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절강행(09)
- …퍼,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리퍼!
귓가에 농꾼의 목소리가 쟁쟁하니 울린다.
“크흑!”
전신 안 아픈 데가 없다.
“어떻게 된 거야?”
내 몸은 물 위를 미끄러지고 있는 상태.
- 2초 정도 기절하셨습니다. 염가동의 도격에 실린 힘이 갑작스레 증폭. 이에 대응해 체내 축적된 철 이온을 방출하고 막을 형성한 뒤 충전된 모든 전력을 걸어서 방어와 전기 충격에 성공했습니다.
농꾼의 이야기를 들으며 허리를 들어올렸다. 뒤로 밀려나는 힘과 물이 나를 받치는 힘을 이용해 물 위에서 뒤로 구른다. 누운 상태에서 수면에 납작 엎드린 상태가 되어 주위를 살핀다.
염가동이 보이지 않았다. 전기 충격은 초극 고수를 잠시 움찔하게 만드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염가동이 나를 끝장내기 위해 달려와야 정상인데….
파항!
물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십여 장은 떨어진 곳에서 염가동이 치솟아 오른다.
“전기 충격만 당한 게 아닌 모양인데?”
염가동도 물에 빠진 생쥐 꼴. 옷차림이 꽤나 헝클어진 상태다. 그리고 허공에 치솟아서 주위를 훑는 꼴이 내 종적을 찾는 모양새다.
뭔가 격한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면 내 종적을 놓칠 리 없지 않은가.
- 전기 충격에 몸이 경직되어 입수. 배가 된 도강이 수면과 반발하면서 물기둥이 치솟으며 염가동을 후려쳤습니다.
경직에 빠진 순간 자기 힘에 자기가 당했다는 소리. 나는 그 덕에 살아났다는 소리도 된다.
- 들켰습니다.
농꾼의 경고와 동시에 사지로 수면을 박차고 물 위를 내달렸다. 당연히 피풍의를 날개로 전개한다.
- 20초, 21초 거리.
염가동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진다. 역시 경공이 약점이다.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속력을 조절한다. 어쨌든 내가 해야 할 일은 저 작자를 묶어 놓는 거니 말이다.
“얼마나 강한 거야?”
- 염가동의 증폭된 강기의 위력은 마*카*원 알파 숙주를 기준으로 129%입니다.
내 물음에 농꾼이 답했다. 강기의 위력만 따지면 사부님보다 윗줄이라는 소리다.
“맞상대 가능성은?”
- 육상에서는 상대 불가입니다.
물 위에서 싸우라는 소리다.
“물 위에서는 가능하다는 소리지?”
- 강기 증폭의 발동 조건부터 정확히 탐지해야 합니다. 데이터 상 태산파에는 이런 종류의 무공이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구들이 쓰던 수법일 가능성이 컸다.
팡, 파팡!
물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 20초, 19초, 18초. 거리 줄어들고 있습니다.
농꾼의 경고. 염가동은 도강을 이용해 속력을 올리고 있었다. 강기가 물과 접촉해서 일어나는 반발, 그 폭발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수면 위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오르는 모양새.
저런 식의 경공은 체공 시간이 길다. 공중에 떠 있을 때 방향 전환이 불가하다는 소리. 그러니 속력을 올릴 필요 없이 방향을 바꾸면 된다.
팡!
수면을 터트리며 염가동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 동굴이 뚫린 쪽, 동쪽 절벽을 향해 방향을 꺾는다.
- 17초, 18초, 19초.
“배터리 충전은?”
염가동과의 거리 재기에 여념 없는 농꾼에게 물었다.
시야 한쪽에 줄어들고 있는 숫자가 빛났다.
75. 74.
줄어드는 숫자 옆에 충전 그래프가 차오르고 있다.
“끝나면 알려 주고.”
절벽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섬 내부의 수면을 달리고 있는 중이니 한 방향으로 길게 달릴 수 없다. 일단 절벽 면을 타고 올라갔다.
- 16초.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그 짧은 순간에 거리가 확 준다.
절벽 위 가장자리에서 보란 듯이 내달린다.
- 18, 19.
