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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36화 (36/175)

36화

절강행(17)

경철운은 딱히 도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왜구 무사들이 버티고 있는 것이지 경철운이 몰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자연히 시선은 애송이들 쪽으로 갔다.

3인 1조로 왜구들을 잘 상대하고 있었다. 서로의 등을 지켜 주며 갑판 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눈에 보이는 왜구들을 착실히 제압하고 있는 모습이….

“하아, 이것들이 진짜.”

어째 피비린내도 안 나고 갑판 위도 깨끗하다 했다.

쓰러져 있는 왜구들 태반이 숨을 쉬고 있었다. 꼴을 보니 칼등이나 검면에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놈이 절반이고, 점혈을 당한 놈이 절반이다.

왜구들이 단병접전에 뛰어나다 해도 이류나 삼류 무사들 상대로 그렇다는 거다. 절정 무인쯤 되면 검기나 도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칼질 몇 번이면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일반 왜구들이다. 그런데 굳이 혈도를 제압하기 위해 손을 몇 번이나 더 쓰고 있었다.

칼등이나 검면으로 후려쳐서 왜구들을 간단히 때려눕히던 녀석들도 그걸 보고 혈도를 잡으려 들고 있으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칼을 뽑아 들었다. 왜구들이 몇 남지 않았지만 주저 없이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카아악!”

“컥!”

무자비하게 휘두른 내 칼질에 왜구들이 등판을 베이며 비명을 내질렀다.

“대주?”

“왜?”

뇌응대원들이 갑자기 난입해 살수를 펼치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냐? 싸움 끝났어? 다 죽여!”

쓰러져 있는 왜구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제압 완료된 자들입니다. 괜히 피를 볼 필요가….”

“크악!”

“아악!”

갑자기 울린 비명이 고장명의 말을 끊었다.

고개를 돌리니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내는 진혜예가 보였다. 선단 중앙의 좌측 왜선을 불 지르고 온 그녀가 경철운을 상대하던 왜구 무사들의 뒤를 덮친 것이다.

“대주, 이것들 다 뭡니까? 사로잡을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진혜예가 제압된 왜구들을 보며 묻는 것이다.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이네. 진 부대주.”

내가 턱짓으로 대원들을 가리키며 답했다.

“살려 둔 이유는?”

진혜예가 뇌응대원들을 향해 물었다.

“괜히 피를 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없다는 말이네.”

대표로 나선 고장명의 대답에 진혜예는 검을 고쳐 잡고는 쓰러진 왜구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그들의 목을 쳤다.

“왜구는 멸한다. 그래서 멸왜단이다. 이것들 살려둬 봐야 다시 약탈하러 들어올 게 뻔한데, 살려 두겠다고?”

진혜예가 손으로는 검을 휘둘러 왜구들의 목을 치며 입으로는 말을 이었다.

“항왜 활동이 멸왜를 부르짖게 만든 것은 왜구들이야. 멸왜는 절강의 민심이고 절강 무림의 총의야. 왜구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어? 절강 무림 전체가 너희를, 너희들의 사문과 가문을 어떻게 볼지 생각하고 움직여.”

“뭘 보고만 있나! 싸움 끝난 거 아니다. 아직 왜선은 네 척이나 남았다. 어서 진 부대주를 도와 끝내.”

진혜예의 말에 이은 내 호통에 뇌응대원들이 쓰러져 있는 왜구들을 향해 다가가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왜구들의 비명이 망망대해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당장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왜선은 없었다.

선단의 중앙에 있는 왜선 세 척은 불을 끈다고 난리가 난 상황이고, 선두의 왜선은 중앙의 난리 때문에 후미 상황이 파악 안 되는 듯 했다.

어쨌든 이 배의 왜구들은 죄다 처리가 끝났다.

“경 부대주!”

“돛대와 방향타 박살내라는 말이지요?”

내 말에 경철운이 바로 답했다.

“뇌응대 2개 조 데리고 가서 이 배의 노도 전부 바다에 버리도록.”

“예, 대주.”

경철운이 바로 뇌응대 2개 조를 이끌고 왜선의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불길이 잡혔군. 진 부대주, 화 부대주 두 사람은 갑판 위의 대원들 데리고 먼저 물러나.”

두 사람이 갑판 위의 2개 조를 데리고 바다로 뛰어든 후, 나는 칼을 뽑아 들고 왜선의 돛대로 갔다.

오올!

왼손이 검게 물들며 소리를 토해내니 도기가 강기로 변한다.

촥!

한 번의 칼질에 돛대가 잘려 나가며 옆으로 쓰러진다.

