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절강행(24)
화선방의 지하 뇌옥.
창살로 구분된 독방에 한 명씩, 세 개의 독방이 나란히 연결된 모양새다.
“이렇게 몰려온 것을 보니, 우리의 처우에 대한 결론이 난 듯 하구려.”
가운데 독방에 들어앉은 ‘경’이라 불린 작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자신만만하네. 자신만만해.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대머리 녀석의 독에 항주 흑도의 초극 고수 다섯이 한 자리에서 몰살당할 뻔 했으니 말이다.
“그래, 결론이 났지.”
평현이 웃으면서 오늘 잡은 놈을 창살 앞에 던져 놓았다.
“조용히 들어오기에 조용히 잡았지. 피해도 소란도 없이 조용히 말이야.”
평현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나 없었으면 오늘 줄초상 치러야했던 것이 항주 흑도였다. 하지만 뇌옥에 감금되어 있느라 사정을 알 수 없는 경이다.
평현의 거짓말에 얼굴이 급격하게 굳고 있다.
“살마제일도 흉내로, 너희가 살마제일도가 아니라고 증명해 줄 놈은 이제 없다.”
평현이 고문으로 엉망이 된 대머리를 툭툭 차며 웃었다.
“진범이 잡혔잖소! 그런데 우리를 계속 억류할 생각이란 말이오!”
경이란 놈이 목소리를 높였다.
“진범이 아니라 공범이지.”
“그런 억지가 육가장에게 통한다 보시오?”
경의 우측 독방에 들어앉아 있던 청이란 놈이다.
“육가장이 부린 수작을 우리가 한두 번 겪었는지 아나?”
평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육가장이 이번 일을 크게 신경 쓸 거 같아? 쓰기는 쓰겠지. 독을 쓰는 놈을 포함해서 쓸 만한 놈을 넷이나 보냈는데, 큰 재미를 보지 못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너희를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은데? 너희를 위해서 육가장이 시시비비를 따질 것 같아? 제 놈들이 한 짓이 있는데? 뭐, 너희들이 육가장에서 키운 놈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아니잖아.”
평현의 말이 좀 이상한데?
- 저 녀석들 육가장에서 보낸 놈들 아닙니까?
조구흥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 육가장에서 보낸 놈들은 맞네. 하지만 평 형님 말씀대로 육가장에서 키운 놈들은 아니야.
조구흥의 대답도 묘했다. 그럼 식객이라는 소린데….
“…….”
평현의 말에 놈들은 아무 소리를 못하고 있었다.
평현은 놈들을 향해 들고 온 칼을 뽑아 들었다.
“이 칼의 주인은 누구냐?”
평현의 물음에 경의 좌측 뇌옥에 앉은 자가 손을 들었다.
휭!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평현의 손에 들린 칼이 사라졌다.
팍!
그리고 원래 주인의 가슴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초극 고수라 해도 공력이 제압당한 상태에서 칼이 심장을 뚫었다. 도저히 살아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육신이 차디찬 뇌옥의 바닥 위로 허물어졌다.
“너희 두 놈은 저렇게 곱게 죽기를 바라지 마라.”
평현이 전신으로 살기를 피워 올렸다.
- 우리는 이제 나가지.
조구흥의 전음에 나는 슬그머니 그 뒤를 따랐다.
아니 이러려면 나는 여기에 왜 데리고 들어온 거야?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뇌옥 밖으로 나왔다.
“육가장 놈들 이삼 년에 한 번씩 저런 놈들을 항주로 보내지.”
조구흥의 말이다.
“자주 있는 일이란 말입니까?”
“넷이나 몰려 온 건 처음이네. 독을 쓰는 자가 온 것도 처음이고. 보통 하나둘 정도 들어와서 난리를 피운다네.”
“그걸 항주 흑도에서는 보고만 있었습니까?”
“살아 돌아가는 놈은 열에 한둘이었지.”
눈이 커질 수밖에 없다. 육가장은 이삼 년마다 초극 고수 하나 혹은 둘을 소모했다는 소리다.
“육가장 놈들은 초극 고수를 좌판 물건 떼 오듯 어디서 떼 오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자체적으로 키운 게 아니라는 평현의 말이 있었기에 하는 소리다.
“흑도제일세, ‘중원 유일의 흑도세가’라는 위명이 만들어 내는 저력이지.”
“그 유명세로 독행거마들을 흡수해서 이런 짓을 한다는 겁니까?”
“귀찮은 것 싫어해 자기 세력도 만들지 않는 독행거마가 육가장 같은 거대 세력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할 리 없지. 대다수가 재기(再起)를 노리는 실패자들과 그 후인들이지.”
