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절강행(11)
쾅, 콰쾅, 쿵!
동굴이 무너지고 있다. 아니 절벽이 내려앉고 있었다.
절벽 아래에 뚫린 수상 동굴, 섬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유일한 출구가 사라지고 있었다.
멸왜단주 진우탁이 휘두른 창이, 그 창끝에서 튀어 나간 푸르디푸른 빛의 구체가 만들어내는 광경이다.
주먹만 한 크기로 뭉친 빛의 구체, 그것은 초극 고수가 휘두르는 강기가 아니었다.
환강(環罡), 강기를 압축시킨 파괴의 결정체. 초극 고수에서 한 발짝 더 올라선 고수의 증거다!
하늘에 도전하는 자들을 막아선다는 수문장, 하늘이 부리는 신장과 같은 무위를 지녔다 해서 ‘천문위(天門衛)’라 부르는 경지.
첫 번째 수확 대상자 진우탁이 선보인 환강은 그 천문위의 증거였다.
= 야, 농꾼.
- 예, 리퍼.
= 초극 고수가 아니고 천문위인데?
사람이 너무 놀라면 무덤덤해지고 차분해진다더니, 지금 내 상태가 그렇다.
- 특이 케이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그래,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고 그러니깐. 이 경우가 특이 케이스겠지?
중원 무림에 천문위의 고수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 명문 거파의 나이 지긋한 전대나 전전대 고수들로 심산유곡 어딘가에 은거 중이라 어디어디 문파에 그런 전대 기인이 있다 하는 풍문이나 듣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강호에서 칼질하다 얼굴 볼 일 없어야 하는 것이 천문위다.
쾌속선 위에서 무너지는 동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농꾼과 문자질을 하고 있자니, 절벽을 박살낸 진우탁이 허공을 날아 내 곁으로 내려섰다.
“어떤가? 내 무공을 보니 배워 볼 생각이 들지 않나?”
또 반 장난하듯 사람을 엮으려 든다. 이런 말은 반응하지 않는 게 순리다.
하지만 윗사람이 말을 거는데 입 다물고 있는 것도 도리가 아닌지라 입을 열기는 연다.
“대단하십니다. 예순도 되지 않았는데 천문위라니! 무림에 유례가 없는 일 아닙니까?”
내 솔직한 감탄에 진우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유례가 없어? 무슨 소리인가? 자네가 넘긴 명단을 보니 사형과 사저가 있던데? 그 두 사람도 나 같이 쉰 전후로 천문위에 오른 사람인데? 알고 만나려는 거 아니었나?”
내가 진우탁에게 면담 주선을 부탁하며 넘긴 명단은 절강 내 수확 대상자 명단이다. 그런데 그들 중 둘이 천문위라고!
“진짜 모르고 있었군.”
내 얼빠진 표정을 보며 진우탁이 신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영약 도움 없이 서른 이전에 초극 고수가 된 신진 고수가 다섯에 오십 전후에서 천문위가 된 인물들이 둘이라 확고한 기준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우연이었나?”
처음 만난 수확 대상자가 천문위고 그 지역 대상자 중 천문위가 둘이 더 있다. 아니 진우탁의 말을 빗대어 추측하면 50세 이상의 수확 대상자는 ‘천문위’라는 소리다.
이 일이 절강에만 국한된 일일까? 아니다. 다른 지역도 절강과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아주아주 높았다.
= 대부분 초극 고수라며? 내가 할 일은 그 초극 고수의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이라며? 그런데 왜 초극 고수가 아니라 천문위가 튀어나오는데! 셋이 천문위라잖아! 천문위! 초극 고수가 눈앞에서 나대면 가볍게 때려죽일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천문위!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초극 고수나 간신히 상대하는 내가 여차하면 천문위를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다.
- 예, 리퍼. 리퍼의 명대로 수확 대상자의 무공 범위를 초극에서 천문위로 확장합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 씨발! 사기도 적당히 쳐야지! 이건 너무하잖아!
그러고 보니 농꾼은 진우탁을 그냥 초극 고수로 분류했다. 생각해 보니 당연하다. 농꾼의 초극 고수 분류법은 심플하다. 호신강기가 전파를 차단하니, 전파가 차단되면 초극이라 판단한다.
뭐 대다수의 천문위가 심상유곡에 처박혀 있다면 전혀 문제될 것 없는 분류법이다. 하지만 오십 대의 젊은 천문위들이 대거 탄생해서 천하를 활보하는 세상이 되었다.
나노 머신의 효능으로 오십 대에 천문위가 된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보다 더한 재능을 가진 자가 수확 대상자가 되었다면 사십 대, 삼십 대에 천문위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초극인 줄 알고 덤볐는데 알고 보니 ‘천문위’라는 개 같은 경우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말고 초극 고수와 천문위를 구분할 방법부터 찾아내.
