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절강행(02)
백관 철궁이라기에는 이 관이 모자랐지만 어쨌든 나는 멸왜단이 제시한 시험을 통과했으니 따로 통나무를 벨 필요는 없었다.
나와 같이 있던 열셋은 전부 훌륭하게 통나무를 베어내 자신의 무위가 일류임을 증명했다.
이류 무인을 가리는 시험에서는 탈락자가 속출했다. 목검으로 청석판을 깨지 못한 자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목검이 부러지는 자들이 많았다.
삼류 무인들은 통과자가 없었다. 대나무를 가로로 자르는 게 아니라 세로로 자르는 것이 시험, 게다가 잘린 대나무의 단면을 살펴 날에 잘린 것인지 힘에 쪼개진 것인지까지 구분하니 통과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
“삼류를 뽑는 시험이 너무 깐깐한데?”
“그러게, 저렇게 깐깐하게 할 바에는 아예 삼류 무인들은 모집하지 않는 게 좋지 않나?”
청석판 시험에 통과한 낭인들 사이에서 나오는 소리다.
“왜구들 단병접전에서 대단하다는 소리 못 들었어? 그냥 설렁설렁 뽑았다가는 삼류 무사들 실력으로는 단번에 썰려 나갈 걸?”
“그러니 하는 소리 아닌가. 차라리 이류부터 뽑으면….”
“뭘 모르는 소리 말게. 삼류 쪽 시험관 다섯 중 멸왜단 사람은 한 명밖에 없어.”
“무슨 소린가?”
“다섯 중 넷은 보타문 속가 사람들이라고. 여기 멸왜단 시험을 본다는 것은 왜구와 싸우겠다고 나설 정도로 용기와 협심이 있다는 말이니, 자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보타문 속가에서 데려간다고.”
그 말대로인 듯하다. 시험에 탈락해서 실의에 빠진 삼류 무인들이 시험관과 몇 마디 나눈 다음 표정이 확연히 바뀌고 있었다.
“삼류는 그렇게 뽑는데 탈락한 이류 무인들은?”
“저치들이야 각자 내공에 입문했고, 미약하지만 그걸로 이룬 게 있는 자들 아닌가.”
꽤나 견문이 있는 낭인이다. 맞는 말이다. 미약하다지만 이룬 것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합격자들은 이쪽으로 모이시오!”
사람들을 따라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누군가 내 소매를 잡았다.
“자네는 이쪽이네.”
구십팔 관 철궁을 가지고 나왔던 시험관이다. 시험 때와는 달리 반말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시험에 합격했으니 멸왜단 사람 대우해 주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따라오게.”
시험관이 앞섰다. 정문 옆 쪽문을 통해 멸왜단 총타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장원 한쪽의 전각 안.
“나는 멸왜단 외당 부당주인 정천성이라네.”
명성은 익히 들었다는 관용적 표현이라도 하고 싶지만, 상대의 별호조차 모르는 처지다.
“이도연입니다.”
그래서 나도 이름만 달랑 말한다. 익숙지 않은 가명을 댔다가 나중에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본명을 사용한다. 나중에 청도방에 피해가 간다? 절강에서 왜구를 잡아 명성을 떨치면 강서 공주부 청도방의 섬패 이도연이 아니라 절강 멸왜단의 이도연이 된다. 그러니 절강에서 사고만 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더군. 백 관 철궁 시험을 무리 없이 통과하다니 말이야.”
백 관 철궁 시험은 일류와 절정을 나누는 기준, 그러니 나를 절정으로 보는 것은 무리 없는 일이다.
“죽도록 굴러다녔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요.”
“사문을 알 수 있겠나?”
“멸왜단은 그런 거 안 따진다고 들었습니다만?”
“일반 단원이야 그렇지. 그런데 절정 무인을 일반 단원으로 굴릴 수는 없지 않은가?”
“천랑(擅浪) 석무제, 사부님은 스스로를 그렇게 밝혔습니다.”
“낭인이셨나?”
“예.”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군.”
당연하다. ‘조문형’이라는 사부의 본명을 한국식 발음에 착안해 대조어로 때려 넣은 이름이 석무제다. 아침(早)과 저녁(夕), 문(文)과 무(武), 형(兄)과 아우(弟).
뭐 한국식 발음이 그렇다는 거지 글자까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지간한 특급 낭인들은 안다고 자부하는데 말이야.”
“낭인으로 활동하실 때 이류였다 하셨습니다.”
“이류 무인의 낭인?”