흑도의 패권 경쟁에서 밀려난 자들, 망한 흑도방파의 인사들이라는 소리다.
하긴 흑도의 경쟁은 치열하다. ‘흑도의 적은 흑도’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세가 강한 흑도는 세가 약한 정파를 후려쳐서 이권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세가 강한 정파가 약한 흑도를 후려쳐서 이권을 빼앗는 경우는 거의 없다.
흑도의 이권 대다수가 명망 있는 정파의 인사들이 다루기에는 좀 거시기한 것들인 탓이다.
이권에 민감한 무림 세가도 그런 이권은 직접 관리하지 않고 흑도 방파를 전면에 내세워 관리하게 할 정도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어쨌든 초극 고수들 아닙니까? 항주로 보내 소모시키지 않고 모은다면 육가장에 큰 힘이….”
생각해 보니 될 리가 없다. 한때 세력의 주인이었던 자들이다. 육가장의 그늘로 들어선 이유도 자신을 밀어낸 자들의 칼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만약 그런 식객들끼리 안면을 익히고 친분을 다지면, 그것만으로 하나의 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써먹기 편한 칼로 놔두려면 적절한 수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육가장 놈들, 괜히 흑도제일세로 불리는 것이 아니네요.”
“그렇지.”
“그럼, 이번 일은 이렇게 넘어가는 것입니까?”
“명분을 쥐었을 때는 육가장 놈들이 적극 나서고, 명분을 쥐지 못했을 때는 모르쇠로 나서지. 이번 일은 명분을 쥐는 데 실패했으니 모르쇠로 나설 것이야.”
“그럼, 제가 할 일은 끝난 것이군요.”
어째 예감이 안 좋다. 그래서 슬그머니 발을 빼기 위해 말을 했다.
“내가 우리 항주 흑도의 일을 쭉 설명하지 않았나.”
설마 못 알아듣는 것인가 하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잇는다.
“표면적으로 보면 육가장은 초극 고수 넷을 잃었고, 우리는 절정 셋을 잃은 일이지.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육가장은 언제든 채울 수 있는 자들을 잃은 것이고, 우리는 미래의 초극 셋을 잃은 것이네. 이런 수작이 계속 되풀이되면 항주 흑도는 몰락할 수밖에 없어.”
육가장은 저희들이 다루기 힘들어진 식객들을 항주 흑도를 이용해 처리하는 것이고, 항주 흑도는 육가장 좋은 일 하면서 핵심 인력의 손실을 입는 격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항주 흑도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깎여 나가는 것이 항주 흑도의 허리들이다. 미래 운운하고 있지만, 당장 조직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솔직히 이때껏 버티고 있는 것이 용하다.
“거기다가 멸왜단의 일이, 자네의 매들이 소문나기 시작하면 육가장 놈들의 수작질이 더욱더 거세질 것이란 말이야.”
멸왜단을 옭아매고 있는 왜구란 사슬이 사라지면, 그 힘은 육가장을 향할 확률이 가장 높다. 그러니 육가장은 그 전에 항주 흑도를 박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수작을 부릴 게 분명했다.
“육가장이 항주 부도 내에서 부릴 수작질을 원천 봉쇄할 수 있는 방법, 초극 고수를 판별할 수 있는 매를 원하시는군요.”
“자네 매는 다섯이지 않는가. 어떻게 한 마리만 안 되겠나?”
불가능하다고 하면 포기할 눈이 아니다. 아예 나를 항주 흑도에 붙잡아 놓으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멸왜단이 왜구라는 족쇄를 벗어 버리고 육가장을 후려치기 전에 내가 풀려나는 일은 없게 된다.
못해도 사오 년은 발이 묶이게 된다는 소리.
멸왜단? 왜구만 막을 수 있다면 내가 항주 흑도에 속한다 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매만 제대로 움직여 준다면 멸왜단 입장에서는 내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다.
거기다가 항주 흑도가 협조해 주지 않으면 소환단 구입 자금을 당장 구할 데도 없다. 아니, 자금 편성에만 연(年) 단위로 걸릴 것이다.
“한 마리. 완전 양도는 불가합니다. 오 년 정도 대여하는 것으로 하지요.”
“오, 가능한 일인가?”
“매와 심령이 통해야 하니 적합자를 찾아야 합니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항주 흑도에 사람은 많네. 그 중 적당한 자가 있을 걸세.”
