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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14화 (14/175)

14화

준비행(14)

“와우!”

영상이 끝나자 내 입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파룡당에 존재하는 서생원 대다수를 동원하여 찍은 영상이다.

“혈검, 저 인간. 내가 흘린 단서들 하나도 안 놓치고 다 주워 먹었어.”

공주 부도를 나와 야산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고 있지만 미소가 절로 나온다.

“집무실에 대기시킨 서생원 움직여서 내가 남긴 봉서 없애고. 해당 개체는 비밀 통로로 일당주 거처로 보낸 다음, 비밀 통로에서 폐기시켜.”

일의 마무리는 확실히 해야 했다. 서생원 하나 아끼다가 추종향이 여기저기 묻어 버리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다. 게다가 비밀 통로에 죽은 쥐 몇 마리 굴러다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 서생원 움직입니다.

서생원의 시야가 화면으로 떠오른다.

집무실의 벽을 타고 내려간다. 그리고 족자 뒤로 들어가 재빨리 문제의 봉서를 입에 문다.

그리고 그 조그만 입을 움직인다.

사각사각.

일각에 걸쳐 쉬지 않고 입을 놀려 봉서를 완전히 씹어 삼켰다.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가 환기구를 통해 비밀 통로로 들어선 다음, 그 작은 몸으로 열심히 달린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리고 근방의 환풍구를 타고 오르다가 그대로 화면이 꺼졌다.

뇌가 타 버렸을 것이다.

“건물 내에서는 서생원들이 건물 밖에서는 응1, 응2, 응3이 당주 하나씩 담당한다. 응1, 2, 3은 파룡당 전체의 감시를 겸하며 당주들 감시에 우선순위를 주도록. 그나저나 사부님 쪽 상황은?”

- 여섯 맹방의 정예들과 쾌속선을 타고 신풍 분타로 이동 중입니다.

“도착 예정 시간은?”

- 두 시진 이후 입니다.

“응5를 통해 사부님에게 연락 넣어. 신풍 분타는 놔두고 삼강수 나루터, 공주 부도 쪽 나루터로 바로 오시라고.”

-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

“하아. 아우, 한숨도 자지 않았군. 밤새 운공이라도 한 것인가?”

분풍이 혈검의 거처를 찾아왔다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혈검을 보고 하는 소리다.

“제자 놈의 원수를 갚으려면 힘이 있어야 할 것 아니오.”

혈검은 분풍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진짜로 밤새 운기행공을 해서 심신을 가다듬었다는 것이다.

“그 인간은 어디 있소?”

혈검이 물었다.

“대형의 별호가 뭔가. 마도 아닌가. 마도. 별호 그대로 연무장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다 들었네.”

스스로를 갈고 닦는 것을 멈추지 않는 칼잡이라 하여 붙은 별호가 ‘마도’다.

“허, 조카나 다름없는 아이가 죽었는데 변함없구려.”

혈검이 빈정거렸다.

“그 아이를 그리며 칼질을 하고 있겠지. 뭐든 다 연무장에서 푸는 사람 아닌가.”

“일당주라는 인간이 뒷수습은 안하고!”

“수습은 조카가 하고 있네.”

“흥, 내심 경쟁자로 생각했던 아이가 죽었으니 그놈은 신바람이 났겠구려.”

“아우, 아직 대형이 내통자라 확인된 것이 아니네.”

말조심 하라는 소리.

“확인을 하러 가지요.”

혈검이 몸을 일으켰다. 둘은 일당주의 집무실로 바로 갔다.

“두 분 당주님을 뵙습니다.”

일당주의 집무실을 담당하는 하인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일당주님은 지금 집무실이 아닌 연무장에….”

“확인할 것이 있어 왔다, 비켜라!”

혈검은 하인의 몸에 추종향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암살자를 도운 방수를 찾는 일이다. 의심을 받고 싶지 않거든 입 다물고 있어라.”

분풍이 하인의 입단속을 시켰다.

혈검은 집무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족자를 젖혔다.

“없소! 내통자가 가져간 것이 분명하오!”

“당 내의 중진들을 모두 대청 앞마당에 집합시켜! 그리고 연무장에 계신 대형을 대청으로 모셔 오도록!”

혈검이 봉서의 유무를 확인하기 무섭게 분풍이 하인에게 명을 내렸다.

“후우, 후!”

“진정하게. 이제 곧 내통자가 드러날 테니 말이야.”

혈검이 숨을 크게 쉬자 분풍이 그를 다독였다.

둘이 대청 앞에 당도하자 파룡당의 중진들이 모여 있었다.

“두 숙부님들 명을 받고 일단 다 불러들이기는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요?”

마도의 아들인 파룡당의 소당주가 나섰다.

“흐읍!”

혈검이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소당주의 곁에 섰다.

