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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28화 (28/175)

28화

절강행(10)

“일단 멸왜단에서 어디까지 원하시는지 먼저 들어보고 싶군요.”

“양도는 불가하겠지?”

“예. 지금 제가 부리는 애들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할 것도 없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해야 한다. 그래야 엉뚱한 시도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다른 매들을 자네가 부리는 매들만큼 조련할 수 있겠나?”

농꾼 녀석의 공방에다 주문 제작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

“반쯤 영물들이라 다른 매들을 조련한다 해도 저 녀석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다고는 못하겠군요.”

“자네가 멸왜단에 있는 동안의 활약에만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군.”

내 대답에 진우탁이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뭔가 결심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 혹시 내 뒤를 이어 멸왜단주 할 생각은 없나?”

아니 이 양반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저는 할 일이 있는 몸입니다. 멸왜단에 입단한 것도 그 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이미, 사부가 계시니 내 제자가 되는 것은 좀 억지고, 자네 평판이 안 좋아질 수도 있지. 그래, 내 딸 어떤가? 가족이 되면 내 무공도 가전 무공이 되니깐 아무 문제없지 않나?”

진우탁이 내 말을 끊으며 하는 소리다.

“연상 취향 아닙니다! 전 연하 좋아합니다!”

이 양반이 나를 누구랑 엮으려고 그래!

응 시리즈에 대한 열망이 생각 이상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나는 신원이 불분명한 뜨내기다. 그런 상대에게 이런 제안을….

아니 생각해 보니 당연한 것이다. 멸왜단은 이름 그대로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왜구를 막는 것이 제일 큰 목적.

응 시리즈를 활용하면 왜구 놈들이 상륙하기 전에 찾아내서 선제 타격을 할 수 있다.

양민의 피해 없이 왜구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신분이고 뭐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불분명한 신분이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당장 멸왜단주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멸왜단은 진우탁 개인이 세운 방파가 아니다. 절강의 무림 방파뿐만 아니라 상단과 관부까지 관련되어 있다. 현 멸왜단주인 진우탁이 나를 내세우더라도 절강 각 세력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절강 무림뿐만 아니라 상계, 관부까지 움직여 내 신원을 탈탈 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적극 협조해야 되고 말이다.

검증 받아야 하는 것은 신분만이 아니다. 멸왜단주가 될 만한 능력도 보여야 한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최소 10년은 멸왜단에서 굴러야 단주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 그렇게 10년을 멸왜단에서 한결 같이 왜구를 잡으며 살다 보면 나는 절강 무림이 원하는 인물로, 반듯한 멸왜단주로 바뀌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생각 바뀌면 말하게.”

이러다가는 절강에서 발목 잡혀 멸왜단에서 평생 왜구와 굴러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말을 돌렸다.

“추종향 추적. 대해에서 왜선의 식별, 왜구 선단의 규모 파악. 이 정도만 해도 멸왜단에서는 상당한 효용이 있다 생각합니다만?”

“그 말은?”

내 말에 진우탁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지고 기대로 반짝거린다.

“제가 부리는 애들만큼은 불가능하지만, 이 정도는 다른 매들도 조련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말이 끝나자 진우탁이 바로 물었다.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이 아님은 아시지요?”

“당연하지.”

내 말에 진우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가 제안한 일에 대한 확답을 원합니다.”

내 첫 번째 제안을 처리해야 일이 진행된다는 말이다.

“자네가 면담을 원하는 분들의 명단을 넘겨주게.”

“승낙입니까?”

“십 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내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 보지.”

멸왜단주의 영향력이면 어지간하면 면담이 성사될 터.

“그럼, 첫 번째 분과의 면담을 바로 시작하지요.”

“뭐?”

내 말에 진우탁의 눈이 커졌다.

“단주님도 당사자십니다.”

씨익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려 준다.

“허, 사람 하나 만날 수고는 덜었군. 잘됐어. 자네가 만나서 무얼 할지 내가 겪어 보면 그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쉬워지지. 그래, 무공의 완성을 위해서라 했지?”

“예.”

“어떤 이야기인지 시작해 보게.”

“제게 손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내가 물었다.

“손? 기맥을 살피겠다는 건가?”

진우탁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비슷합니다만, 단주님과 제 손끝이 살짝 닿는 정도입니다.”

“해보게.”

진우탁이 손을 내밀었다. 내 중지와 진우탁의 중지가 맞닿았다.

“진기운행을 멈춰 주시겠습니까?”

“나에게 했던 것과 비슷하군.”