- 예, 리퍼.
***
사포 앞바다 절애도의 왜구 토벌 이후 현무대는 순찰 임무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 새 임무가 주어졌다. 가흥부 부도의 관부에 효수할 왜구들 수급의 운반이었다.
“부당주, 이건 원래 현무대의 임무가 아닙니다만?”
진혜예가 정천성에게 인상을 쓰며 따졌다. 현무대는 전원이 절정 고수.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단순 운반 임무에 투입되는 것은 전력 낭비라 생각한 듯하다.
“금선방(禁船幇) 녀석들 이번 절애도 토벌로 상당한 손해를 봤을 거다.”
가흥부 흑도 놈들 이름이 금선방인 모양이다. 정천성이 계속 말을 잇는다.
“절애도 창고에서 압수한 물건과 왜선과 함께 불타버린 물건들을 생각하면 못해도 은자 십수만 냥이야.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어.”
은자 십수만 냥이면 어지간한 방파의 한 해 수입과 맞먹는다.
“그래서 그들이 분풀이로 수급 운반대를 습격할 것이라 생각합니까? 가흥부 흑도 놈들이 멍청이라도 그렇게까지 멍청하다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요?”
“누님, 저는 습격할 거라 봅니다만?”
경철운의 말이다.
“저도 습격에 한 표입니다.”
화인천도 끼어들었다.
“너는?”
진혜예가 나를 보며 물었다.
“제가 ‘금선방’이라는 가흥부 흑도의 우두머리라면 습격할 겁니다.”
“왜? 실패하면 자신들이 왜구와 연관 있다고 자복하는 꼴이 되는데?”
“실패한다 생각을 안 하지요. 사자무언(死者無言), 살인멸구(殺人滅口). 흑도인들이 좋아하는 말이지요.”
증인을 남기지 않으면 될 일이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사고가 났으니 자신들이 범인을 찾는답시고 나서서 그럴듯한 희생양을 내밀면 되는 일이다.
왜구와 손잡았다는 의심? 의심이야 원래 받고 있는 곳 아닌가.
“그리고 걸린 돈이 너무 많아요.”
왜구와 거래를 끊을 생각이면 모를까, 다시 왜구와 거래를 속개할 생각이라면 절애도 토벌과 자신들 금선방은 상관이 없다는 증좌를 보여야 했다.
“걸린 돈이? 그래. 왜구와의 밀수를 재개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네.”
진혜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부당주. 현무대가 은밀히 따라 붙는 일이 아니라 했잖아요?”
진혜예가 다시 정천성에게 물었다.
“전면에 나서는 일이지.”
“가흥부 흑도놈들을 압박하는 거군요. 왜구놈들과 거래 끊으라고!”
진혜예도 바로 이번 임무의 핵심을 알아챘다.
현무대주 진혜예는 멸왜단주 진우탁의 고명딸. 현무대주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사자무언 살인멸구 따위를 노리는 습격을 했다가는 진우탁의 분노를 사게 된다.
의심만으로는 금선방을 후려칠 수 없다. 그거야 공적인 일일 때나 그런 것이다.
진우탁이 복면 뒤집어쓰고 금선방 담벼락을 넘을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금선방은 망할 수밖에 없다.
치고 빠지기를 작정한 초극 고수도 상대하려면 골치가 아픈데, 천문위가 그럴 작정으로 움직이면….
“그래, 금선방 놈들이 다시 왜구와 손잡고 밀수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지.”
***
현무대는 상자를 가득 채운 수레와 함께 해염현에서 내렸다.
배로 가흥부까지 이어진 수로를 타고 가는 것이 편하기는 하지만 그건 금선방 좋을 짓이다. 사고를 위장해서 배를 침몰시키고 수급을 빼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당나귀로 수레를 끌게 하고 그 뒤를 따라 걷는다.
= 가흥부 부도에 있는 관부까지 얼마나 되냐?
- 관도 따라 움직이면 50km 정도입니다.
문자질에 농꾼이 답했다. 부지런히 걸으면 하루면 가는 길이다. 하지만 하루 만에 도착할 리 없는 길이다.
“뭘 옮기는 거요?”
“사포 앞바다에 있는 절애도에 숨어든 왜구들 모가지요.”
관병의 검문이 있을 때마다 멈춰 서서 제일 위의 상자를 연다.
“이번에 천 명이 넘는 놈들을 잡아 죽였소. 가흥부 관부에 효수를 하기 위해 백 개가 넘는 모가지를 옮기는 중이요.”
마을을 지나갈 때 누가 물어봐도 마찬가지.