“네놈은 아니구나.”

혈검이 소당주를 한 번 쏘아보고는 파룡당의 중진들 사이를 거닐었다. 추종향의 냄새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없었다.

“하아!”

분풍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들 중에 없다면 그들의 대형일 가능성이 크니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내통자라니!”

연락을 받은 마도가 당도했다. 전신으로 문제의 그 냄새를 가득 뿜으며 말이다.

“왜 그랬소?”

혈검이 물었다.

“막내아우, 무슨 소린가?”

“내 분명 말하지 않았소! 나는 내 자리에 만족한다고! 당신 자리 넘볼 마음 없다고! 내 제자도 욕심 없다고! 행동으로 보였지 않소! 내가 불러들인 놈들 죄다 지방에 처박아서! 그런데, 왜!”

“막내 숙부님 뭔가 오해가….”

“네놈은 닥쳐라!”

소당주가 나섰지만 혈검의 살기어린 호통에 기가 죽어 물러섰다.

“둘째 아우, 막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아, 난 형님이 진짜 이럴 줄 몰랐소. 아우가 삿된 의심을 하는 줄 알았는데….”

분풍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냥 말을 하지 그랬소? 말 한 마디면 막내도 나도 그냥 물러났을 텐데….”

“이것들이! 지금 내가! 무슨 소리 하냐고 묻고 있다!”

마도가 노성을 터트렸다.

“끝까지 모른 척 하겠다? 뒈진 분타 애들은 물론이고, 내당주와 그 일행들, 내 제자까지! 최근 일어난 모든 일의 배후가 바로 당신 아니오!”

혈검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이것들이 미쳤구나! 내가 왜 내 수하들을 죽인단 말이냐!”

“형님 몸에서 냄새가 나고 있소. 이 모든 것을 저지른 놈에게 우리가 간신히 묻힌 추종향의 냄새가 나고 있단 말이오!”

“녀석을 쫓다 묻은 것이란 거짓말을 하려나? 놈의 경공은 형님과 내가 한 번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것이냐?”

“여기 택향제(擇香劑)가 있소.”

분풍이 자신의 품에서 작은 자기 병을 꺼내 마도에게 던졌다. 확인해 보라는 말이다.

마도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택향제에 어떤 수작질이 되어 있는지 모를 마당이니 직접 맡을 수는 없는 법.

“확인해라!”

파룡당의 중진 한 명을 불러 택향제를 건넸다. 택향제가 든 자기 병을 콧구멍에 꽂아 넣은 중진의 안색이 변했다.

“두 놈의 말대로 내게서 냄새가 나느냐?”

“당주, 그것이….”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있는 것이 냄새가 난다는 방증이다.

“제가 다시 확인을 하겠습니다.”

소당주가 다시 나섰다. 하지만 결과가 바뀔 리 없다.

“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당주가 당황한 얼굴로 마도를 바라보았다.

“가증 그만 떨고 흑도의 사내답게 해결합시다! 당사자들끼리!”

스르르릉!

혈검이 자신의 애검을 뽑아 들었다.

“늙으니 이 자리에 욕심이 생기더냐? 내 너를 친동생만큼 아꼈건만! 이런 어이없는 수작질이라니! 내 몸의 추종향도 네놈들이 뿌린 것이렷다?”

두 의동생의 수작질에 마도도 흑도인답게 생각을 하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배반은 죽음으로 속죄하는 것이 흑도의 법.”

마도가 자신의 칼을 뽑아 들며 외쳤다.

“배반자들을 죽여라!”

소당주가 마도의 옆에 서며 파룡당의 중진들에게 명을 내렸다.

쾅!

거센 진각이 반사적으로 소당주의 명을 따르려는 파룡당 중진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웃전의 일에 나서는 정신머리 없는 것들은 내 손에 죽는다!”

분풍의 위협에 파룡당의 중진들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분풍의 위협도 위협이지만, 일당주에게는 명분도 없고 세도 불리했다. 일당주는 혼자요 이당주와 삼당주는 둘이 아닌가. 초극 고수가 하나인 패와 둘인 패로 나뉘었으니 흑도인의 선택은 뻔했다.

게다가 둘인 쪽의 요구는 하나를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나서지 말라는 것이니 말이다.

“죽어라, 욕심에 눈이 먼 놈아!”

“누가 할 소리를, 이 배반자가!”

그 사이에 파룡당의 두 당주가 서로 강기를 휘두르며 격돌했다.

“네 애비를 원망해라!”

둘이 싸움을 시작하자 분풍이 소당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당주가 칼을 뽑아 들었지만 초극 고수인 분풍이 휘두르는 쌍겸은 절정에 불과한 소당주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십여 초 만에 목이 잘리고 피 구덩이에 몸을 뉘였다.