“하산하기 전까지 맞고 산 입장에서는 믿기 힘들지만 그러시다 하더군요.”
멸왜단은 절강에서 손꼽히는 무력 단체다. 그런 단체의 외당 부당주니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이다.
“사부께서 기연을 얻어 낭인 생활을 청산하신 모양이군.”
절정 무인을 길러낸 고수가 기연을 얻어 실력을 닦은 낭인이다. 내 신원을 확인한답시고 섣불리 찾아갈 수 없다. 자신이 얻은 기연을 노리는 자로 여겨질 수 있으니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에게 사부와 살던 곳을 물을 수도 없는 것이다.
“왜 멸왜단을 택했는지 묻고 싶군. 그 나이에 그 실력이라면 어디가든 대우 받을 수 있을 텐데?”
내 생각대로 정천성은 내 출신지에 대해 더 캐묻기를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
“사부께서 무공은 동굴 같은데 들어앉아 칼 휘두르는 것보다 사람 상대로 휘두르고 피를 봐야 확연히 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피를 많이 보면서 신망까지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절강의 항왜 활동을 추천하셨고요. 전대 신창양가의 가주셨던 구민신창의 경우를 봐도 나쁜 선택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전대 신창양가의 가주 구민신창은 서자(庶子) 출신으로, 원래는 가주가 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항왜 활동으로 신망을 얻어 적자(嫡子)인 동생을 누르고 가주 위에 등극한 것이다.
뭐 이것도 신창양가의 본가가 나름 바다와 접하고 있는 남직례 양주부에 위치한 탓이 크다.
“나중에 제가 어찌 될지 모르지만 사내인 이상 큰일을 꿈꿀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명문의 후예들이 항왜 활동에 가담하는 이유다. 다들 대의대민을 내세우고 있지만 나는 대놓고 말했다.
“원하는 자리가 있는가?”
“왜구와 해적들과 많이 싸울 수 있는 자리를 원합니다. 정찰이나 순찰 쪽도 좋습니다.”
“순찰? 그쪽은 많이 고될 텐데?”
왜구가 나타날 만한 해안가를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하는 게 순찰이다.
“창을 좀 열겠습니다.”
정천성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창문을 활짝 열었다.
= 응 시리즈 집합시켜.
- 예, 리퍼.
내 문자질에 농꾼이 바로 답했다.
“휘이익!”
창문 밖으로 길게 휘파람을 분 뒤 자리에 앉는다.
잠시 뒤, 응 시리즈들이 창문 안으로 내려앉았다. 마치 내 휘파람 소리에 반응한 듯 말이다.
“이 매들은 다 뭔가?”
한두 마리도 아닌 다섯 마리나 되는 매가 집무실 안에 옹기종기 모여들자 정천성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제 눈이 되어 줄 녀석들이지요.”
“매들이 적아를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산적들 상대할 때 저 아이들을 써 본 적이 있지요. 무장한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망망대해에서 다가오는 배를 보고 신호를 보낼 수도 있고요.”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시야와 하늘을 나는 매의 시야는 그 넓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확실히 매들이 다가오는 배를 알아보고 신호를 보낼 수 있다면 정말 크게 도움이 되겠어.”
반응 보니 순찰 쪽 일을 맡길 가능성이 구 할이다.
***
어디를 가도 방파의 중진이 될 수 있는 실력. 그게 절정 무인이다. 그런 절정 무인의 용도를 외당 부당주인 정천성 혼자 결정하는 것은 무리다.
무슨 소리냐 하면 확실한 자리가 정해질 때까지 대기한다는 소리다.
물론 자리가 정해지지 않았다 해도 공짜는 아니다. 멸왜단에 소속된 순간부터 월봉은 나온다.
삼류 무사는 은자 두 냥부터 시작하고, 이류 무사는 은자 다섯 냥, 일류 무사는 스무 냥부터 시작한다.
내 월봉은 일단 절정 무인의 기본급으로 은자 쉰 냥이다. 기본급은 말 그대로 기본급. 여기에 자리가 정해지면 보직 수당이 붙고, 왜구를 상대하러 출동하면 출동비가 따로 지급되는 식이다.
그리고 전과에 따라서 또 포상이 지급된다 하니, 어지간한 방파보다 돈이 배로 나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수익 사업이라고는 없는 멸왜단이라 이 모든 것을 기부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그런데 절강이 워낙 부유한 지역이라서 그런지 지방 유지들의 기부로 모든 자금이 충당 가능하다 한다.
“왜구가 단병접전에 강하다는 말은 다들 한 번씩 들어는 봤을 것으로 안다.”
