면 불하된 광산을 몰수하겠다는 극단적인 패까지 꺼내 들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초극 고수 여섯이 몰려 있어 들이치기 부담스러운 철산맹 총타가 초극 고수 둘이 있는 해볼 만한 장소로 바뀐 것이다.

“인터페이스.”

계면술법의 주문을 외우고 문양이 뜨자 술법을 침투에 알맞게 조정한다.

총타 안에 남은 초극 고수 둘 중 한 명은 철산맹주인 단구초자 경구전이다.

절강에서 손가락 안에는 못 들어도 발가락을 동원하면 반드시 그 안에 들어간다는 묵을 대로 묵은 초극 고수, 마주쳐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인물이다.

직선거리로 이십 장 안에 들어선다면 무조건 경고가 뜨도록 만들었다.

“오프.”

계면술법 조정을 끝내고 몸을 움직인다.

계면술법이 장원과 그 일대를 단면도로 나타내고 번초와 자신의 위치를 그 위에 점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계면술법의 도움을 받아 번초를 피해 철산맹 총타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발을 움직였다. 계면술법의 인도에 따라 바닥을 기고 담을 뛰어넘는다. 목표가 자리 잡은 건물을 향해 그렇게 거리를 줄였다.

목표는 철산맹의 소맹주. 당연히 그 주위에는 호위들이 포진해 있다. 단순히 보이는 놈들이 다가 아니다.

이가 놈이 붙여 준 매는 술법으로 키운 놈이라 사람의 체온을 볼 수 있다. 그런 매의 눈에 몸을 숨기고 있는 호위의 위치가 드러났다. 살수를 대비하기 위해 살수 수업을 받은 놈들인 듯하다.

드러난 절정 둘, 숨은 절정 하나에 일류 열, 그리고 목표는 초극.

목표와 호위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 실력을 가늠하니 내가 움직일 동선이 대강 그려졌다. 그렇다면 이제 기다릴 필요가 없다.

왜도를 뽑아 들고 바닥을 박찼다.

와장창!

단숨에 창을 박살내고 건물 안으로 뛰어든다.

“끼요옷!”

호거술로 강기를 강화하며 왜도를 휘두른다.

파파파팟!

칼이 거침없이 공간을 가른다. 걸려드는 것은 검과 칼, 사람 몸을 가리지 않고 동강낸다.

인의 장벽? 기껏해야 일류 무인들이다. 초극이 작정하고 휘두르는 도격 앞에서는 피와 육편이 되어서 뿌려질 뿐이다.

쾅!

굉음과 함께 목표의 몸이 뒤로 튕겨 났다.

명색이 초극 고수라고 내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습격이다!”

“살마제일도다!”

내가 그린 동선 밖에 위치한 탓에 살아남은 호위들이 경고성을 토했다.

저딴 것들 신경 쓸 필요 없다.

“끼요옷!”

다시 한 번 호거술을 발휘해 강기를 강화하며 목표를 덮친다.

캉, 카캉!

강기에 휩싸인 육중한 도끼를 방패처럼 움직여 내 공격을 막아낸다.

인상을 구기는 꼴이 있는 힘을 다해 버티는 것으로 보였다.

“죽어!”

그 틈에 호위들이 내 뒤를 덮쳐든다. 그리고 동시에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림자.

절정 호위 셋의 동시 공격. 이런 뻔한 수작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니 내가 그린 그림대로 되어 간다.

탁!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떨어져 내리는 그림자를 후려쳤다.

캉!

금속성과 함께 그림자가 뒤로 튕겨 나가지만, 나는 의도대로 목표의 머리 위를 타 넘어 그 후방으로 내려선다.

카카카캉!

금속성이 들린다. 내 뒤를 노리던 절정 호위 둘의 공격이 내가 사라짐에 목표를 잃고 호위 대상을 덮친 것이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공격이라 절정 둘은 그걸 멈출 수도 없었고, 경철하 역시 절정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공격을 무시할 수 없어 막을 수밖에 없다.

적을 뒤에 두고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죽여 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죽여 달라는데 죽여 줘야지.

“끼요옷!”