한쪽에서 조용히 서 있던 정천성이 내 뒤에 서며 물었다.

“예.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행위지요.”

“나 때는 진기운용을 멈추란 말 없었지 않나?”

정천성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진기운용을 멈추란 말에 의심이 싹튼 것이다.

“초극 고수가 자연스레 발하는 호신강기를 뚫고 기맥을 살필 재간이 없으니까요.”

“그럼, 호신강기만 억제하면 되겠군. 안 그런가?”

내 대답에 정천성이 다시 물었다.

“그렇지요.”

“그럼, 호신강기만 억제하겠네.”

내 대답에 진우탁이 그렇게 답했다.

- ZJ-06과 연결이 회복되었습니다. ZJ-06의 데이터 백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들려오는 농꾼의 목소리.

= 영혼의 맞다이는? 살벌하게 해킹 전 벌여야 한다면서?

농꾼, 이 새끼가 나한테 사기 친 거야?

- 수확 대상자에게 심어진 나노 머신은 숙주의 안전이 최우선 사항입니다. 리퍼와 숙주가 적대했을 경우 그렇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숙주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상태면 상위 개체의 정당한 명령은 당연히 받아들입니다.

=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럼, 후속 조치는? 안전장치를 삽입하려면 어차피 해킹 전 벌여야 하는 거 아냐?

- 숙주가 기절 상태도, 제압 상태도 아닙니다. 지금 해킹을 시작하면 ZJ-06이 이를 위협으로 판단하고 자신과 숙주의 안전을 위해 숙주를 자극할 가능성이 99%입니다. 숙주는 그 자극을 리퍼의 짓으로 여겨 적대할 가능성이 99% 이상입니다. 리퍼께서 이에 대응이 가능합니까?

좋은 말로 해결되었을 경우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안전장치를 설치하려면 수확 대상자를 어떻게든 제압해야 된다는 소리.

즉 수확 대상자보다 강해야 된다는 말이 된다.

= 그래, 좋게 해결되었는데 괜히 척질 필요 없지. 그런데, 이렇게 되면 데이터 자동 갱신이 안 되잖아. 갱신이 필요할 때마다 내가 나서서 이 짓을 반복해야 된다는 거야?

- 리퍼께서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숙주에게 위해가 가지 않는 방법을 ZJ-06에게 입력시켰습니다. 수면 시 잠시 간 호신강기를 억제하는 습관을 들이는 방법으로 심리 조작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켰습니다.

= 그럼, 진우탁 멸왜단주의 수확은 끝났다는 말이네?

- 예, 리퍼.

= 진우탁의 부상 이력도 감지해 놔.

정천성이 자신의 경우에 빗대어 무슨 소리를 할지도 모르니 대비해야 했다.

- 백업 데이터에서 찾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따로 감지할 필요 없다는 소리다.

“끝났습니다.”

손을 떼며 말했다.

“다른 분들과도 동일한 일을 할 생각인가?”

“예.”

“그런데, 딱히 기맥을 살핀다는 느낌이 들지 않던데?”

진기로 기맥을 더듬어 나가는 느낌 따위 받았을 리 없다. 진기를 움직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익힌 무공의 특성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핑계를 댄다.

“해보니 딱히 독대를 할 필요도 없군. 진기를, 호신강기를 잠시 자제해 달라는 부분에서 혹여나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면담 당사자의 측근을 정 부당주처럼 자네 뒤에 세우는 게 좋겠군. 괜찮겠나?”

“예,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면담 건은 진행하겠네.”

“현무대주를 비롯한 현무대원들에게 미리 전해 놨으니 면담의 대가는 그쪽을 통해 얻으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정 부당주, 이곳은 폐쇄하는 것으로 하지.”

진우탁이 정천성을 보며 말했다.

“우물과 샘을 비롯해 취수원으로 삼을 만한 곳은 왜구의 시체로 오염시켜 놓고, 숲은 불 지르면 됩니다만, 출구 폐쇄가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그건 단주께서 맡아 주셔야 할 듯합니다.”

“솔직히 그러라고 불렀지 않은가?”

정천성의 말에 진우탁이 장난스레 웃으며 대꾸했다.

“어차피 제일 마지막에 해야 할 일 아닌가? 챙길 거 챙기고 박살낼 거 박살내서 자네 할 일 다 끝나면 부르게.”

“예, 단주.”

정천성이 물러났다.

“자,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진우탁이 물었다.