대기 시간이라고 노는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한 이번에 들어온 신입들은 한데 모여서 왜구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소문이 아닌 사실이다. 헐벗고 덩치도 작지만 절대 만만히 보지마라. 이놈들은 머릿속에 공격밖에 없는 족속들이라 한 번 몰리기 시작하면 끝장이다. 그리고 왜구 중 어째 옷차림에 격식이 있다 싶고, 왜도 말고 짧은 칼을 한 자루 더 차고 있는 자들을 본다면 자신의 무위가 일류가 아닌 이상 격검(擊劍)할 생각은 하지 마라. 이런 자들은 셋 이상 뭉쳐서 단에서 지급하는 창으로 상대하는 것이 좋다.”
“일류 무인들은 그런 자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겁니까?”
신입 중 하나가 물었다.
“일류 무인이라도 무턱대고 덤비면 안 된다. 일단 상대의 기세를 살펴야 한다. 상대의 기세가 이류쯤 된다고 생각되면 절대 혼자 덤비지 마라. 둘 이상 조를 짜서 덤벼야 한다.”
“상대가 이류인데 일류 둘이 붙어야 한단 말입니까?”
“왜구의 내가기공은 중원과 다르다. 이류로 느껴져도 이류가 아니다. 왜구들은 단전에 기를 갈무리하는 우리와 달리 전신의 기를 일순간 터트린다. 순간적인 힘을 중시하기에….”
왜구들의 무공 특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욱 이어진다.
“대강 느껴지는 기세의 한 단계 이상 실력이라 보면 된다.”
“일류 무인의 기세를 가진 왜구라면, 절정 무인도 정면 승부를 피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절정 둘이 일류의 기세를 가진 왜구 하나를 상대하다 죽은 적도 있다.”
어째 왜구의 무서움을 강조하는 게 예산 확보를 위해 적성 국가의 위협을 부풀리는 어느 군대 느낌이 났다.
뭐, 그것과 달리 이 시대 왜구가 진짜 무서운 존재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론 교육이 끝나면 이류 무인들은 창을 들고 집단 전법을 배운다.
대단한 창법은 아니다. 기본적인 찌르기와 오를 짜서 창으로 견제하는 법, 투창하는 법 등이다.
일류 무인들은 둘, 셋씩 짝을 지어 협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절정 무인인 나에게는 왜도의 대략적인 초식을 보여줬다.
그렇게 대강의 교육이 끝나니 신입들은 마음 맞는 자들끼리 삼삼오오 몰려서 총타를 나선다. 영파 부도로 들어가 한 잔 꺾으려는 것이다.
“이건 생각을 못했네.”
무위가 기준이 되어 다른 교육을 받다 보니 나는 같이 다닐 사람이 없게 됐다.
다들 삼삼오오 몰려나간 다음 홀로 총타 내의 숙소에 들어앉아 있으니 지나가던 멸왜단 무인이 측은한지 격려를 한다.
“신입 때는 서로 서먹서먹하니 그러려니 하게. 몇 번 같이 실전을 겪으면 쉽게 친해지니 걱정 말게나.”
숙소에 가만히 있으니 무슨 따돌림 당하는 학생처럼 쳐다본다. 혼자라도 나갈 수밖에 없다.
멸왜단에서 받은 패찰을 영파 부도의 성문지기에게 호패 대신 보인다.
“해시초(亥時初 ; 오후 9시)에는 성문을 완전히 닫네. 그러니 놀려면 부도 안보다는 포구 쪽이 낫네. 포구 쪽에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막아도 포구 밖으로 나가는 쪽문은 열어 두거든.”
성문지기의 충고를 따라 포구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포구를 싸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다가 적당히 어둠이 깔리자 멸왜단 총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응?”
포구를 벗어나려는데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백 관 철관 시험에 도전했다 망신당한 거한이다.
저치도 혼자 고독을 씹나 싶었는데, 걷고 있는 그의 소매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마침 지나가던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보지도 않고 그것을 발로 걷어 챙겨 간다.
전낭은 아니다. 그러니 소매치기 당한 것은 아니다. 거한이 타이밍 맞춰서 버리고 상대가 주워간 듯한 인상.
뭔가 냄새가 난다.
= 거한에게 응4 감시 모드로 배치. 주워 간 쪽에는 응5를 추적 모드로!
- 예, 리퍼.
이권 사업이 없는 멸왜단에 수작을 부리는 쪽은 뻔하다.
왜구나 해적, 둘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