파핫!

내 쪽으로 몸은 돌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사선으로 내려친 궤적을 따라 몸이 두 동강났다.

“맙소사!”

“소맹주!”

호위들이 사색이 되어 악을 내지르는데, 순간 눈앞이 시뻘겋게 물든다. 계면술법의 효과다. 철산맹주 단구초자 경구전이 달려오고 있다는 경고!

바로 몸을 돌리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서라!”

뒤에서 터지는 노성! 돌아볼 필요 따위는 없다. 그냥 달리고 달린다.

***

처주부를 빠져나왔다. 허름한 낭인 복장을 치우고 적당히 먹고 사는 듯한 무인 복장으로 금화부로 들어섰다.

평범한 객잔에서 방을 잡고 지친 몸을 쉬게 했다.

그렇게 눈 좀 붙여서 얼마간 잤을까?

“사람이 왔으면 일어나 봐야 하는 거 아냐?”

기척도 없이 들려오는 이가 놈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일은 다 끝냈을 텐데?”

일 끝나기 무섭게 찾아오는 이가 놈에게 좋은 얼굴이 될 수가 없다.

“은자 이만 냥 정도 들고 이쪽으로 가 봐.”

철산맹의 금광 몇 곳을 붕괴시키면서 주워 온 금괴가 정확히 열 관, 금자 일천 냥이다. 은자로는 이만 냥, 이번 일을 하면서 내가 얻은 돈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돈을 내주고 천랑 석무제의 물건을 찾으러 왔다고 하면 될 거야.”

뼈 빠지게 일 시키고 돈까지 뜯어 가다니!

“이건 너무 하지….”

불평을 다 말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이가 놈이다.

“하아!”

한숨밖에 안 나오는 상황. 하지만 별수 없다. 녀석이 가라는 곳으로 갔다.

항주부 외곽의 한적한 장원이다.

“어떻게 오셨소?”

“천랑 석무제의 물건을 찾으러 왔소.”

“석 달에 한 번 오기로 한 분이구려. 이쪽으로 오시오.”

석 달에 한 번? 석 달마다 이만 냥을 뜯겨야 한다고? 분노로 주먹이 부들거린다.

따라가니 나오는 것은 물 위에 떠 있는 나룻배 한 척이다. 무언가를 잔뜩 실은….

“은자 이만 냥이오.”

마음 같아서는 ‘못 줘!’라고 외치며 칼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눈앞의 사람은 그냥 하수인일 뿐이다.

이만 냥을 내어 주고 나룻배에 올라탔다.

띠링!

귓전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계면술법이 펼쳐졌다. 그리고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듯 빛을 발하는 서책 문양.

“하아!”

짜증의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눈앞으로 글자들이 떠오른다.

항주 비단 오백 필.

경사 유통가 필당 은자 백사십 냥.

석 달마다 오백 필씩, 연간 이천 필 확보.

수익금은 염가동의 월봉과 활동자금으로 전액 사용할 것.

“맙소사!”

이걸 팔면 다 내 것이라고?

떠오른 문자들을 계속 읽는다. 항주에서 경사까지 이동 경로가 짜여 있다. 대운하를 이용한 경로가 아니었다.

경사의 물가가 비싼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각지의 수로와 관문을 지날 때마다 내야 하는 통행료와 세금이다.

그런데 이가 놈이 제시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면 팔십 번 가깝게 내야 하는 통행료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걸 그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그 수익은….

이십만 냥! 연에 은자 이십만 냥이다!

절애도주 진자동으로 살았을 당시에도 한 해 은자 일만 냥 정도 쥐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 해 은자 이십만 냥이라니! 산동에 태산파의 속가가 넘쳐나던 시절, 가장 강력한 세를 형성했던 속가방파의 일 년 운영비를 뛰어넘는 금액이다.

이런 거금이 매년 보장된다면 내 죽기 전에 태산파가 산동에 우뚝 서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파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예를 올렸다.

“내 죽는 날까지 충성을 다하겠소!”

10년? 이 대인, 내 당신 바짓가랑이를 잡고서라도 평생 붙어 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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