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준비행(12)
“분명 흐르는 물에 들어가 씻어내는 정도로는 추종향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했지?”
도도히 흐르고 있는 삼강수로 발을 옮기며 물었다.
- 그렇습니다. 단순히 흐르는 물로 추종향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농꾼의 대답이다.
“이딴 걸 뒤집어썼는데, 여기서 안 씻는 것도 이상하지.”
미소를 지으며 삼강수로 뛰어든다.
풍덩!
물에 들어가기 무섭게 몸을 흔든다. 그리고 전신을 손으로 몇 번이나 훑어 내렸다.
그렇게 몸에 묻어난 것들을 대충 털어낸다 싶은 다음 몸을 뉘었다.
머리를 건너편으로 두고 물 위에 몸을 띄운 꼴이 되자 천천히 사지를 움직였다.
천천히 움직인다지만 그 사지에 깃든 힘은 나노 머신으로 강화된 절정 무인의 것이다.
사지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일이 장씩 쭉쭉 뻗어 나간다. 그렇게 서른 번 정도 움직이자 건너편에 당도하고 말았다.
물을 먹어 무거운 피풍의를 벗어 들었다.
팡, 팡!
재빨리 털고 물기를 짜낸다. 피풍의가 제 기능을 못하면 목숨 내놓아야 하는 게 내 현실이다.
피풍의 다음에는 옷들이다. 대충 쥐어짜서 물기를 빼내고 입었다.
휘이익!
전신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공력을 일으켜 옷을 말리는 것이다.
“성분 분석.”
소매를 들어 슬쩍 혀로 핥으며 명을 내렸다.
- 분자 상태 파악 결과, 전부 기화하는데 10일 이상 소모될 걸로 예상됩니다.
추종향은 충분히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옷을 말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 혈검과 분풍이 갈라졌습니다.
농꾼이 화면에 원을 그리며 그들의 움직임을 보여줬다.
분풍은 나를 살피며 강변을 따라 움직였고, 혈검은 이쪽을 향해 건너고 있었다. 소금쟁이 마냥 몸을 바싹 낮추고 손발로 수면을 미는 것이 아주 조용했다.
응1로 스토킹을 하지 않았으면 내가 알아차리기 힘든 조용한 움직임이다.
이윽고 혈검이 삼강수를 건너 내 뒤를 조용히 따르자 분풍이 삼강수를 넘는다. 혈검과 같은 움직임이다.
빠른 기동으로 수면을 박차는 나와는 다른, 공력의 튼실함으로 만들어내는 느리지만 은밀한 움직임이다.
과연 초극 고수. 절정 나부랭이와의 차이를 보여준다.
“거리는 충분한 거지?”
슬그머니 불안감이 일어 물었다.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둘 다 500m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농꾼이 화면 한쪽에 빛나고 있는 거리 표시를 한층 더 밝게 만들며 말했다.
그렇게 조용히 따라붙는 둘을 신경 쓰며 걷다 보니 어느새 공주 부도의 성벽이 보였다.
“해 뜨네?”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성벽을 타고 넘기는 글렀으니 성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성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성문 앞에는 자신의 검문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기다릴 생각이 없는 나는 늘어선 줄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 성문으로 다가섰다.
“거기 뭐야?”
꾀죄죄한 낭인의 행색이기에 성문지기의 반응이 거칠다.
“제가 좀 바빠서….”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전음을 날린다.
- 파룡당의 일이다.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
품에서 혈수탈명의 패찰도 슬쩍 내비쳤다.
“흠, 흠. 바쁜 일이 있구만….”
평소 파룡당에게 받아먹은 것이 많은지 성문지기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성 안으로 들어온 다음 파룡당의 장원 인근에 자리 잡은 풍월객잔에 방을 잡았다.
“서생원 활동 시작했냐?”
- 예, 리퍼. 파룡당 일당주, 마도(摩刀) 우진청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개체가 하나. 변이 중인 개체가 하나. 변이를 마친 3개 개체는 장원 내의 비밀 통로 탐색을 시작했습니다.
