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퍼 - 무공수확자-37화 (37/175)

37화

절강행(18)

“끼야야야아!”

원숭이 울음 같은 기합과 함께 녀석의 칼이 매섭게 덮쳐든다.

쾅, 쾅!

내려치고 후려치는 도격을 흘려내고 받아친다. 일격, 일격이 몸을 뒤흔들 정도. 도격에 실린 기운은 확실히 강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위력은 내 순수 공력으로 만들어낸 도기를 뛰어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맞받으면 내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뒤로 훌쩍 물러났다.

“끼야야야아!”

내가 물러나자 기세를 올리며 치고 들어온다.

몸을 젖혀 피하고 발을 놀려 물러나고 재주를 넘어 몰리듯 피한다.

- 리퍼, 호거술을 사용하십시오.

농꾼이 나를 재촉했다.

“녀석과 같은 음역대로!”

연신 뒤로 물러나며 명한다.

- 준비되었습니다.

끼야야야아!

농꾼의 대답과 동시에 내 왼손에서 놈이 내지른 소리와 같은 소리가 흘러나오며 도기가 강화된다.

쾅, 카쾅!

힘과 힘이 부딪치며 녀석의 몸이 뒤로 밀린다.

“큭!”

인상까지 쓰는 것이 순수 공력을 따졌을 때 나만 못하다는 증거다.

슬그머니 공력을 줄여서 다시 칼을 휘두른다.

캉, 카캉!

녀석이 굳건히 버텨낸다. 하지만 그뿐이다. 좀 더 공력을 줄이고 칼을 휘두를 때 힘을 뺀다.

“끼야야야아!”

호거술을 펼치는 놈의 얼굴에 기세가 살아나고 있다. 할 만하다 판단한 거다.

나? 당연히 버틸 만하다.

좋아 이대로 간다.

단순하지만 매섭고 빠르게 몰아치는 녀석의 도격을 받아내고 흘려내고 밀쳐낸다.

세 번 공격을 받으면 두 번은 튕겨 내며 한 번은 몸을 물린다. 어쩌다가 내뻗는 공격은 간단하게 막히고, 바로 반격을 받아 기세를 잃는다.

“헉, 헉!”

거친 호흡도 토해 준다.

카카캉!

“크윽!”

세 번 이상의 공격을 받아내면, 있는 힘껏 인상도 쓰며 괴로운 표를 한껏 낸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확연히 밀리는 싸움이다.

원래의 음역대로 호거술을 사용하면 단번에 격살할 수 있는 자와 상대하면서 이런 짓을 하는 이유? 당연히 왜구 놈들의 발을 묶기 위해서다.

이 녀석의 코러스를 봐 주던 배후령 놈들을 베어낼 때 뇌응대의 뒤치기가 시작되었다.

애송이들로 이루어진 3인 1조 4개 조가 세 명의 부대주들과 함께 후미를 막아선 왜선 위로 올라탄 것이다.

인적 피해가 전무한 온전한 전력을 갖춘 유일한 왜선이지만, 작정하고 덮쳐드는 절정 무사 열다섯을 막아낼 전력 따위는 없다.

왜구 무사 셋이 제법 실력이 있지만 한데 뭉쳐서 덮치는 부대주들을 이길 정도는 아니다.

눈앞의 이 녀석을 단번에 처리하면 왜구들이 배를 몰고 도망갈 수도 있었다. 한 방향으로 도망가면 쫓아가면 그뿐이지만, 흩어지면 놓치는 놈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 이 녀석을 붙들고 왜구 놈들 앞에서 이렇게 쇼를 할 수밖에 없다.

“대주!”

뒤쪽에서 들려오는 경철운의 목소리. 시야 한쪽에 보이는 응5의시선 화면을 힐끗 살피니 경철운이 대경실색하여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거 두목. 묶어 둬야 다 잡는다. 그러니 내 걱정 말고 전력 양분해서 양쪽 왜선부터 정리해.”

나를 돕기 위해 달려오는 경철운에게 팔팔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삼 조! 나를 따라 좌측으로!”

내 팔팔한 목소리에 전후 사정을 짐작한 경철운이다. 후미의 왜선을 끝장내고 달려오는 뇌응대의 일부를 이끌고 한쪽의 왜선으로 내달렸다.

“우리는 우측으로 간다!”

“일, 사 조 뛰어!”

