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절강행(32)
- 붕괴음이 통로 양쪽에서 발생. 탈출보다는 쉘터 제작을 추천합니다.
농꾼의 말이 귀를 두드리는 동시에 눈으로는 화면이 떠올랐다. 버팀목들을 향해 도강을 날리는 영상이다.
“도연 형, 빨리 빠져나가지요.”
“기다려!”
막 바닥을 박차려는 화인천을 말로 잡으며 영상을 따라 칼을 휘둘렀다.
“형님!”
갑작스레 칼을 빼들고 칼질 하는 나를 보고 화인천이 화들짝 놀랐지만, 지금 그런 거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팍, 파팟!
내 주위의 버팀목은 물론, 멀리 떨어진 버팀목도 도기를 뻗어 잘라냈다. 재빨리 순서대로 버팀목에 칼질을 마친 나는 영상의 마지막 행동을 따랐다.
“엎드려!”
화인천을 잡고 바닥에 엎드렸다.
쿠르르릉! 콰콰쾅!
굉음과 함께 버팀목과 흙더미들이 우리를 덮쳤다.
그리고 얼마 뒤 진동이 멎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내가 잘라낸 버팀목들이 쓰러지고 떨어지며 내 머리 위쪽에서 맞물려 있었다. 나와 화인천은 그렇게 절묘하게 만들어진 공간 안에 엎드려 있었다.
흙더미들이 그 사이로 밀려들어 오기는 했지만, 나나 엎드린 화인천이 파묻힐 정도는 아니었다.
“야, 일어나.”
일어설 공간은 없어도 앉을 공간은 있었기에 먼저 앉아 엎드린 화인천을 일으켰다.
“도연 형, 무사하신 겁니까?”
화인천이 나를 보며 물었다.
“보면 모르냐? 멀쩡하다.”
“안 보입니다만?”
내 말에 화인천이 뚱하니 답했다.
“아, 그래. 안 보이는군.”
화인천의 말에 나는 여기가 빛 한 점 없는 암흑천지임을 깨달았다.
농꾼의 영상 보정을 적용 받는 시야라 칠흑 같은 어둠과 훤한 대낮을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난데없이 통로가 무너지다니.”
“누군가가 일부러 무너트린 거야. 너와 내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말이야.”
= 농꾼, 이대로 갇혀 있어야 하는 거야?
입으로는 화인천에게 말하며 손으로는 증강현실 자판을 두드려 농꾼에게 묻는다.
- 지시대로 움직이신다면 세 시간 안에 탈출 가능합니다.
= 화면으로 띄워.
대강 내 위치가 나왔다. 마을 옆 산 아래로 통로가 파고든 것이다.
위치 다음에는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눈앞으로 영상이 흘렀다.
흙더미가 무너지지 않게 전방의 버팀목들을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리고 버팀목들이 사라져서 드러난 흙더미들을 향해 칼을 움직였다.
흙더미를 파내 내 뒤 공간으로 밀어 넣고 영상이 지정하는 버팀목들을 빼서 파낸 곳을 보강했다.
“형,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내 움직임을 느낀 화인천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거잖아.”
열심히 농꾼의 지시대로 몸을 움직인다.
“함부로 움직이면 무너지지 않을까요?”
“안 무너지게 다 계산하고 움직이는 거다.”
물론 그 계산은 내가 아닌 농꾼이 하고 있지만 말이다.
“제가 뭐 도와 드릴 일은 없나요?”
“됐어. 그냥 가만히 있어,”
농꾼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정밀한 작업이다. 영상 공유를 한다면 모를까 그냥 말로는 그 지시를 이행하기 어려웠다.
“누군지 모르지만 내 끝장을 내준다.”
손으로는 열심히 칼을 놀려 흙벽을 파면서 이를 갈았다.
“형님, 제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본가는, 철검화가는 진짜 아닙니다.”
“그거야 나가 봐야 알 일이지.”
앞의 흙을 파내어 뒤의 공간에 쌓아 두며 착실히 나아간다.
“철검화가는 왜구와 손을 잡거나 형님을 적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쫓겨난 적장자의 귀환을 바라지 않는 누군가 있는 거 아냐?”
“저 집에서 쫓겨난 거 아닙니다.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요.”
“아까 다 이야기한다 했지?”
“예.”
내가 묵묵히 손을 놀리는 와중에 화인천의 사정이 흘러나왔다.
“솔직히 저 천재 소리 듣고 자랐습니다. 거기다가 스물에 초극이 되었지요. 집안은 난리가 났지요. 드디어 본가에서도 천문위의 고수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온주 화가가 아니라 절강 화가가! 절강을 아우르는 세가가 될 수도 있다고! 그런데, 결과는 거열쌍왜 잡은 뒤에 제 꼴 봤지요? 그거예요.”