“마구잡이로 움직이지 말고 당주의 집무실과 거처부터 시작해.”
비밀 통로의 시작점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곳들이 그쪽이다.
“불필요한 곳에 위치한 환기구들을 조사하면 비밀 통로를 찾기 쉬울 거야.”
비밀 통로는 환기가 생명이다. 환기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든 곳은 탁한 공기로 인해 만약을 대비한 구명줄이 아니라 사람 잡는 함정이 된다.
농꾼 녀석에게 그렇게 일러두고는 준비한 지필묵을 사용해 큼지막한 그림 하나를 그렸다.
뭘 그렸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손가는 대로 그렸으니깐. 하지만 뭔지 있어 보이는 문양이 되었다.
나는 그것을 내 객방 창가에 내걸었다. 객잔 앞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말이다.
“사부님 쪽 진행은?”
-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파룡당 분타 중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이제 신풍 분타 밖에 없습니다.
회창 분타에 몰려 있던 세력이 박살났다면 사부님이 없어도 남은 지역의 흑도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큰 일이 아닐 터.
“응5 녀석을 통해 사부님에게…. 아니 됐다.”
뭐든 확실한 게 좋다. 공주 남부의 흑도 세력은 안면도 없고 그 성향도 모른다. 이럴 때는 확실히 힘으로 눌러 버리는 것이 편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극 고수인 사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비밀 통로 찾으면 보고하고. 혈검과 분풍 감시를 확실하게 해.”
명을 내린 다음 객방 밖으로 나왔다.
“솜씨 좋은 대장간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지나가는 점소이를 잡고 물었다. 떨어진 철탄을 보충해야 했다.
“무사님이시니 무기를 다루는 대장간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내 질문에 점소이가 물었다.
“그래.”
“포구 밖 남쪽에 있는 황가철방이 솜씨가 좋습니다. 파룡당 고수님들이 애용하시는 곳이거든요.”
“고맙다.”
점소이에게 동전을 몇 문 쥐어 주고는 황가철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팔 냥 철탄 백 개?”
“철탄이 만들기 힘든 것이오?”
“철탄 무게만 해도 여덟 관(30kg)이오. 그걸 짊어지고 다니겠다는 거요?”
철방 주인이 별 신기한 놈 다보겠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언제까지 되오?”
무식하게 한 주머니에 쓸어 담아 짊어지고 다니면 무거울지 몰라도 적당히 몸에 분산시키면 뛰어다니는데 큰 문제없다.
“손님이 원하는 기일이 있을 것 아니오?”
“기일에 따라 금액이 달라진다는 말로 들리오만?”
“당연히 그런 것 아니겠소?”
“내일까지 되오?”
“정강(精剛)을 쓴다면 은자 삼십 냥이오. 그냥 수철을….”
“알았소, 풍월객잔까지 배달해 주시오.”
철방 주인의 말을 바로 끊으며 열 냥짜리 은자 세 개를 건넸다.
철방을 나서는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흥건하다.
시야 한쪽에 띄워 놓은 화면이 붉게 번쩍이고 있다.
직선거리 30m, 분풍과 혈검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를 두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씨발, 당주란 새끼들이 할 일도 없냐! 니들 텃밭이잖아! 절정에 이른 놈들만 해도 스물이…. 내가 좀 때려 죽였다 해도 어쨌든 그쯤은 남았고 정예로 분류된 일류가 이 백은 될 텐데, 왜 직접 움직이고 지랄이냐고!
***
객잔에 들어앉은 지 사흘째. 살 떨리는 기간이다. 첫날 이후 무서워서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밖으로 나갔을 때 분풍과 혈검이 직접 따라붙었는데, 미행 거리가 안전거리 안쪽이다. 씨발, 그 안전거리도 초극 고수 하나를 상대로 가정한 거리 아닌가.
객방 안이라도 편안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씨발 것들이 코앞의 파룡당을 놔두고 객잔에서 생활하고 있다.
