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장철상의 어느 날
우리 청도방이 공주 부도의 흑도 패권을 쥔지 한 달.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제일 큰일은 길안부의 흑도를 움켜쥐고 있는 복로방과의 불가침 조약.
파양호 수채가 복로방의 요청을 받아 중재 세력으로 나선 일이기에 조약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우리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기에 조약 체결을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이제 한 동안 큰일은 없다 생각했는데…. 빌어먹을 사형이 뒤통수를 사정없이 쳤다.
“사형,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소?”
처음에는 잘못 들었겠지 했다.
“오늘부터 장철상, 장 사제가 청도방 소방주라고 했다.”
잘못 들은 소리가 아니었다.
“사형 미치셨소? 근래 천안각이니 뭐니 하면서 부도 내의 고양이들 죄 모아서 먹여 살리는 것도 모자라 요상스런 패찰까지 만들어 달아 줘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사제, 좋은 자리를 주겠다는 사형에게 무슨 망발이냐?”
들을 필요도 없는 소리다. 사형이 있는데 내가 그 자리에 왜 앉는단 말인가.
“사부 보고만 계실 겁니까?”
후계 구도를 결정하는 건 사부 아닌가. 사부가 이딴 헛소리에 찬성할 리 없다. 사부의 노후가 걸린 문제 아닌가.
“그렇게 되었다.”
아나, 사부까지 뒤통수를 후린다!
파룡당을 집어삼키는 것은 사형이 계획하고 실행했다. 나도 한 손 거들기는 했지만 내 역할이라고는 맹방의 수좌들보다 좀 나은 정도 아닌가.
나도 인간이기에 욕심은 난다. 공주 부도의 패권을 쥔 청도방의 후계자라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나는 내 주제를 안다. 무공도, 계책도 사형이 나보다 한 수 위. 아니 금정산 산중 수행 이전에나 그랬지, 그 이후로는 한 수 정도가 아니라 여러 수 정도의 격차가 생겼다.
막말로 희희낙락하며 받았다가 사형이 마음 바뀌어 다시 내놔 하면 그냥 줘야 한다.
어라 이거 혹시 사형이 나를 팽할 명분을 찾는 거 아냐?
“사형, 날 죽이고 싶은 거요? 아니 죽어도 이유나 알고 죽읍시다.”
“놈, 생각하는 거 하고는….”
사부가 인상을 쓴다.
“사부, 제자는 지금 흑도인의 정상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흑도인 백 명을 잡고 물어봅시다. 이런 경우 어떤 생각이 드는지!”
“도연아, 철상이 저 놈 헛소리 좀 안 하게 해라.”
사부가 역정을 낸다.
“우형이 금정산에서 기연을 만났다 했지? 기억나느냐?”
“얼마나 됐다고 잊겠소? 그 덕에 소제도 제법 덕을 보지 않았소.”
익숙해진 천해공을 일으켜 낭파조의 한 수를 허공에 선보인다. 그동안 철교아와 낭파조를 제법 수련했던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사형, 말 돌리며 분위기 잡지 마시고 그냥 무슨 일인지 시원하게 말해 주시지요.”
“너도 운공을 해봤으니 네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겠지?”
사형의 말에 나는 잠시 의아한 눈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정상이 아니었다.
“확실히 운기행공을 할 때마다 몰아지경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상이라 할 수 없겠군요.”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서른이 되기 전에 초극에 이를 가능성이 컸다.
단순히 천해공의 효능이라고 할 수 없다. 천해공의 효능이 이 정도라면 해남파가 전 무림을 씹어 먹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해남파는 천하에서 이름난 명문이기는 해도 정도의 기둥이라는 팔파의 하나로도 꼽히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먹은 단환의 효능이다. 내공 얼마 올려주고 끝인 일반적인 영약과 같은 선상에 올려놓을 수 없는….”
나와 사부가, 사형이 먹은 것이 대단한 약이라는 소리를 저렇게 주절주절 늘어놓는 이유를 대충 알겠다.
“사형, 그러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뭐 그런 소리입니까?”
내가 사형의 말을 자르고 묻자 사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지 못할 일입니까?”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까?”
“천하의 초극 고수들 사이를 오가야 하는 일이다.”
초극 고수들을 만나서 하하호호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일은 아닐 것이다.