뒤따라 온 진혜예와 화인천 역시 내 외침을 들었는지 다른 쪽으로 내달린다.

뇌응대가 좌우의 왜선에 뛰어들어 왜구들을 박살내자 녀석의 칼질이 변했다.

나를 밀어내고 지 놈 배로 도주할 속셈이 뻔히 보였다.

그럼 연극 끝이지.

“원래대로!”

오올!

스피커가 토해내는 소리가 바뀌니 강화된 도기가 강기로 변형된다.

그리고 상대의 강화된 도기는 스피커의 소리에 짓눌려 호거술이 깨지며 평범한 도기로 변하니….

캉!

위력에 눌려 무기를 놓치고 그대로 양단되었다.

녀석이 쓰러지기 무섭게 나는 돛 포가 멀쩡한 왜선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으로 높이 튀어 올라 전신을 비튼다. 몸을 횡 회전시키며 몸 곳곳에 숨겨 놓았던 철탄을 투척한다.

핑, 피피피핑!

내손을 떠난 철탄들이 왜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박살나고 등판이 뭉개지고 척추가 으스러진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왜구들이 쓰러짐과 동시에 나는 왜선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망망대해 위의 배다. 바다로 뛰어들지 않는다면 도망갈 곳도 없다.

달려드는 놈들은 베어 죽이고, 물러서는 놈들은 쫓아가 죽인다.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 항복하는 놈들은 목을 밟아 뭉개 버렸다.

그렇게 열심히 죽이다 보니 왜선 안에 살아 숨 쉬는 왜구가 없게 되었다.

“피해는?”

“없습니다.”

당연했다. 절정 무인을 상대할 수 있는 왜구 무사들은 나와 부대주들이 치워 줬다.

그뿐이랴? 눈먼 칼에 맞지 말라고 3인 1조로 뭉쳐 서로의 뒤를 봐주게 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왜구 무사들도 아닌 일반 왜구에게 당하면 ‘절정’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것이다.

“전리품으로 왜도 챙기고, 부도 관아에 효수할 수급 챙겨.”

“예, 대주.”

내 명에 부대주들이 뇌응대원들을 부려 뒷정리를 했다.

“대주, 왜선들은 침몰시킵니까?”

진혜예가 물었다. 홀수선 아래로 구멍 몇 개 만들고 방치하면 나중에 침몰되기는 한다.

“노는 바다에 버리고 방향타와 돛대 부수고 방치해. 갑판에 크게 ‘멸왜’라 새기고 말이야.”

바다를 떠도는 경고판으로 만들 생각이다. 뭐 해류 타고 연안에 닿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필요한 조치를 끝내고 쾌속선으로 옮겨 탔다.

“서쪽으로, 태주 분타에 들렀다가 총타로 복귀한다.”

***

태주에 멸왜단의 분타는 하나가 아니었다. 태주 해안을 따라 늘어선 분타가 세 곳이나 된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그 중 신하(新河) 분타였다. 왜구에 대한 뒤처리도 있지만 다른 볼 일도 있는 곳이다.

“뇌응대를 맡고 있는 이도연입니다.”

“자네가 그 벽력응주 이도연? 서른은 넘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군. 태주 신하 분타를 책임지고 있는 ‘호강진’이라 하네.”

쉰을 훌쩍 넘겨 보이는 얼굴이지만 몸은 무인답게 건장하다. 보타삼문 중 하나인 보제사의 속가제자로 금강야차인을 수련해 초극에 오른 도객이다.

“이쪽은 자네가 보기를 원한다는 내 아들이네.”

“‘호장우’라 합니다.”

수확 대상자 중 하나인 철륜도(鐵輪刀) 호장우다. 내가 신하 분타로 온 주된 이유다.

“철륜도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태주 쪽 항왜 활동의 선봉에 서 있는 호장우다. 진우탁에게 연락을 받았지만 자리를 비우기 힘들어 내가 기회 봐서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사포의 절애도에서 일천이 넘는 왜구를 때려잡은 주역인 벽력응주만 하겠습니까.”

입은 웃고 있지만 젊은 놈답게 두 눈은 호승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대주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뇌응대 전체가 왔다는 것은 왜구들 때문이지? 이쪽으로 향하는 왜선 다섯 척을 발견했다고?”

호강진이 물었다.

“예, 하지만 그 왜구들은 이미 간밤에 처리되었습니다.”

“뭐라?”