콰광,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돛대가 배의 좌측 난간을 넘으며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세 척의 왜선이 이쪽 배의 이변을 눈치 챘다 해도 불을 끄기 위해 움직였던 인원을 다시 노에 배치하고 움직이는데, 그리고 다시 여기까지 오는데 못해도 반각은 필요했다.

노와 방향타를 처리한 경철운과 대원들이 올라왔다.

“대원들 데리고 다른 부대주들과 합류해.”

“대주, 어쩌려고요?”

경철운이 물었다.

“시선 끌고.”

왼손 엄지로 내 가슴을 찍었다.

“응1이 가면 뒤통수!”

왼손 식지로 경철운과 뇌응대원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단번에 싸잡아 먹자? 명을 받들지요.”

척하면 착이다. 적들의 전력을 대강 알았으니 귀찮게 한 척씩 상대할 게 아니라, 한데 모아서 싸잡아 정리하자는 내 말을 바로 알아듣는 경철운이다.

경철운이 그렇게 남은 뇌응대원들을 이끌고 물러났다.

잠시 후 돛 포가 살아 있는, 선두에 있던 왜선이 정면으로 다가오고 우로 한 척, 좌로 두 척으로 나눠지고 있었다. 뭐 좌로 오는 두 척 중 하나는 후미를 틀어막겠다는, 전형적인 사면 포위다.

슬그머니 왜구들의 시체들 사이에 몸을 눕힌다.

응1의 시야를 눈앞 한쪽에 띄워 전체적인 상황을 살피며 기다린다.

배 난간에 갈고리들이 걸리고 왜구들이 배의 좌우 양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갑판 위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보고 기겁하여 뭐라 외친다.

넘어온 왜구는 서른둘. 무사로 보이는 왜구들도 넷이다.

바로 몸을 일으키며 주위에 널브러진 왜도를 집어 들고 던진다. 첫 목표는 당연히 왜구 무사들이다.

휭, 휘잉, 휭, 휭!

네 자루의 왜도가 좌우로 두 자루씩 날아가 목표를 정확히 꿰뚫었다.

왜구 놈들이 무슨 대응을 하기도 전에 팔뚝에 차고 있던 비수들을 내던진다.

퍼퍼퍽, 퍼퍽!

비수가 사람 몸에 꽂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좌현으로 올라왔던 왜구들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좌측을 향해 발을 굴렀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칼을 크게 휘두른다.

촥, 촤악!

크게 휘두르는 두 번의 칼놀림. 도기를 길게 뻗고 그린 호쾌한 호선 두 개에 좌현으로 올라온 왜구들의 남은 목숨들마저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 우현을 덮친다. 갑작스레 일어난 살육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왜구 열넷 따위 써는데 필요한 시간은 순간이다.

그렇게 좌우 양쪽을 정리한 다음 전후좌우 포위망을 형성한 왜선들에서 잘 볼 수 있도록 느긋하게 갑판 정중앙으로 걸어가 우뚝 선다.

“농꾼, 번역해서 스피커로. 왜구 새끼들 겁먹었냐! 잡졸들 내세우지 말고 제대로 된 무사들이 나와 봐라!”

내 도발이 왜구들이 알아듣게 번역되어 철 이온으로 검게 코팅된 왼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머뭇거리는 왜구들을 밀치며 제법 격식 있게 차려 입은 왜구 무사들이 양쪽 난간을 넘어왔다.

셋, 셋, 여섯. 경철운과 싸우던 녀석들과 복장이 비슷하다.

후미의 왜선에도 비슷한 복장의 셋이 선수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고, 정면의 왜선도 마찬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쪽은 하나 더 있어 넷이라는 거다.

= 열셋 다 등록시켜.

- 얼굴과 체형 등록하고, 우선 추적 대상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자, 그럼 적당히 데이터나 뽑아 볼까?”

- 음향 감도 최고조로 기록합니다.

경철운과 싸운 자들과 비슷하다면 이 여섯도 호거술을 활용한 합공이 가능할 것 아닌가.

“끼요옷!”

“까악!”

예상대로 요상한 기합이 하모니를 이루며 여섯 개의 칼날이 나를 향해 덮쳐들었다.

도기와 도기가 얽히고, 힘과 힘이 부딪친다. 경철운의 도끼질을 버티듯 내 도격에도 제법 대응을 하고 있다.

데이터를 뽑아 먹을 생각에 적당히 시간을 끄는데, 뭔가 이상하다.