“혼자서 어떻게 될 일이 아닌 듯한데, 혼자 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습니까?”
“따라갈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가지 너를 보내겠느냐?”
사부가 뚱하니 말했다.
“사형, 그거 어차피 비급과 단약을 남긴 고수가 연자여! 하면서 주저리주저리 부탁해 놓은 말들 아닙니까?”
“나는 맹세를 했다.”
“우리가 뭐 정파인도 아니고 흑도답게 가뿐하게 씹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마음에 좀 걸리는 일이긴 하지만 철담을 지닌 흑도의 호한이라면 그 정도쯤은….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귓가를 울리는 중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형의 입이다. 그리고 어느새 표정이 사라진 사형의 얼굴.
“파머 노형, 어린 애가 뭣 모르고 하는 소리에 크게 반응할 필요 있소?”
사부가 사형을 바라보며 하는 소리다.
“사부,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형을 사형으로 대하지 않고 있는 사부의 모습에 묻지 않을 수 없다.
“네 사형의 몸에 들어앉아 계신 노형이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귀신이란 말입니까?”
알아듣기 무섭게 자연스레 손이 허리춤의 칼로 간다.
“나는 귀신과 전혀 다르지만 무식하고 무도한 애송이가 알아듣게 설명할 자신이 없으니 비슷하다 해두지.”
“사형, 얼마나 몸이 허하셨기에 저런 귀신이 몸에….”
눈앞이 깜깜해진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
“상아, 철상아!”
사부다. 사부가 나를 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드느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가 언제 쓰러진 겁니까?”
“너희들 몸에 가해진 금제지. 원래 계획대로라면 너희 둘도 같이 움직여야 할 일이지만, 서약자인 이도연이 거부했다. 그에 대해 나도 서약자와 맹세를 했다. 그렇기에 너희 둘이 이 일에 끼어드는 것은 불가하다.”
사형의 몸에 들어앉은 귀신 놈의 말이다.
“사부와 나를 인질로 사형을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군.”
빠드득.
분노에 이가 갈린다.
“서약자는 은혜가 뭔지 아는 인간이더군.”
“그만!”
사형의 목소리. 사형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사부님은 초극 고수가 될 수 없었고, 우리들은 파룡당에 대항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그의 덕이다.”
“은혜는 은혜고 원한은 원한이지요.”
칼자루를 움켜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귀신 놈을 사형의 몸에서….
“이미 그와 나는 한몸과 다름없다.”
사형이 내 마음을 읽은 듯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사부님이 허락하신 것을 보면 너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사형의 말에 나는 사부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더 사형을 좋아하는 사부 아닌가. 그런 사부가 허락했다면….
“흥, 좋은 일이라면 이 사제도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오?”
“사형을 풍찬노숙하게 만들 셈이냐?”
내 투덜거림에 사형이 히죽 웃으며 하는 소리다.
“무슨 소리요?”
대답은 사부의 입에서 나왔다.
“네 녀석과 내가 강호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네 사형의 뒷바라지를 해야 된다는 소리지.”
“예?”
“저 녀석이 너에게 청도방 후계자 자리 그냥 넘긴 게 아니다. 금자 오십 냥, 은자로 천 냥을 네 사형에게 보내야 돼. 매달!”
“예에!?”
“공주 부도의 패권만 확실히 잡고 있으면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잖아. 뭐, 청도방이 공주 부도의 패권을 유지하려면 당장은 사부님이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지. 그리고 후계가 튼실해야 하고. 그러려면 보이지 않을 나보다는 네가 후계자로 나서는 것이 옳다는 거다.”
“솔직히 말해 보쇼! 사형, 놀러 다니려는 거지요?”
월에 은자 천 냥? 무슨 강호행에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
***
사형의 부름을 받고 ‘천안각’이라 이름 붙은 건물에 들어서다 얼굴을 찌푸렸다.
천안각 안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고양이는 한눈에 봐도 수십 마리다. 공주 부도는 고양이들이 꽤 많이 사는 지역이지만 장원 안에 수십 마리가 들어와 저렇게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아니 수십 마리 몰려와 먹이를 먹고 있는 것들은 고양이뿐만이 아니다. 수십 마리의 쥐새끼들이 고양이들 한쪽에 모여 먹이를 주워 먹고 있었다.
