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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13화 (13/175)

13화

준비행(13)

= 이걸 일당주의 침상에 찢어!

작디작은 주머니를 서생원 목에 걸어 준다.

서생원이 사라지자 집무실 왼쪽 벽에 걸린 족자를 들어 올려 준비해 온 봉서를 벽면에 붙였다.

그리고 족자를 내려 봉서 붙은 벽면을 가렸다.

봉서의 내용은 별것 없다. 무의미한 숫자의 나열. 중요한 것은 그저 여기에 봉서가 있다는 것이다.

= 집무실에 서생원 한 마리 배치해.

반응은 확실히 살펴야 했다.

= 일당주 위치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응4 대기 해제. 리퍼 지원.

명령을 끝으로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제는 몸을 써야 했다.

눈앞으로 파룡당 장원의 단면도가 펼쳐진다. 내 위치가 표시되고 파룡당 곳곳에 배치된 번초들의 위치와 동선이 표시된다.

= 일당주와 안전거리 유의하며 내원으로 안내 해.

내 요구에 리퍼가 화면을 움직인다. 리퍼의 정보를 토대로 발을 움직인다.

번초를 피하고 담을 넘고 바닥을 긴다. 지체 없는 움직임으로 조용히 내원을 가리는 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목표는 내원의 번초.

- 이인일조입니다. 동시 제압해야 합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왜냐고? 잠 안자고 달밤에 칼춤 추고 있는 초극 고수가 지척에 있거든.

농꾼의 안내를 받아 내원의 벽을 따라 돈다.

- 옵니다.

모퉁이 끝에서 하나의 얼굴이 나타나기 무섭게 손끝으로 미간의 혼혈을 찍어 잡아당기고 그 뒤를 따르는 녀석의 목, 경동맥을 움켜잡았다.

“…….”

뇌로 가는 혈류가 끊기며 순식간에 기절한다.

= 사람 없는 곳으로.

두 녀석을 들쳐 메고 조심스레 움직인다.

농꾼이 안내한 곳은 창고. 안에는 당연히 인적이 없다. 튼튼하게 만든 자물쇠를 믿는지 번초도 안 보였다.

창고의 환풍구는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크기도 아니다. 그러니 적당한 곳에 구멍을 내야 했다.

돌아다니는 번초의 눈을 피하려면 시야 아래로 형성해야 하고, 벽을 잘라낼 때는 칼날을 수직으로 박지 않고 비스듬히 각을 줘 그 흔적을 최대한 감춰야 했다.

도기를 사용한 은밀한 칼질로 벽을 잘라낸다. 사람 하나 기어들어갈 크기로 말이다.

두 녀석을 밀어 넣고 나도 들어간다. 그리고 잘라 놓은 벽을 끌어다가 틈을 막는다. 도기로 잘 잘라낸 탓에 뚜껑처럼 구멍이 막혔다.

혈을 자극해 두 녀석을 깨웠다. 물론 그전에 움직이지 못하게 마혈을 찍고, 떠들지 못하게 아혈을 찍는 것은 기본이다.

- 내가 묻고 너희는 답한다. 내가 만족할 만한 답을 하면 살 것이고, 아니면 뭐…. 지금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다.

내 앞에 둘을 앉혀 놓고 둘 모두에게 전음을 날렸다. 그렇게 슬그머니 겁을 주고 시작한다.

- 너부터 시작하지.

왼편에 앉힌 놈의 아혈을 푼다. 그리고 한 손으로 목을 움켜쥔다. 목을 압박해 큰소리를 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 혈검과 가장 가까운 지인이 누구지? 분풍의 지인도 좋다.

“…….”

답이 없다. 노는 손이 움직인다. 놈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살포시 쥐고.

빠삭!

새끼손가락 끝을 그대로 뭉개 버렸다.

“어….”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숨구멍이 압박된 상태라 소리가 크지도 않다.

- 손가락 열 개, 마디는 엄지 두 개, 다른 곳은 세 개. 손가락만 해도 기회는 스물여덟 번. 그것도 모자라면 발가락도 있지. 그렇게 손발이 병신이 되면 파룡당에서 너희들 일생을 책임져 줄 것 같아? 흑도의 의리를 철썩 같이 믿는다면 좋아, 한 번 확인을 해보자고.

스산한 미소를 입에 걸고 박살난 새끼손가락 옆, 약지 끝자락을 잡는다.

“어, 어어, 어!”

녀석이 기어들어가는, 억눌린 목소리로 필사적으로 말한다.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지만 성대의 울림으로 그가 하는 소리를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아니고 농꾼이 말이다.

- 혈검에게 제자가 있습니다.

농꾼의 친절한 번역.

- 그자의 거처는?