“영약을 구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농꾼을 통해 언제든지 몰아지경에 들 수 있는 탓에 내공의 진전이 상당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내가 절정 지경에서 빠져나오려면 연(年) 단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 시간을 단축시킬 방법으로는 영약이 최고였다.

내공을 전수 받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진짜 가능성이 일말도 없는 일이기에 입 아프게 말을 꺼낼 필요도 없다.

“영약에도 급이 있지 않나? 어느 정도를 원하는 건가?”

“제가 초극 고수가 될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자네, 지금 절정이지?”

“예.”

“소림 대환단이나, 아미의 금정신단 같은 최상급을 원한다는 거군.”

진우탁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과한 요구입니까?”

너무 나갔나 싶어 물었다.

“뭐, 우리 입장에서는 초극 고수 하나 만들어내는 것보다 기어들어오는 왜구들 위치 아는 게 훨씬 중요한 일이네. 절강에 고수가 없어서 왜구들을 못 잡는 게 아니니깐. 자네 요구는 과한 게 아니야. 전혀 과하지 않아. 과하다고 하는 놈은 왜구 앞잡이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진우탁의 찌푸린 인상은 풀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영약을 구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거지. 개인적으로는 사문이자 멸왜단의 가장 큰 후원자인 보타문이 같은 불문으로 소림과 아미와 제법 친하기는 한데, 그런 영약을 내어 달라고 청할 정도는 아니거든.”

천운이 닿아야 그 재료를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다. 소림을 위시한 정도 팔파와 같은 거대 세력도 몇 세대에 걸쳐 재료를 모아 만든다.

물론 한 번 만들 때 한둘이 아닌 수십을 만든다지만 언제 또 만들 수 있다는 기약이 없는 물건이기에, 하나 사용하는데도 신중에 신중을 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보타문이 대환단과 금정신단에 비견되는 영약을 만들 역량이 없지는 않는데…. 마지막 남은 것을 얼마 전에 써 버렸다 들어서 말이야.”

“최상급 영약이 힘들다면 쓸 만한 영약을 대량으로 얻고 싶군요.”

자잘한 영약이라도 꾸준히 먹는 것이 안 먹는 것보다 낫다.

“어느 정도를 원하나?”

“소림 소환단 기준으로 어느 정도 구하실 수 있으십니까?”

대환단과 달리 소환단은 무림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암암리에 유통되는 영약이다.

귀한 약재로 만든 영약이지만 그 약재가 사람과 돈을 써서 노력한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약. 그러니 믿을 만한 인맥들을 통해 유통이 되는 것이다.

한 알을 팔아 얻은 재화로 다시 몇 배의 소환단을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보타산의 존장들을 동원하고, 절강 거부들의 협조를 얻으면 백 개 정도?”

대환단과 달리 그걸 다 먹는다고 초극 고수가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초극 고수가 되는 시간은 확실히 줄일 수 있었다.

“그럼, 소환단 백 개로 합의를 보지요.”

“절강 전역의 왜구를 잡으려면 한두 마리로는 안 되는 건 알고 있겠지?”

“어리고 튼튼한 놈으로 열 마리 정도 보내 주시지요.”

“그럼, 소속을 내당으로….”

“현무대 일과 병행할 생각입니다만?”

진우탁의 수작을 단칼에 끊으며 말했다. 내가 진우탁의 입장이라도 주위에 눈을 깔아 놓고 매를 조련시키는 비법을 알아내려 할 테니 말이다.

“현무대의 일과 병행하기에는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나?”

그냥 매 조련 한답시고 내당에 들어앉아 있는 게 더 힘든 일이다.

진짜로 내가 조련할 것도 아니기에 매 조련의 전문가가 비법을 알아낸답시고 옆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으면 비전문가인 주제에 전문가 행세를 해야 하는 나는 힘들 수밖에 없다.

“제가 멸왜단에 입단한 이유는 왜구들과의 실전을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훗날을 위해 명성을 쌓기 위해서고요.”

강호에서 ‘이도연’ 하면 ‘아, 그 멸왜단의?’라고 만드는 것이 내가 절강에 온 첫 번째 이유다.

그래야 수확 대상자를 상대로 사고를 쳤을 때, 청도방이 아닌 멸왜단을 찾을 것 아닌가 말이다.

고로 멸왜단에서 명성 쌓기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단주인 진우탁도 천문위고, 절강의 천문위 중에 아는 사람도 많은 것 같으니 미안한 마음 따위 전혀 없다.

등가 교환이다! 내게서 왜구를 처리할 방법을 얻으니 미래에 생길 내 문제 좀 짊어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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