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절강행(20)
여느 때와 같았다.
부대주들이 애송이들을 열심히 굴리고, 나는 감독이라는 명목 하에 볕 좋은 자리에 앉아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단주 직속의 무인이 뇌응대 연무장을 찾았다.
“뇌응대주, 단주께서 찾으시오.”
진우탁의 호출에 볕 좋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주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창국 분타로 뇌응대를 옮기는 일에 대한 조정이 끝난 겁니까?”
집무실에 들어서 간단한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물었다.
멸왜단주가 나를 찾을 만한 일은 뇌응대의 본거지 이전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일이 아니네. 자네 항주로 가줘야겠어.”
“예?”
멸왜단주의 대답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항주에 멸왜단 분타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만?”
항주로 왜구들이 들어서기 전에 차단하는 것이 멸왜단의 전략이다.
그런 탓에 절강 연안에 전력이 집중된 멸왜단 아닌가.
“항주 흑도에서 도움을 요청했네.”
“항주 흑도가 멸왜단의 큰 후원자이기는 합니다만, 그쪽에서 요청을 한다고 움직이는 것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뇌응대의 대주인데….”
단주 직속이라지만 뇌응대가 멸왜단주의 사병이 아니지 않은가.
“왜구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항주 흑도에서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사 그쪽에서 요청을 했더라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자네를 불렀겠나?”
왜구와 관련된 일, 멸왜단의 일이라는 소리다.
“무슨 일입니까?”
짐작이 안 되니 묻는 수밖에 없다.
“절애도 일의 뒤처리일세.”
절애도의 일에 뒤처리 할 것이 있었나? 왜선 열한 척을 전부 박살냈고, 천 명이 넘는 왜구들도 전원 목을 잘라 절강 각지의 지부대인들에게 보내 관아 앞에 매달아 놓은 상태인데?
“차분히 듣겠습니다.”
잘 모르는 일이니 일단 듣고 본다.
“가흥부 흑도, 금선방에서 일어난 일은 알고 있나?”
“‘살마제일도’라는 왜구 무사가 가흥부에 숨어들어 살겁을 벌인 일 아닙니까? 사포의 흑도들이 박살나고 육가장의 고수들까지 몰려왔지만, 금선방주와 방파의 중진이 살해되고 끝내 잡지 못했다 들었습니다.”
모를 리가 없다. 살마제일도로 위장한 것은 염가동이었고, 그가 그렇게 날뛸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이 응4니 말이다.
“그 살마제일도가 항주에 나타났네?”
“예?”
설마, 염가동 이 인간의 흔적이 드러났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항주 흑도를 상대로 세 번의 살행을 저질렀어.”
= 염가동이 한 짓이냐?
진우탁의 말에 바로 손가락을 까닥여 농꾼에게 묻는다.
- 아닙니다. 염가동이 항주에 들어선 것은 맞지만, 항주의 누군가와 마찰을 일으킨 일은 없습니다. 살인을 벌인 적도 없고요.
염가동이 아니다.
= 염가동이 조 노인은 만났어?
-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 그럼, 일단 염가동을 항주에서 빼내.
- 예, 리퍼. 조치하겠습니다.
항주에서 괜히 염가동과 마주치면 좋을 것 없지 않은가.
“살마제일도의 짓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답니까?”
“가흥부에서 했던 것처럼 글귀를 남겼네. ‘살마의 무사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라고.”
누군가가 왜구 핑계로 항주 흑도를 노리고 있다는 소리다.
“살마제일도라는 놈이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면 항주 흑도가 아니라 전 현무대, 현 뇌응대를 노려야 정상 아닙니까? 하다못해 멸왜단의 분타를 노린다든지요.”
누군가 항주 흑도를 노리고 부리는 수작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걸 말하면 살마제일도의 가흥부 난동이 내가 사주한 짓임을 털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설마, 항주 흑도에서 절 미끼로 살마제일도란 작자를 끌어내려는 겁니까?”
살마제일도가 절애도 일로 원한을 가진 왜구 무사로 추측한다면 할 만한 생각이다.