직선거리 60m쯤 떨어진 곳에 방을 잡은 것이다. 그런 지근거리에 나를 노리는 초극 고수가 두 눈을 번뜩이고 있으니 살이 떨리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 둘이 나를 덮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내 객방 창문에 걸린 종이 한 장이 다다.
흑도 물 좀 먹었다면 알 수 있다.딱 봐도 누군가 접선하기 위해 내거는 신호 아닌가.
내 뒤를 캘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물론 내가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였다면 당장에 잡아들여서 고문 했겠지만 나는 한 치의 틈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든지 튈 준비를 하고 있으니깐.
- 리퍼, 비밀 통로를 찾았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보고가 들어왔다. 살 떨리는 시간의 끝이 다가온 것이다.
= 어디에서 어디까지야?
초극 고수 둘이 나를 감시하고 있다. 그러니 육성 대화가 아닌 문자질이 당연하다.
- 파룡당 세 당주의 집무실과 거처, 대청, 내원 정원 등 입구는 여덟. 통로는 미로처럼 얽혀 있지만 출구는 세 곳입니다. 부도 동문 밖 관제묘와 남문에 붙은 문지기 숙소, 성벽 안 작은 사합원의 대청이 출구 역할을 합니다.
동문 밖 관제묘가 접근성이 가장 좋다.
= 서생원을 동원해서 전각 위에 불을 붙일 수 있나?
- 아무 전각을 원하시는 건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확한 위치를 지정 바랍니다.
내 말에 농꾼이 물었다.
= 저기 보이는 저거.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파룡당 인근이라 파룡당 내에 우뚝 솟은 전각이 잘 보였다.
- 화재를 원하시는….
= 등불로 보일 정도면 된다.
- 가능합니다.
= 그럼 오늘 자정에. 반각 정도만 유지하면 된다.
- 알겠습니다.
자정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드디어 자정! 약속된 불빛이 반짝였다.
바로 무장을 갖추고 움직인다. 복면 하나 뒤집어쓰고 밤거리를 달린다.
- 혈검과 분풍 움직입니다.
내 몸에 남아 있는 추종향을 믿는지 100m 이상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붙었다.
= 저들도 전각의 불빛을 확인했나?
내 물음에 몇 분 전의 영상이 뜬다. 그리고 클로즈업 되는 둘의 얼굴. 둘 다 불빛이 반짝이는 전각 쪽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얼굴을 구기고 있다.
동쪽 성벽을 부드럽게 타고 넘는다. 그리고 문제의 관제묘로 간다.
- 좌측 관평의 목상(木像), 목상의 발판을 잡고 왼쪽으로 돌리면 통로가 열립니다.
농꾼이 시키는 대로 하자 관평의 목상이 뒤로 밀리며 비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내 시야 위로 증강현실이 덮어진다.
좌측 벽면에 붙은 횃불 대에 붉은 원이 그려지고, 아래로 당기라는 화살표가 그려졌다. 군말 없이 당겼다.
그르르릉!
통로의 문이 닫혔다. 공기가 탁하지 않은 것이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비밀 통로였다.
“응4, 파룡당 상공 대기. 제일당주, 마도의 현 위치는?”
- 내원의 연무장에 있습니다.
농꾼의 대답. 파룡당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응2의 시선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제일당주 집무실로!”
- 안내 시작합니다.
농꾼의 말과 동시에 어두컴컴한 비밀 통로 위로 화살표가 그려진다.
“출구에 서생원 하나 대기시켜.”
화살표를 따라 달리며 명한다.
- 준비하겠습니다.
농꾼의 말대로 통로 안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비밀 통로가 드러났을 때의 대비인지 몰라도 농꾼의 안내를 받는 나에게는 별 소용없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일각 정도 움직이니 그 끝이 다가왔다.
화면의 안내를 따라 벽면에 붙은 횃불 대를 움직이자 머리 위가 열렸다.
단숨에 뛰어오른다. 어둠에 휩싸인 일당주의 집무실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찍찍!
준비된 서생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