“고양이 새끼들이 배가 불러 미친 건가?”
쥐를 소 닭 보듯 하는 고양이들의 모습에 기가 찼다.
사형은 그런 미친 광경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왔냐?”
사형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지랄이오? 미친 고양이와 쥐새끼들을 모은 것이오?”
“그의 공능 중 하나다. 이제부터는 사제가 여기를 관리해야 해.”
“미친 고양이와 쥐새끼들을 모으는 게 그 귀신의 능력이오? 이것들 모아서 어디에 쓴다고 나에게 관리하라 그러오.”
“어디에 쓰냐고? 이렇게 쓰지. 캣 타워 가동!”
사형이 히죽 웃으며 요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먹이를 먹고 있던 고양이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순식간에 천안각 안의 고양이들이 사라졌다.
“뭐하자는 거요?”
“조금만 기다려 봐.”
사형이 웃으며 말했다. 반각쯤 흘렀을까?
“마*카*원 베타 연동!”
사형의 입에서 또 묘한 말이 흘렀다. 그리고 갑작스레 내 눈앞으로 펼쳐지는 광경들!
“뭐, 뭐요? 이것들은!”
반투명한 환영 같은 것들이다. 건물들이 보이고 사람들이 보인다. 흡사 귀신들의 소굴 속에 갇힌 듯한 모양새다.
“사제, 잘 보게. 어디서 본 얼굴들이고, 어디서 본 광경들 아닌가?”
사형의 말에 일단 심호흡부터 했다.
“후우, 후.”
그리고 반투명해 보이는 것들을 자세히 살폈다. 분명 익숙한 광경들이다. 그리고 얼굴들 역시 마찬가지.
“이 풍경은 포구 쪽 풍경 같소만? 어 저 녀석은 지금 근무 나가 있는….”
귀신이 아니다. 반 시진 전에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본 놈이다. 아니 그 하나만이 아니다. 반투명해 보이는 사람들 역시 안면이 있는, 죽었을 리 없는 자들이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들은 전부 여기서 밥 먹던 애들이 보고 있는 것들이지.”
“맙소사! 그럼!”
눈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 이곳의 이름이 뭔가. 천안각이다.
“말 그대로 천 개의 눈을 가질 수 있는 거야. 사제.”
사형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고양이들뿐만이 아니야. 저기 서생원들도 마찬가지. 복로방 측에서 불가침 조약을 원한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았겠나? 복로방에 이백 마리의 서생원이 들어가 있는 덕분이지. 서생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복로방의 모든 것들을 듣고 보고 있는 거야.”
“맙소사!”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수작을 꾸미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책이 한 권 보일 거야.”
놀라 정신이 없는데, 눈앞의 반투명한 풍경이 사라지고 반투명한 책 하나만 떠 있다.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적혀 있으니 보고 익히게.”
사형의 말을 듣고 책으로 손을 뻗었다. 책이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내 손짓을 따라 책장이 넘어갔다.
책에는 고양이들과 서생원들을 다루는 주문과 시선을 옮기는 법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사제.”
그렇게 책에 빠져들려는 나를 사형이 불렀다.
“혹시 이걸 배워 볼 생각은 없나?”
사형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멀쩡하던 사형의 양 손이 어느새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흡사 양손이 쇠로 뒤덮인 듯 하지 않은가.
슬그머니 만져 보니 감촉이 진짜 쇠다.
“혈수탈명을 박살낼 때 썼던 그거요?”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때 그거 맞네. 배워 볼 텐가?”
손을 이렇게 쇠로 덮을 수 있다면 수공이나 장법, 낭파조를 펼칠 때 그 위력이 배가 될 것은 자명한 일. 강해져서 나쁠 건 없다.
“사형이 가르쳐 준다면 성심 성의껏 배우겠소.”
“어렵지 않아. 이걸 먹으면 그만이야.”
사형이 표주박으로 만든 병을 건넨다.
“큭!”
한 모금 마시니 맛이 이상하다.
“사형?”
아니 왜 이상한 물을 먹이는 건데?
“그 안에 들어간 쇠가 중요해. 한 반년, 열심히 마시기만 하면 돼!”
뭐, 이런 텁텁한 쇳물을 최소 반년은 먹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