“항주 흑도도 자네의 중요성을 알고 있네. 절대 자네를 미끼로 쓰려는 생각이 아니야. 그딴 생각을 했다가는 멸왜단뿐만 아니라 절강 무림 전체가 들고 일어날 걸세.”
“그럼, 왜 저를 원하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자네가 부리는 매의 신통함 때문이지.”
왜선을 찾는 것도 아니고 나를 미끼로 써서 추적하는 것도 아닌데, 매는 왜?
“살마제일도란 작자가 가흥부에서 보인 능력과 항주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면 단병접전에 뛰어난 왜구의 무사임을 감안해도 최소 초극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더군.”
젠장!
“매의 능력으로 항주 부도 전체를 훑겠다는 겁니까? 그래서 신원이 불분명한 초극 고수들을 모조리 파악하겠다! 그런 생각입니까?”
내 말에 진우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뇌응대의 공백은 어떻게 메우시려는 겁니까?”
“매와 관련된 일은 죄다 자네 소관 아닌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구해 줄 터. 정 어렵다 싶으면 가지 않아도 좋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소환단 조달에 문제가 좀 클 걸세. 당장 자금을 조달해 줘야 할 항주 흑도가 저 모양이니….”
멸왜단 사정상 내게 협박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저 말은 그냥 사실일 뿐이다.
“애들 무리를 시켜야겠군요.”
전혀 무리되지 않는다. 게다가 며칠 뒤면 두 마리가 더 올 예정이다.
“그런데, 공짜로 해야 하는 겁니까?”
이게 힘든 티를 내는 이유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시키는 일을 넙죽넙죽 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이야기는 나와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네. 객청으로 가보게. 항주 흑도에서 온 손님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멸왜단주의 말에 입에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여기에 당사자를 같이 동석시키지 않고 따로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 대한 멸왜단의 배려다. 항주 흑도에서 온 인사와 동석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면, 행여 멸왜단이 나를 압박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다.
이게 절강에서 가진 나의 위상,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응 시리즈의 위상이다.
단주 집무실을 나와 객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항주 흑도의 인사는….
“이렇게 또 만나는군.”
가흥부 부도로 향하던 관도에서 일수를 교환한적 있는 초극 고수, 철 지팡이를 무기로 쓰던 항주 흑도의 공 씨 노인이었다.
“무림 말학 이도연이 항주 칠선(七羨)의 일원이신 호장(虎杖) 공청완 선배를 뵙습니다.”
항주 칠선, 항주 흑도의 부러움(羨)을 받고 있는 일곱을 일컫는 말이다. 항주 흑도를 분할하고 있는 방파들의 전대 수장들로, 보통 때는 한가로이 뒷방 늙은이 흉내를 내고 있지만 항주 흑도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나서는 항주 흑도의 조율자들이다.
“자네가 여기 왔다는 것은 우리 일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는 것이겠지?”
“맡고 있는 일이 일인지라 무리를 좀 해야 합니다만?”
“왜구의 일인데?”
“몸이 허하다 보니….”
내 말에 공청완이 나를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가 아는 나는 기회를 잡으면 초극 고수도 쓰러트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무인이니 당연하다.
“멸왜단에서 필요한 매를 기르는 대가로 소환단을 받기로 했다 들었네만?”
“예. 그랬지요.”
공청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청완이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 내 앞으로 밀었다.
“이건?”
“소청단일세.”
소림의 소환단과 비견되는 도문의 영약이었다.
“어른께서 주시는 물건이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목함을 챙긴다. 슬쩍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니 하나가 아닌 다섯이다.
“혹시 더 구하실 수 있는지요?”
혹시나 싶어 물었다.
“소청단을 들고 다닐 말코 중에 도박장에 드나드는 놈이 또 있다면 모를까.”
대충 어떻게 구했는지 알 수 있는 소리다.
“불가능하다는 말이군요.”
몸을 일으켰다.
“한 시진 안에 항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뇌응대 연무장으로 향했다.
“뇌응대의 근거지를 창국현으로 옮기는 겁니까?”
화인천이 물었다.