아직 수면을 박차야 하는 염가동이다. 방향 전환과 단단한 지면을 박차는 것에서 오는 차이가 다시 거리를 벌린다.
- 염가동 절벽 위로 올라왔습니다.
농꾼의 경고. 다른 무공에 비해 경공이 떨어진다 해도 기본이 초극 고수다. 발아래가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하는 수면 위에서는 제 속도를 못낸 염가동이지만, 바닥이 단단한 지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10초!
염가동이 절벽 위로 올라온 지 30초, 그 사이에 거리가 확 줄어들었다.
다시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 배터리 충전되었습니다.
수면 위를 활공하는 도중 들려오는 농꾼의 목소리.
파파팟!
물 위를 내달려서 절벽 내 수면의 중심에 도달한 다음 몸을 틀어 쫓아오는 염가동을 바라보며 발을 멈췄다.
촤아악!
달리던 관성 탓에 멈춰 선 양발이 수면 위를 긁으며 포말을 만들어낸다.
몸이 물에 빠져들기 전에 다시 수면을 박차며 염가동을 향해 내달렸다.
칼자루를 쥔 오른손으로 정면을 겨누고, 왼손은 자연스레 뒤로 늘여 놓은 채 달린다.
“왼손으로 철 이온 방출.”
농꾼이 뿜어내는 철 이온이 왼손에 만들어 놓은 기막 안에서 휘몰아친다.
수면 위로 깔아지듯 달리는 것이 아니라 염가동을 본받아 수면을 박차고 튀어 올라 일 보의 보폭을 늘린다.
순식간에 서로의 거리가 줄어들고 서로를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었다.
팡! 팟!
수면이 터져 나가며 내가, 염가동이 서로를 향해 허공을 가른다.
“끼요옷!”
염가동의 입에서 기괴한 기합이 터지며 압도적인 빛의 궤적이 나를 휩쓸었다.
촤아악!
머리 위를 휩쓸고 지나가는 빛의 궤적. 염가동의 칼은 정확한 궤적을 그렸다. 그저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위치에, 원래 진행해야 할 궤적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왼손이 움직이고 기막이 뻗어 나간다. 기막을 따라 철 이온이 늘어선다. 기막과 염기동의 몸이 접촉하는 순간!
“최대 전력!”
배터리의 모든 전력을 쏟아 부었다.
번쩍! 파지직!
나와 염가동 사이로 번개가 치달렸다.
“…….”
첨벙!
염가동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물 위로 떨어진 염가동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
피이잉! 펑!
허공으로 한 줄기 연기를 매단 것이 치솟아 오르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왜선의 밑창을 다 작살냈으니 물러나자는 신호다.
“왜선들 상태는?”
혹시나 해서 농꾼 녀석에게 확인을 했다.
- 모두 침수 진행 중입니다.
농꾼의 확답에 절벽 위에 던져 놓았던 탄궁을 챙기고 약속한 장소로 달려간다.
“이쪽이다!”
먼저 도착해 있던 경철운이 손을 흔들었다.
“다 박살낸 거냐?”
“나룻배까지 싸그리 다 구멍을 뚫었지.”
내 질문에 경철운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형님, 상대하던 초극 고수는 어떻게 된 거요? 바다 쪽에서 뭔가 번쩍한 뒤로는 번번이 치솟던 물기둥도 잠잠하던데….”
화인천이 물었다.
“나랑 한참 술래잡기 하다가 왜선들이 죄다 기울어져 있는 걸 보더니 두고 보자면서 내빼던데?”
염가동은 죽이지 않았다. 활성화된 마*카*투 알파를 먹이고 섬 밖의 바다로 밀어 버렸다.
마*카*투는 마*카*원에 숙주 통제 기능을 강화한 버전이다.
“이제 한 시진만 버티면 해 뜨겠군.”
- 그 전에 도착할 듯합니다.
농꾼의 장담대로 해 뜨기 전에 멸왜단 무인들을 태운 쾌속선들이 응5의 인도를 받아 당도했다.
쾌속선은 모두 열 척이다. 한 척에 노꾼을 제외하고 30명의 무인들이 타고 있었다.