“…….”

내 말에 두 부자의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총타에서 태주로 향하던 왜구를 발견했다는 연락이 당도한 것이 어제 저녁이었다. 그런데 정오도 되기 전에 찾아온 내가 왜구를 끝장냈다니 놀랄 수밖에 없다.

“원래는 은밀히 뒤따라 태주 해안에서 분타들과 앞뒤로 협공을 하려 했습니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준비해 놓은, 부대주들과도 미리 맞춰 놓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오백 정도의 수급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호주, 가흥, 항주, 영파 관아에 효수할 왜구들의 수급을 제외한 삼백입니다.”

그리고 준비해 놓은 왜구들의 수급을 상자 째로 넘겼다.

“당장은 훈련된 매가 모자라 총타의 뇌응대 위주로 움직이고 있지만, 왜선을 찾을 수 있는 매들이 훈련 되는대로 지역 분타에 배정될 것입니다.”

“매만의 문제가 아닌 듯한데, 안 그런가?”

호강진이 물었다.

수백 리 밖의 왜구들을 찾아낸 것도 놀랍지만, 총타에서 출발한 뇌응대가 수백 리 밖 왜구들을 척살하고 태주로 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하루가 안 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총타의 위치와 왜구의 위치, 분타의 위치를 생각하면 천 리가 넘는 거리를 하루도 되기 전에 움직인 것이 되네. 쾌속선을 탔다 해도 급류를 타고 내려올 수 있는 강에서나 가능한 속력이지. 바다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야. 도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가?”

이것도 내가 온 이유 중 하나다.

“총타에서 목혜에 대해 들으셨을 텐데요? 시험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해봤네. 확실히 등평도수를 펼치기에 수월해지더군. 아니 그게 있으면 절정 무인들도 물 위를 마음대로 오고 갈 정도지. 듣기로는 자네 일문의 비전이라 들었네.”

“비전이었지요. 이렇게 공개되었으니 말입니다.”

“절강 무림의 일원으로 자네의 결정에 감사를 표하네.”

뭐 감사할 것까지야.

“그런데,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하루 사이에 천 리의 뱃길을 달린 방법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21세기의 인간과 이 시대 인간의 차이점이다. 견문이 좁고 상상력이 미비하니 발상의 전환이 안 되는 거다.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면 그 방법을 보여드리지요.”

이 제의를 호강진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호강진, 호장우 부자를 태우고 뇌응대의 쾌속선에 올라탔다. 노꾼들의 노질로 사람 눈이 없는 바다로 나왔다.

“일 조, 준비해.”

내 명에 뇌응대원 셋이 쾌속선의 끝자락에 달라붙었다.

“어?”

호강진의 눈이 의아함에 물들었다.

“달려!”

그리고 시작된 쾌속선의 질주.

“어!”

호강진의 눈이 커졌다.

“네 개 조로 일각씩 교대로 달리게 하면 한 시진에 삼백 리 정도 가더군요. 굳이 절정 무인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경공이 평균만 되는 일류 무인도 가능합니다. 보시는 대로 쾌속선의 선체를 잡고 달리니 등평도수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목혜의 부력과 각력으로 추진력만 얻을 수 있으면 되니까요. 일류 무인들이라면 오 인 일 조? 그 정도라면 한 시진에 못해도 이백 리는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 허허, 하하.”

호강진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아니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방법이면 눈에 띈 왜구 놈들을 놓칠 리는 절대 없겠군. 절대 없겠어!”

와,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지는 것이 좋아 죽으려는 수준이다.

“자네는 우리 절강 무림의 홍복이야. 홍복!”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들으며 멸왜단 뇌응대주가 해야 할 공무를 끝냈다. 이제 내 개인적인 볼일을 볼 차례.

신하 분타로 돌아오기 무섭게 나는 호장우에게 면담을 청했다.

“단주께서 말씀하신 그 일입니까?”

“예, 그 일입니다.”

호장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잠시 가르침을 주실 수 없습니까?”

호장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실력 한 번 보자는 말이다. 데이터를 손에 넣으면 호장우의 실력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정밀한 데이터라 해도 나노 머신의 한계가 있다. 바로 내공을, 공력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데이터와 실체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초극 지경이라 들었습니다. 제가 가르침을 청해야지요.”

미소를 지으며 응한다. 수확 대상자의 실력을 몸으로 체험해 볼 기회인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