“잘 뒈졌다, 왜구 놈들!”
“속이 다 시원하네!”
“역시 멸왜단이야!”
잘려진 사람 머리에 기겁을 할 만한데, 왜구의 머리라는 말에 다들 좋아했다. 그렇게 소문을 내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하루에 이십 리만 움직인다. 이 느릿느릿한 행보는 가흥부 흑도를 움켜쥔 금선방에 가하는 멸왜단의 괴롭힘이다.
그렇게 수레를 끌고 가기를 나흘 째 되는 날이다.
- 리퍼, 수상한 자들을 발견했습니다.
농꾼의 보고에 응1의 시야로 살피니 2km 정도 떨어진 숲속에 복면을 뒤집어 쓴 20명 정도의 인원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 초극 고수는?
혹시나 싶어 초극 고수의 유무를 묻는다.
가흥부 흑도의 인물이 나설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외부의 인사를 섭외해야 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흑도거마를 어떻게든 섭외했을 금선방이지만, 겨우 사나흘이다. 그 시간에 가흥부 흑도와 전혀 상관없는 인물을 구하는 것은 불가….
- 1명 있습니다.
씨발, 능력 좋은 것들. 어디서 이렇게 빨리 사람을 구한 거야?
금선방의 인물일 수는 없다. 금선방 초극 고수들의 동향은 응5가 붙어 살피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누님, 길을 바꿔야겠는데요?”
“무슨 소리야?”
“앞에 매복입니다. 초극 고수 한 명이 포함된.”
놈들이 숨은 숲과 우리 사이에 작은 구릉이 하나 있기에 저쪽에서는 아직 우리를 보지 못했다.
“육가장이 숨겨 놓은 칼을 보낸 건가?”
진혜예가 눈살을 찌푸렸다.
태호 일대의 지배자로 금선방의 배후랄 수 있는 육가장이지만, 무림 유일의 흑도세가라는 역사와 명성을 가진 곳이다.
그 명성과 명분이 가져다주는 힘의 강력함을 충분히 알 만한 곳인데, 왜구와 관련된 민감한 일에 나서다니 뭔가 이상하다.
“사람을 노리기보다는 물건을 노리겠지?”
경철운이 인상을 썼다. 육가장이 비밀리에 키운 초극 고수가 나섰다면 왜구의 수급을 지키기는 힘들어진다.
“나귀 떼어내고 한 귀퉁이씩 들자.”
진혜예가 관도 옆으로 뻗어 있는 수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로를 넘어 돌아가자는 말이다.
당나귀를 수레에서 떼어내고 각자 수레의 한 귀퉁이를 잡는다.
“보폭 일 장씩!”
서로 보폭과 박자를 맞춰서 수레를 들고 수로를 건넌다.
수로의 폭은 십 장 남짓, 등평도수를 펼치면 금방이다. 수레를 반대편에 내려놓은 다음, 힘 좋은 경철운이 다시 수로를 넘어가 당나귀를 수로로 밀었다.
수로의 물살이야 그리 심한 것이 아니니 당나귀가 무난하게 헤엄쳐 건넜다.
= 응3 감시 모드, 대상 숲속 매복자들. 농꾼, 나를 기준으로 반경 2km 내에 초극 고수 출현 시 알려.
범위 내 모든 사람들을 스캔하라는 소리다.
수레에 나귀를 연결하고 수로에서 제법 떨어진 관도를 찾았다.
- 이쪽 관도도 진입 불가입니다.
관도를 따라 십 장쯤 걷자니 농꾼의 보고와 함께 화면이 펼쳐진다.
관도 옆에 앉아서 쉬고 있는 늙다리 하나다. 그저 평범한 노인으로 보이지만 호신강기가 감지되는 상대.
= 응2를 움직여 이쪽에서 부도로 들어가는 관도를 싹 훑어!
“잠시 쉬지요.”
“왜?”
“이 앞에도 있습니다. 초극 고수.”
“말도 안 되는!”
진혜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이쪽 방면에서 가흥부 부도로 연결된 관도 세 곳, 길목 전부에 초극 고수가 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가흥부 부도의 사방 성문에 한 명씩 감지됩니다.
= 초극 고수가 전부 일곱이나 동원되었다는 말이야?
- 예, 리퍼.
초극 고수 일곱이 동원되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짓거리야? 이게 가능해? 금선방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금선방의 배후인 태호 육가장? 육가장에 그런 역량이 있을 수는 있다. 명색이 무림 최강의 흑도세가 아닌가. 숨겨 둔 칼이 일곱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에 꺼낼 필요가 있을까?
현무대의 알려진 전력을 생각하면 그냥 초극 고수 한둘 같이 보내면 될 일 아닌가.
설마, 응 시리즈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