300명의 정예가 쾌속선에서 내려 절벽 위로 올라왔다. 그 중 270명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 왜구들을 기습했다.
왜구들은 머릿수가 많았지만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불타버린 왜선 때문이었다. 왜선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밤새도록 뛰어다녔지만 결과는 꽝이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한 척의 왜선도 건지지 못했으니 몸과 마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대규모 습격을 받았으니 무슨 저항을 한단 말인가.
멸왜단 무인들은 왜구들이 쓰러지면 목을 베어 확인 사살까지 했다.
여기저기서 투항하는 왜구들이 나왔다. 하지만 멸왜단 무인들은 왜구들의 투항을 받아 주지 않았다. 맺힌 것이 많은 탓인지 머릿수가 적은 탓인지 알 수 없다.
일부 왜구들이 나무 조각에 의지해 바다로 헤엄쳐 도망쳤다. 그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다.
섬 밖으로 통하는 출구는 30명의 궁수들이 틀어막은 상태. 절벽 위에서 내리꽂히는 화살에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해가 뜨면서 시작한 살육은 반나절 만에 끝이 났다.
“왜구 1,237명 전원 사살했습니다.”
‘멸왜단’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곳의 왜구들을 멸절시킨 것이다.
“참수(斬首)한 왜구의 수급은 효수(梟首)할 수 있게 절강 각지의 지부대인에게 나눠 보내도록 하게.”
수하의 보고에 외당 부당주 정천성이 그렇게 명을 내리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쉬어야 할 사람 불러내서 미안하군.”
“별 말씀을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현무대주는 진혜예다. 현무대의 일이라면 진혜예를 부르거나 전부를 불러야지 나만 따로 부를 필요는 없다.
“여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네. 자네 생각을 한번 들어보고 싶군.”
방치해 두면 언젠가는 왜구들이 다시 자리를 잡을 것이 뻔했다.
“폐쇄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해금령 때문에 여기에 분타를 세울 수도 없고 말입니다.”
해금령(海禁令). 넓디넓은 바다를 이용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는 이유 모를 정책이다.
“다른 방법도 있지 않나?”
“제가 부리는 아이들을 빌려 달라는 말을 빙빙 돌려 하십니다.”
응 시리즈를 활용하면 드넓은 바다에서도 왜구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 섬을 은밀히 감시한다는 핑계로 응 시리즈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표가 났나?”
정천성이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저만 따로 불러냈으니 이유야 뻔한 거 아닙니까?”
“빌려 줄 수 있나?”
내 말에 정천성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부당주님과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닌 듯 합니다만?”
내가 정천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멸왜단의 외당 부당주가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거 보십시오. 싸게 후려치기에는 머리가 좋다 했잖습니까?”
정천성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다.
“확실히 그렇군.”
대답과 함께 누군가가 임시 지휘소로 사용하고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사십 대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중년이다. 2m는 족히 되는 창을 들고 있는….
“자네는 나를 처음 보는 거지?”
- 리퍼, 수확 대상자입니다.
“멸왜단을 책임지고 있는 진우탁일세.”
수확 대상자 중 일 인인 멸왜단주 본인이었다. 늙기 전에 초극 고수가 되면 저렇게 되는 건가? 도저히 스물일곱 살 된 딸이 있는 얼굴로는 안보였다.
“단주님을 뵙습니다. 멸왜단 현무대 소속 이도연입니다.”
“예에게 듣자니 거래를 원한다던데?”
내가 인사를 하기 무섭게 진우탁은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진혜예에게 전한 제안은 응 시리즈가 아닌 등평도수를 원활히 펼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거래였다.
“예.”
“원하는 것이 뭔가?”
“일단 절강에서 이름 난 몇몇 분들과의 면담입니다.”
“면담?”
내 말에 진우탁이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제 무공을 완성하기 위한 일입니다.”
“가르침을 청하는 것도 아니고 면담이라?”
내 대답에 진우탁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조건은 없고?”
“제가 제안한 거래에는 그 정도면 됩니다.”
내가 제안한 거래에 국한한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그럼, 지금 우리 멸왜단에서 원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대가가 필요한가?”
멸왜단주, 아니 멸왜단은 응 시리즈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
뭘 뜯어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