내 전음에 녀석이 급하게 대답했다.

- 잠시 쉬고 있어라.

녀석의 아혈을 다시 찍고는, 이번에는 오른쪽 녀석의 목을 잡는다.

- 교차 검증을 해야지? 틀린 놈은 말 안 해도 알지?

두 명이 토하는 내용은 같았다. 목표가 정해졌다.

우두둑! 두둑!

두 번초의 목을 꺾어 편하게 저승으로 보내준 다음 창고를 나왔다. 구멍을 잘 막아 둔 다음 몸을 움직인다.

= 저격 포인트 계산하고 위치 선정해.

- 저격 포인트로 안내합니다.

농꾼이 찍은 저격 포인트는 파룡당 한쪽의 전각, 그 최상층이다.

탄궁을 들고 전각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 열 감지 시야로 전환.

목표의 거처에 사람 형태가 보인다. 그 중 가부좌를 틀고 있는 형태가 하나 보였다.

목표인 혈검의 제자다. 운기 행공이라도 하고 있는지 신체의 온도가 고르게 높다.

- 창문을 통하면 단발 저격이 가능합니다.

= 요란하게 시선을 끌어야지. 분풍과 혈검이 기겁해서 뛰어오도록 말이야.

내 요구에 농꾼 녀석이 계산을 시작했다. 이 녀석 자신이 빡세게 일한다는 것을 어필하려는지 매번 뭔가를 계산할 때마다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래프를 요란하게 띄운단 말이야.

언제나처럼 요란한 그래프들의 행진이 끝나자 답이 나왔다.

전각 위에 수십 개의 인영들이 생성된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자세로 철궁을 들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머리 위에 새겨진 숫자들은 내가 겹쳐야 하는 순서를 이른다.

- 0.5초 간격으로 쏘시면 됩니다.

농꾼이 시간 지정까지 해준다.

나는 철탄을 꺼내서 인영의 발아래에 하나씩 놓아둔다. 그냥 꺼내 쏘기에는 너무 많다 보니 미리 빼놓는 것이다. 내 동선에 맞게 철탄들을 전각 지붕 위에 깔아 놓고 최초의 철탄을 든다.

“후우, 후.”

심호흡을 두어 번 한 뒤, 지붕 위에 늘어져 있는 인영을 향해 몸을 움직인다.

정확한 위치에서 정확한 자세를 잡은 후 시위를 당기고 철탄을 쏜다. 그리고 움직이는 발걸음에 철탄이 차이고 그 철탄은 내 손에 잡힌다. 그리고 당겨지는 시위와 거기에 걸리는 철탄, 손이 시위를 놓으면 철탄은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나는 발을 옮기고 철탄을 차고 잡아서 다시 시위를 당긴다.

그렇게 하나의 인영이 춤추듯 지붕 위를 누비니.

피피피피피피핑!

수십 개의 철탄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리고 그 철탄들은 폭우가 되어 하나의 건물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콰쾅!

지붕이 작살나고 벽이 박살나고 창이 폭발했다. 기둥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내려앉는다.

쏜 시기는 달랐지만 50개의 철탄이 건물을 두드리는 순간은 거의 동일. 건물 하나가 와해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건물이 무너졌다!”

“내당 쪽이다!”

밤의 정적이 순식간에 깨어졌다.

- 목표 사망 확인. 해당 건물의 생존자 없음.

“흑도의 노괴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합리적 의심을 선택할 것인가, 수십 년 의리를 택할 것인가 참 기대된다.

- 들켰습니다. 마도 우진청! 이쪽으로 이동 중! 8, 7….

농꾼의 경고와 이어지는 카운트다운. 마도가, 파룡당 일당주가 건물 위로 치솟아 지붕 위를 달리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전각 위다!”

“침입자다!”

“활을 가져와!”

발밑에 소란이 일었지만 그딴 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얼른 피풍의를 펼치며 전각 지붕을 박찼다.

“서라!”

마도가 뻔한 소리를 내질렀지만 내가 그걸 들어 줄 이유가 없다.

타닥, 탁!

지붕을 박차는 발길질에 더욱더 힘을 준다. 나를 잡자고 나름 대비한 분풍과 혈검에게도 벗어났는데, 아무 대비 없는 마도에게 잡힐 이유가 없다.

순식간에 파룡당을 벗어난다. 그리고 그대로 서쪽 성벽을 넘어 달렸다.

- 마도,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마도를 떨쳐내고 십 리를 더 달려 야산에 자리를 잡았다.

“분풍, 혈검 위치 확인.”

- 소란을 확인하고 파룡당으로 복귀했습니다.

“얼마나 잘 걸렸는지 영상으로 확인해야겠군. 잘 찍었겠지?”