셋, 셋. 2개 조의 합공은 기대하지 않았어도 협공은 기대했는데, 이 녀석들 3인 1조가 동시에 달려는 들어도 조별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이 나서면 한쪽이 물러나는 식이다. 1개 조가 공격 중이면, 다른 조가 끼어들지 않는다. 그저 2개 조가 나를 상대로 차륜전을 벌이고만 있다. 내가 슬그머니 틈을 보여도 마찬가지.

같은 조인 셋이 호거술로 입을 맞출 수는 있어도 거기에 다른 조가 끼어들기는 힘든 것인가?

아니면 호거술끼리 간섭하면 문제가 생기는 건가? 확인해 봐야 했다.

“응1, 경철운에게 내려 보네.”

그것과는 별개로 뇌응대에 공격 신호를, 뒤치기를 명한다.

요란한 기합성과 함께 덮쳐드는 세 자루의 칼날에 왼손을 내민다.

오올!

우우웅!

왼손 스피커가 뿜어내는 호거술과 왜구 무사 셋이 목청으로 돋워 내는 호거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카카캉! 캉!

도기가 사라진 세 자루의 칼날이 도기를 머금고 휘둘러진 내 칼날에 그대로 꺾여 나갔다.

그리고 그 주인들을 휘감아 동강냈다.

역시 예상대로다.

“호거술끼리 단순히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센 쪽이 작은 쪽을 짓눌러 무력화시키는군.”

- 음역대의 폭이 넓은 쪽이 작은 쪽을 짓누르는 구조입니다.

농꾼의 대답.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건가?

여섯이 순식간에 셋이 된 상태, 남은 셋이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서지만 나는 놓칠 생각이 없다.

오올!

왼손 스피커를 앞세워 호거술을 깨트리며 그들을 전부 휘감는 큰 칼놀림을 보인다.

셋의 육신이 사이좋게 동강나서 갑판 위를 구른다.

“칙쇼(畜生)!”

정면을 막아선 왜선 선수에서 이 광경을 본 왜구 무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다.

“짐승은 너희지. 나는 도살자고.”

희죽거리며 정면을 향해 내달린다.

오올!

순간 내 귀에 익숙한 소리가 정면에서 터져 나왔다. 내 왼손에서 나오던 소리가 적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젠장!”

쾅!

충격과 함께 몸이 뒤로 튕겨 났다.

콰즈즈즉!

양발이 갑판에 닿았는데도 몸을 밀어붙이는 여력이 있어 발이 갑판을 긁으며 밀려난다.

쾅!

왼발을 뒤로 빼며 진각 밟듯 내딛자 몸이 멈춰 선다.

“고로시테야로오(殺してやろう)!”

죽여 주마!

농꾼 녀석이 눈앞으로 친절하게 띄우는 자막 위로 몸을 날리는 녀석이 보인다. 그리고 녀석이 휘두르는 칼날을 휘감고 있는 강기도.

오올!

왼손의 스피커가 가동된다. 나도 호거술로 강기를 일으켜 맞받는다.

콰쾅!

전신을 두드리는 충격과 함께 내 몸이 다시 튕겨 난다.

“어떻게 된 거야!”

몸을 바로 하며 묻는다.

- 이쪽 단성보다 저쪽 하모니의 음역대 폭이 더 큽니다.

“씨발!”

욕 나오는 상황이다.

“칼에 전압 걸어!”

-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상대의 호거술과 마주치면 폭주할 가능성이….

“알고 있어.”

농꾼을 닥치게 한다.

파지지직!

전류가 흐르니 내 칼날을 휘감는 도기가 푸르른 빛을 더한다.

녀석이 나를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긴다. 그런 녀석의 뒤로 왜구 무사 셋이 배후령처럼 따라 붙는다.

“단독으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저 녀석들과 함께 펼치는 거지?”

- 예, 리퍼.

“기록은 착실히 하고 있냐?”

- 지금 걱정하실 쪽은 그쪽이 아닙니다만?

리퍼의 대꾸에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아직 걱정하기는 이르지.”

자신만만하게 외쳐 주며 상대를 향해 바닥을 박찬다.

동시에 왼손으로 칼등을 겨누며 스피커를 작동시킨다.

오올!

번쩍!

백색의 광휘가 일순간 세상의 모든 색을 빼앗았다.

쾅!

그 힘이 사라지기 전에 상대의 도강과 격돌시키니 이번에는 상대가 뒤로 튕겨 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백색 광휘에 일순간 시력을 잃은 배후령 셋만이 무방비하게 서 있었다.

파파팟!

짧게 휘몰아치는 칼질에 시야 잃은 왜구 무사 셋이 허무하게 허물어졌다.

자, 이제 코러스 빼고 일대일이다. 어디 목청껏 울부짖어 봐라. 나는 그냥 스피커 틀면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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