“주화입마라도 걸린 거냐?”
“아뇨, 그냥 집안의 내공인 예단심공(銳鍛心功)과 제 체질이 안 맞는 거라더군요.”
“그런데 초극이 되었어?”
몸에 맞지 않는 심법으로 초극이 되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그러니까요!”
그냥 다른 무공 익힌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철검화가는 무림 세가다. 그것도 역사가 있는, 핏줄에 최적화 된 무공을 가진 무림 세가.
예단심공은 화가의 핏줄에 적합하게 몇 대를 가다듬은 심법으로 철검화가의 근본이다.
그런데 직계의 핏줄이 그 근본과 비틀어지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걸 개인의 문제로 보고 화인천을 내치고 끝낼 수 없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 일어날 수도 있었다. 화인천 같은 체질이 언제 또 직계의 핏줄에서 튀어 나올지 몰랐다. 아니 하나둘 나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죄다 저런 체질이 될지 누가 안단 말인가.
예단심공을 버리고 다른 무공을 익힌다? 무림 세가(世家)가 세대(世代)를 이어 전할 기예(技藝)를 버린다면, 그건 세가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체질을 고칠 방법을 찾던가, 체질에 맞게 예단심공을 수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알 수 없는 체질의 당사자로 그걸 해야 하는 게 저입니다.”
“그럼 네가 멸왜단에 나와 있는 이유가….”
“실전을 통해 예단심공을 수정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것도 있고, 다양한 무공을 익힌 낭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니 그들의 견문에서 혹시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철검화가의 입장에서 화인천은 내다 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모를 횡액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고 희망. 그러니 철검화가가 이번 일을 꾸민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검원장의 생존자들을 족치는 수밖에 없나?”
코앞에서 이딴 것을 만들고 있었는데 검원장이 몰랐을 리 없다. 문제는 검원장의 핵심 인사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 야, 세 시간 정도면 된다며?
세 시간 가깝게 열심히 땅을 팠다. 하지만 초극 고수의 예민한 감각은 내가 걸어 들어온 통로의 절반 정도밖에 파지 못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 속도로는 십 분 남짓한 시간으로 나머지를 파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 앞으로 10m만 더 파시면 됩니다.
= 그럼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 밖으로 나가기 쉬운 위치에 도달합니다.
농꾼 녀석을 믿고 다시 칼을 놀렸다. 뒤에서 따라오던 화인천이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졌다.
“조용하다?”
“아, 숨쉬기가 좀 거북해져서요. 형님은 괜찮으십니까?”
화인천의 말에 산소 문제가 떠올랐다.
= 야, 어떻게 된 거야?
몸을 계속 움직이는 나는 멀쩡하지 않은가.
- 공기 중 산소 농도가 낮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산소 농도가 지금보다 2에서 3% 정도 더 떨어지면 위험해지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정상 농도의 공기를 흡입하면 바로 회복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 나는?
- 리퍼는 체내 나노 머신을 활용해 혈중 이산화탄소를 재활용해서 산소를 생성하고 있는 탓에 대기 산소 농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상태입니다.
나야 상관없다지만 인천이 녀석은 어쨌든 빨리 나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재빨리 손을 놀려 흙벽을 파냈다.
농꾼의 지시대로 10m를 더 파고 나가자 흙벽을 열심히 파내던 영상이 사라졌다.
대신 나타난 영상은 머리 위로 강렬한 도격을 휘두르는 칼잡이다. 강기까지 일으킨 도격으로 칼잡이는 천장을 잘라내고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여러 개의 선이 그려진다. 칼로, 도강으로 잘라 내어야 할 부분이다.
선을 따라 칼을 휘두를 때 천장에 칼이 들어가는 각도까지 상세히 떠올랐다.
“화인천.”
“예, 형님.”
내 부름에 인천이 녀석이 힘없이 답했다.
“업혀.”
“형님, 저 명색이 초극 고수입니다.”
내 말에 녀석이 뻗댔다.
“여기서는 앞으로 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위로 뚫고 올라가야 해. 업히지 않으면 파묻힌다.”
결국 화인천은 내 등에 얌전히 업혔다. 나는 화인천을 등에 업고 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머리 위로 보이는 선을 향해 힘껏 칼을 휘둘렀다.
파파팟!
강기가 흙 천장을 파고들며 의도된 선을 그렸다.
크르르릉!
세 번의 칼질에 천장이 흔들리며 칼질을 한 형태를 따라 천장의 일부가 내려앉았다.
그렇게 내려앉은 덩어리 위로 올라서서 다시 농꾼이 그려 주는 선을 따라 칼을 휘둘렀다.