“아니.”
고개를 흔든 뒤 손짓으로 다른 부대주들도 불러 모았다.
“항주 흑도에 일이 생겨 한 동안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응 시리즈가 보내는 신호를 읽는 법 등을 알려 줬다. 매들이 하늘에 그리는 형태에 따라 전달하는 의미가 달라진다. 당연히 나도 잘 모르는 것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려 주냐고? 눈 한쪽에 자료 화면들이 뜨거든. 그것들 쭈욱 한 번 읽어 주면 되는 것이다.
***
공청완과 함께 항주로 향했다.
자칭 ‘살마제일도’란 놈이 언제 일을 벌일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배가 아닌 말을 타고 육로로 움직였다.
오십 리마다 말을 바꿔 타고 달린다. 멸왜단을 통해 협조 요청이라도 되어 있는 듯 역참에서 내어 주는 파발마를 타고 달리다가 지역 방파에서 내어 주는 말을 타기도 했다. 강이 앞을 막으면 대기하고 있던 나룻배가 지체 없이 우리를 옮겨 준다.
그렇게 열심히 달린 탓인지 우리가 항주 부도의 성문에 들어선 것은 총타를 나선지 세 시진만이었다.
공청완과 내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상화장(常華莊)’이라는 장원이었다.
“공 형님, 수고하셨습니다. 상화장에 온 것을 환영하네. 벽력응주!”
공청완과 나를 맞이한 것은 가흥부 부도로 향하는 관도에서 전격으로 지졌던 조 노인이었다.
“무림 말학 이도연이 항주 칠선의 일원이신 단철귀수 조구흥 선배를 뵙습니다.”
“뭐, 우리 사이에 그렇게 예를 차리나.”
친근하게 웃으면서 나를 전각으로 안내한다.
“뭔가 변동 사항이 있나?”
공청완이 물었다.
“놈이 움직이지 않아 희생자가 없다는 것은 다행인데, 여전히 종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불행이지요.”
“빠져 나간 것이 아니라면 여기 벽력응주가 찾아내겠지.”
공청완이 나에게 부담을 팍팍 준다. 뭐 소청단을 다섯 알이나 받아먹었으니 어쩔 수 없다.
“빠른 일 처리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정확한 일 처리를 원하십니까?”
두 노인에게 물었다.
“둘의 차이는?”
공청완이 되물었다.
“정확한 일 처리를 위해서는 사전 작업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필요한가?”
“반나절이면 됩니다.”
“정확한 쪽으로 가세.”
내 대답에 공청완이 답했다.
“종횡 석 자 길이의 면포 수백 장이 필요합니다.”
“면포?”
조구흥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설명을 하기 보다는 필요한 물건들을 나열했다.
“추종향 세 종류에 종횡 일 장 크기의 네모반듯한 면포 한 장과 바늘 수백 개, 충분한 실을 준비해 주시지요. 그리고….”
필요한 물건들 다음에는 그 물건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방법을 늘어놓는다.
지금 내가 하는 짓은 간단히 말해서 평면 좌표를 설정하는 일이다. 항주 부도의 성벽을 따라 X, Y축 좌표 눈금을 만들고 부도 내 곳곳에 쉽게 찾을 수 있는 지점을 정해서 표시하는 것이다.
“이 면포가 항주 부도의 성 내라 보시면 됩니다. 남북, 좌우로 연결된 실 사이의 간격은 실제로는 십 장 거리가 되겠지요. 이제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일 장 크기 면포 내에 중요 지점만을 표시한 좌표 지도를 만든 것이다.
“제가 지도에 초극 고수의 위치를 표시하면 두 분께서는 가장 가까운 지점을 기준으로 거리와 방향을 계산하셔서 사람을 움직이면 됩니다.”
= 범위 내의 초극 고수 탐색 시작해.
눈앞으로 응1의 시야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항주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풍경 곳곳에서 붉은 점들이 발광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씨바, 세상에! 일 안하고 놀러 다니는 초극 고수가 뭐 이래 많아. 초극 고수쯤 되면 자기 문파나 문중을 지키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