- 지금도 찍고 있습니다. 리퍼.

***

“후우!”

자신의 거처에서 혈검이 눈을 떴다.

무너진 잔해 속에서 찾아낸 제자의 시신은 처참했다. 머리와 가슴, 팔과 달리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뼈가 부서지고 피부가 뭉개졌다. 몸 곳곳에 박혀 있는 십여 개의 철탄들이 온전한 시체도 남기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제자가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는데 잠이 올 리 없다. 아니 제자의 죽음에 상심한 척 거처로 돌아온 것이다.

제자를 덮친 횡액(橫厄)의 원흉을 확인해야지 않겠는가.

혈검은 자신의 침상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그르르릉!

작은 소리가 들렸다. 침상 아래에 비밀 통로가 있는 것이다.

혈검이 비밀 통로를 따라 걷자니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가벼운 인기척이 났다.

“곤 아우.”

인기척의 주인은 분풍 천도만 파룡당 이당주다. 당당한 파룡당의 당주 둘이 비밀 통로에서 마주한 것이다.

“일단 출구 쪽으로 갑시다. 관제묘 쪽으로.”

혈검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분풍을 보며 말했다.

“그래.”

분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의 몸이 바람같이 움직였다.

관제묘와 직선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둘은 발을 멈췄다.

“추종향의 냄새가 나지요?”

“그래.”

“놈이 비밀 통로로 들어선 것은 확실한 겁니다?”

“그래.”

혈검의 말에 분풍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어디로 움직였는지 확인합시다.”

혈검이 추종향의 향기를 따라 움직였다.

“놈은 길을 정확히 알고 있군요. 전혀 헤맨 흔적이 없어요.”

혈검이 빠드득 이를 갈며 추종향의 흔적을 쫓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크큭!”

혈검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두둑, 둑!

혈검의 손아귀에서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진정하게 아우. 아직 확실한 게 아니야.”

분풍이 혈검을 진정시킨다.

“예,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지요.”

혈검이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비밀 통로의 문을 열었다.

혈검과 분풍이 차례대로 문을 나섰다. 일당주의 집무실이다.

여기저기에서 추종향의 냄새가 났다. 그 중 유독 한 곳에서 냄새가 심하다.

왼쪽 벽, 거기에 걸린 족자에서 추종향의 냄새가 물씬 풍겨 오고 있다.

혈검이 족자를 살폈다. 슬쩍 족자를 드니 벽에 붙어 있는 봉서가 눈에 들어왔다.

“형님. 이거 보시지요.”

혈검이 분풍을 불렀다. 분노에 눈이 뒤집어진 탓에 자신이 비밀스레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 하다. 목소리는 충분히 낮았지만 보통 이럴 때는 전음을 쓰는 게 맞다.

“크흠.”

추종향 냄새가 물씬 나는 봉서의 존재에 분풍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도 그 인간을 두둔하실 겁니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내려가서 이야기하세.”

혈검의 말에 분풍이 말했다. 분풍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인지 전음이 아닌 육성으로 말한다.

그 말에 혈검이 발을 움직이고, 분풍과 함께 아직 닫히지 않은 비밀 통로의 문으로 들어섰다.

그르르릉!

집무실과 통하는 문이 닫혔다.

“형님, 확실히 합시다.”

혈검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놈과 내통을 한 것이 대형이라는 확실한 증거로는….”

혈검의 말에 분풍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 인간과 형님, 나. 셋 말고 이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가 있소? 나는 죽은 내 제자에게도 말하지 않았소. 아, 그 인간 아들놈은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구려.”

“좀 진정하게.”

“진정할 일이오? 통로는 어쩌다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집무실까지 한 번도 헤매지 않고 찾아온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오? 미로처럼 얽혀 있는 곳이오. 형님도, 나도 처음 길을 익힐 때 여러 번 헤매지 않았소? 이건 놈이 여길 익숙해질 만큼 자주 드나들었다는 증거요.”

혈검이 나지막하고 강렬하게 말했다.

“놈이 남긴 봉서가 있네. 추종향이 듬뿍 묻어 있지. 내일이 되면 확실한 범인이 드러날 걸세.”

“그렇구려. 그걸 가져간 자가 누구든 추종향이 확실한 범인을 알려 주겠구려.”

“그래, 그러니 범인이 드러날 때까지 자중하세.”

“형님, 분명 그 인간에게서 추종향의 냄새 따위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 오늘 대형의 몸에서 어떤 흔적도 없었네. 당 내의 중진들을 살펴봤을 때도 그렇고. 그러니 이만 돌아가세.”

“내 형님을 믿소.”

둘은 그렇게 비밀 통로에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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