쿠르릉! 쿠쿵!
다시 떨어져 내리는 흙더미들. 나는 그렇게 발을 옮겨 가며 계속 칼질을 했다.
그렇게 여덟 번쯤 반복했을까?
와르르륵!
흙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 리퍼, 지금입니다.
농꾼의 지시에 나는 바닥을 박차며 전력을 다한 도강을 머리 위로 날렸다.
콰콰쾅!
머리 위의 것들이 죄다 날아가며 우거진 나무와 그 사이로 내리쬐는 달빛이 나를 맞이했다.
“마을이 아니잖아?”
주위를 둘러보니 산기슭의 잡목림 속이다. 천장의 얇은 곳을 찾아서 뚫고 나온 것이다.
“형님, 내려 주시겠습니까?”
“그래.”
화인천을 내려 주니 당장 심호흡부터 하는 녀석이다.
“흐으, 하!”
체내의 모자란 산소를 그렇게 충당하는 화인천을 보고 있자니 농꾼의 보고가 올라왔다.
- 리퍼, 마을 쪽으로 습격이 있었습니다.
= 습격?
- 지하 통로 붕괴 직후 마흔 정도의 인원이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 왜구들이 숨어 있었던 건가? 피해는?
- 왜구들은 아닙니다. 근처의 산적들이랍니다. 마을 주민 몇이 다쳤지만 자철검대에게 모조리 제압당했습니다.
응 시리즈에서 찍은 영상들이 떠올랐다. 찍힌 영상들을 보니 일류 무인은 하나도 없었다. 삼류에 이류 무인들이 간간이 보일 뿐이다.
기세 좋게 마을을 들이쳤다가 마을에 대기하고 있던 철검화가의 자철검대에게 손도 못 쓰고 제압당하는 영상이다.
= 검원장이 박살 난 걸 알고 온 거군.
근처 산적이라면 검원장의 무력을 모를 리 없다. 절정 무인에 일류 무인이 열이나 있는 마을이다. 검원장의 전력이 온전한 평소라면 이쪽으로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청부를 받았다고 실토했습니다. 신호가 올라오면 마을을 습격해 죄다 몰살시키는 것으로 말입니다.
자철검대가 이미 그들을 심문했고, 응 시리즈가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 왜구 놈이 쏘아 올린 신호탄이 그거였군.
아마 일이 잘 풀리면 쏘아 올리기로 된 신호였으리라. 뒤처리 할 인원들을 불러들이는 그런 신호.
대강 왜구 놈의 심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일이 어그러졌으니 협력자의 존재를 까발리고 우리 전력을 여기다 묶어 두려는 수작이다.
= 저놈들 말고 다른 수상한 인원은?
-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대강 추슬렀으면 빨리 움직이자. 일이 급하게 되었다.”
숨을 고르고 있는 화인천을 일으켜 세워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서는 나와 화인천을 구하기 위한 땅파기가 한참이었다.
지하 통로를 따라 땅이 여기저기 꺼졌기에 파볼 만한 곳이 여럿이었다. 그 사이에 철검화가의 분가에서 지원이 도착했는지 땅을 파헤치고 있는 무사가 쉰이 넘어 보였다.
“어떻게 된 건가?”
나를 보기 무섭게 화지철이 어리둥절한 눈이 되어 묻는다. 당연했다. 땅속에 파묻혀 있는 걸 구하기 위해 지금 한참 삽질하는 중 아닌가. 그런데 그 구조 대상자가 땅 위를 활보하고 있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지하의 통로를 발견하고 인천 아우와 함께 조사하던 중에 무너지더군요. 의도적으로 무너트린 듯합니다. 다행히 지상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터라 천장을 뚫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충 둘러대고는 알아낸 것들을 화지철에게 알렸다.
“통로의 규모가 상당했습니다. 왜구 놈들이 하루 이틀 만에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분명 놈들과 손을 잡은 세력이 있습니다. 검원장의 사람들에게 알아보는 것을 권합니다. 최근 주위에서 뭔가 공사를 한 세력이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통로에 대량의 버팀목이 사용되었습니다. 제대로 건조된 버팀목들이었으니 그쪽으로도 알아보시기를.”
“자네는 따로 움직이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초극 왜구가, 거열쌍왜가 일이 실패했음에도 뒤처리를 위해 준비된 산적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뻔하지 않습니까?”
화지철의 말에 내가 답했다.
“협력자를 일부러 드러내어 우리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겠다는 거군. 아직 왜구들이 노리는 게 있다는….”
내 귀는 화지철의 말을 더 듣지 못했다. 농꾼 녀석의 보고가 귀를 때린 탓이다.
- 리퍼, 멸왜단 평양 분타가 습격 받고 있습니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