혈검의 협검은 그야말로 찌르기의 정수다.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찌른다. 검으로 사람을 찌르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듯 끊임없이 찌른다.

거기에 검 끝에는 시퍼런 강기까지 맺혀 있다.

이에 맞서는 마도의 칼은 칼질이 극에 이르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쳐내고 밀어내고 걷어내고 비껴내며 상대의 틈을 만든다. 그러고는 그 틈에 그대로 칼날을 들이민다. 재빠르게 긋고, 호쾌하게 휘두른다. 묵직하게 찍어 누르고 시원하게 올려친다.

카카캉, 콰캉!

힘과 힘, 강기와 강기의 맞부딪침이 주변 공기를 사정없이 잡고 뒤흔든다.

“살벌하네.”

파룡당의 정문 지붕 위에 몸을 숨기고 초극 고수 간의 격돌을 관람하고 있는 나의 감상이다.

서생원과 응1, 2, 3의 시야로 지켜보다가 그들이 대청 앞마당에 모이자 냉큼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직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문의 번초? 문짝 하나 사이에 두고 당주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는데 번이나 설 흑도인이 어디 있겠나.

파룡당 모두의 시선은 마도와 혈검이 몰아 쥐고 있는 상황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 승부가 끝날 때까지 계속 구경이나 했으면 싶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백관 탄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철탄을 시위에 건다.

“목표….”

나지막한 내 목소리에 농꾼이 재빨리 계산을 끝낸다. 그리고 눈앞에 그려지는 화면.

마도는 혈검을, 혈검은 마도를 죽이기 위해 전 신경이 집중된 상태다. 마도만 봐도 그 집중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자신의 아들이 죽었는데도 인식을 못하고 있지 않나. 주위 따위 둘러보지 않고 서로를 향해 몰입된 싸움판을 향해.

파앙!

철탄이 쏘아졌다.

캉!

과연 초극 고수! 기습적으로 날아드는 철탄을 반사적으로 막아낸다. 하지만 그 때문에 드러난 실 날 같은 빈틈을 상대가 놓치지 않고 찔렀다.

“비열한….”

그것이 마도 우진청이, 파룡당 일당주가 남긴 최후의 말이다.

“네놈은?”

마도와의 격전으로 피투성이가 된 혈검이 놀란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마도와 한패로 알고 있는 내가 자신이 아닌 마도를 저격했으니 당연했다.

“흥국 청도방주의 대제자 섬패 이도연이 파룡당 삼당주 혈검 곤구여에게 감사를 표하오.”

혈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뭐, 청도방?”

내 정체에 혈검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청도방은 촌구석인 흥국현의 패권을 간신히 장악한 조막만한 흑도방파이니 말이다.

“혈검께서 본인을 잡겠다고 신풍 분타에서 분풍 이당주를 부르지 않았다면, 본인은 파룡당에 그런 비밀 통로가 있는지도 몰랐을 거요. 그럼 당신 제자가 죽지도 않았고, 파룡당의 세 당주가 알아서 두 당주가 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오.”

“이때까지의 일이 전부 다 네놈의 수작이란 것이냐?”

“수작을 먼저 부린 것은 당신네들이지 않소? 우리 청도방을 상대로 먼저 개수작을 부렸잖소? 먹고, 먹히는 게 흑도. 약하고 멍청한 쪽이 먹히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우리도 한 번 부려봤소.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지 않소?”

내 대답에 혈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당연했다. 적들의 수작질에 속아 넘어가 개인적으로는 의형을, 공적으로는 세력의 수장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암수도 간파할 역량이 안 된다니. 도대체 파룡당은 뭘 믿고 우리에게 시비를 걸었소? 수장들이 초극 고수니 힘으로 어떻게든 될 거라 믿은 거요? 이런 뻔한 수작에 걸려서 서로 상잔하는 머리가 빈 수장들인데?”

히죽거리며 혈검을 도발한다. 아니 파룡당의 중진들에게 당당히 외치는 것이다.

흥국 청도방이 파룡당을 후려치는 이유는 너희들이 먼저 건드린 탓, 명분은 우리 청도방에게 있다.

거기에 삼당주가 일당주를 죽인 건 적의 계책에 속아 넘어간 바보짓! 거기에 동조해 소당주를 죽인 이당주도 머저리! 저딴 바보 머저리 밑에 있다가는 네놈들도 똑같이 바보 머저리가 되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머저리와 한편이 되느냐 다른 길을 택하느냐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왔음을!

“죽여 버린다!”

혈검이 노성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농꾼 믿는다!

마음 속 깊이 외치며 칼로 혈검의 공격을 맞받았다.

쩡!

공간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혈검이 내지른 찌르기가, 강기 서린 검격이 빛을 토하는 내 칼에 밀려 튕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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