지금 상태로 응 시리즈와 통신이 가능한 것은 마*카*투 감마를 나눠 먹은 넷과 마*카*투 베타의 숙주인 조구흥 뿐이다.
마*카*투 감마는 숙주들의 치료가 마무리되는 대로 회수될 예정이다. 온전한 마*카*투 베타가 항주 흑도에 투입되어 있는 상태니 당연한 선택이다.
“알고 계시겠지만, 많이 비쌉니다.”
공짜로 넘겨 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
염가동에게 응4를 다시 붙였다. 아니, 이제 응4가 아닌 응6이다.
공방에서 완성된 매 두 마리가 추가된 상태라 넘버링 정리를 했다.
새로 추가된 두 녀석과 절강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녀석들을 응1에서 응5까지로 이름 붙이고, 염가동에게 붙인 놈은 응6이 되고, 항주 흑도에 빌려 준 녀석은 응7이 되었다.
응7은 예정대로 마*카*투 베타와 연결시켰다. 조구흥에게 ‘계면술법’이라는 이름하에 한정된 사용법을 넘겼다.
응7의 대여료는 듬뿍 뜯어냈다. 일단 내 몫으로는 한 달에 은자 만 냥, 연간 십이만 냥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항주 흑도를 통해 오백 필의 항주 자수 비단을 석 달에 한 번씩 사들이기로 했다.
이것들은 염가동을 위한 물량이다. 항주에서 사들인 이것들을 바다로 옮겨서 북경에 되판다면 연간 이십만 냥이 넘는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산동 태산파의 부흥 자금으로 염가동에게 채워지는 또 하나의 목줄이 되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이걸 먹어야 된다 그 말인가?”
조구흥이 내가 내민 단약을 보며 물었다.
조구흥도 어쨌든 흑도의 인물. 안전장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괜히 몸속에 박아 놓은 마*카*투 베타를 움직여 위협하는 것보다 매와의 연결을 끊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작금의 항주 흑도에게는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예, 그래야 계면술법이 유지됩니다.”
당연히 단약 자체는 아주 흔해빠진 것으로 아무런 기능도 효능도 없다. 그저 항주 흑도가 약속을 지키게 만들려는 방편일 뿐이다.
“내 대강 계면술법으로 심령이 연결된 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살펴봤는데 말이야….”
조구흥이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린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뻔히 보였다.
“터전을 지키는 데만 쓸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 말씀이지요? 맞습니다. 조 노선배께서 생각하시는 그 방법이 원래의 활용법입니다.”
내 대답에 조구흥의 눈이 활활 불타오른다.
조만간 소주에서 살겁이 일어날 모양새다. 육가장 중진들의 떼죽음이 발생할 것 같은 예감이 강력하게 든다.
그렇게 항주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영파부의 멸왜단 총타로 복귀했다.
“뇌응대주, 이도연!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돌아오기 무섭게 불러서 갔더니 멸왜단주께서 두 눈을 부릅뜨고 이딴 소리나 하고 있다.
“뭐가 말입니까?”
“자네의 매! 그 매 말이네! 항주 흑도에 한 마리 빌려 줬다면서!”
내 뚱한 대꾸에 멸왜단주가 두 눈을 부릅뜨다 못해 찢어져라 뜨면서 언성을 높였다.
“예, 항주 흑도의 사정이 급박해 보여 한 마리 빌려 줬지요.”
“자네는 멸왜단 사람이잖나! 멸왜단의 중진! 뇌응대주 아닌가! 항주 흑도도 챙겨야 할 우방이기는 하지. 하지만 그전에 우리 멸왜단부터 챙겨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항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들은 것이었다. 초극 고수들을 구분할 수 있는 매들이 어떤 효용을 지닌 지 말이다.
“단주.”
내가 목소리를 깔고 분위기를 잡자 기세를 한껏 올리던 멸왜단주가 움찔했다.
“항주 하늘 위를 날고 있는 매는 한 마리고, 절강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매는 네 마리입니다.”
사실 바다 위를 날며 왜구를 찾고 있는 매는 세 마리다. 두 마리는 나를 지원하기 위해 항시 대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건 항주 흑도가 내게 매를 빌려가기 무섭게 내놓은 댓가지요.”
품에서 대여료로 받은 전표들을 꺼내 흔들었다.
“그런데, 멸왜단이 주기로 한 소환단은 어디 있지요?”
“소환단 백 개를 그렇게 단 시간에….”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선수금이라도 내놓아야지요!”
그렇게 재촉한 덕분일까?
이틀 뒤 열 개의 소환단이 손에 들어왔다.
훈련시킬 매 열 마리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