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준비행(05)
해남 낭파조는 위력적인 무공이었지만 독심쌍도와 풍랑인도는 혈수탈명처럼 간단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솔직히 혈수탈명은 나를 얕보다 당한 게 크다. 거친 흑도의 삶을 맨손 기예로 이겨 온 자신에게 칼잡이로 소문난 내가 빈손으로 덤볐으니 얕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독심쌍도와 풍랑인도는 나를 초극 고수로 착각하고 있는 상황. 어설픈 방심 따윈 없다.
실전에 능한 흑도의 칼잡이 두 명이 합심하여 몸을 지키니 그 방어가 굳건하다. 맨손 기예로 상대의 거리 안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낭파조만으로는 두 명이 휘두르는 세 자루의 칼날로 만들어낸 그들의 굳건한 방어를 넘을 수 없었다.
휘릭!
아차하는 순간 목을 노리고 파고드는 칼질. 뒤로 물러나며 금속 코팅 된 손날로 공격을 받아냈다.
캉!
걷어 내거나 흘려 내지 못한 탓에 제대로 된 격돌이 일어났다.
“속았어! 강기가 아니야!”
풍랑인도가 외쳤다. 격돌의 충격을 통해 그 위력을 짐작, 강기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쇠 장갑이라도 낀 거냐? 어린놈이 잔머리를 썼구나!”
독심쌍도가 반색을 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어린놈이 잔꾀로 어른을 속이다니!”
“혼쭐을 내어 주마!”
서로 딱 달라붙어 몸을 지키던 자들이 이제 거리를 벌려 나를 포위하려 한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을 상대로 낭파조의 수련을 좀 더 하고 싶지만 때가 아니다.
“하!”
기합과 함께 바닥을 박차며 풍랑인도를 향해 덮쳐든다.
“걸렸다!”
“뒈져라!”
기다렸다는 듯 풍랑인도가 대감도를 앞세워 칼바람을 일으키고 독심쌍도의 두 칼날이 도기를 번뜩인다.
풍랑인도가 앞에서 버티고 독심쌍도가 뒤를 치는 형국.
번쩍!
오른 팔뚝에서 뽑아낸 단검이 왼손을 따라 풍랑인도의 머리를 노리는 빛살이 된다.
비틀어지는 상체를 따라 휘둘러지는 오른손에는 어느새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칼자루를 쥐고 있다.
쩌쩌쩡!
벽운섬전도의 칼질이 벽력이 되어 독심쌍도를 맞이하니, 그가 휘두르는 쌍칼의 궤적이 지워지며 피가 날린다.
“젠장!”
풍랑인도가 인상을 쓰며 몸을 뒤로 물렸다.
철교아의 한 수로 던진 단검을 피하느라 협공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큭, 이 새끼가 칼잡이란 사실을 잊다니….”
피투성이가 된 독심쌍도가 늦은 후회를 하며 허물어졌다.
“어쩔 텐가? 계속? 아니면 그만?”
홀로 남은 풍랑인도에게 칼을 겨누며 물었다.
“네놈.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느냐?”
풍랑인도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
“수작을 부린 건, 우리가 아니라 파룡당 아니던가?”
그래서 나도 질문으로 답했다.
“흑도는 힘이 지배하는 곳이다! 모르지 않을 텐데?”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잡으려고 입을 터는 풍랑인도다. 파룡당의 강력함을 강조해 내게서 일순간의 주저함이라도 만들려는 뻔한 속셈.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러고 있나? 머리가 있으면 생각해 보라고.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누가 강자인지?”
제대로 된 흑도의 칼잡이라면 혓바닥도 날카로워야 하는 법이다. 설전의 패배로 마음의 평정을 잃을 수도 있으니.
“개 같은!”
풍랑인도가 대답 대신 욕설을 내뱉으며 덤벼들었다.
홀로 된 풍랑인도는 이십여 초를 버티다 목이 잘렸다.
“귀원공과 천해공의 차이가 좀 심한데?”
독심쌍도를 격살할 때는 천해공을, 풍랑인도를 상대할 때는 귀원공을 사용했다.
기회를 잡았다 싶은 독심쌍도는 아마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천해공을 기반으로 펼친 벽운섬전도는 그런 독심쌍도의 칼질을 단숨에 지워 버렸다.
하지만 귀원공을 기반으로 펼친 벽운섬전도는 동료를 잃어 마음 꺾인 상태의 풍랑인도를 압도하는데 이십여 초가 소모되었다.
홀로 수련할 때는 잘 몰랐는데 실전에 들어가니 그 차이가 엄청 큰 것이다.
- 속력 면에서 일 할 정도의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일 할이라면 생사가 나뉘기에 충분하잖아.”
투덜거리면서 대청을 나왔다.
밖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다섯 정도 남은 파룡당 정예들이 똘똘 뭉쳐 버텨내고 있었다.
“그만!”
호통으로 그들을 공격하던 방도들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직 버티고 있는 파룡당 녀석들을 향해 선물을 건넸다.
데구르르.
갓 자른 풍랑인도의 머리가 피를 뿌리며 바닥을 굴렀다.
“계속할까?”
저치들을 인솔해 온 3명 중 하나의 목이 잘리고, 나머지 둘은 보이지도 않는 상황. 파룡당 녀석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뻔했다.
파룡당 놈들이 검을 떨구고 항복을 하자 사제 녀석에게 다가갔다.
“다 때려죽일 것처럼 굴더니만, 상대가 파룡당이라 뒷감당이 걱정이냐?”
사제 녀석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웃었다.
정예의 수는 동일. 주위를 포위할 다수의 무사들도 있다. 거기다 절정인 사제까지.
파룡당 놈들이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사제가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은 탓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누굴 겁쟁이로 보오? 녀석들이 무슨 이유로 수작을 부렸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오. 덮어놓고 다 죽여 버리면 누구에게 물을 거요?”
사제가 불퉁하니 답했다.
“혈수탈명 잡아 놨다.”
“파룡당 내당주나 되는 작자가 쉽게 입을 열겠소? 잡은 놈 중 하나 골라 눈앞에서 목부터 땁시다. 그럼 혈수탈명이 입을 닫아도 남은 녀석들이 아는 것이라도 불지 않겠소.”
이 녀석도 천생 흑도다.
***
혈수탈명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제가 말한 대로 했다.
툭!
하나의 모가지가 구르자 살아남은 넷이 서로의 눈치를 본다.
툭!
두 번째 모가지가 굴렀다.
“독한 놈들이네.”
사제가 다시 칼을 쳐들자 세 번째 모가지의 주인이 급히 입을 열었다.
“금광은, 그 개발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놈! 그 입 다….”
퍽!
수하를 위협하는 혈수탈명을 걷어차 입을 막았다.
“계속해.”
“청도방에게 넘기려 한 자석산 금광 개발지 말고 용공산에서 발견한 곳이 하나 더 있습니다.”
“계속.”
“…….”
입을 다무는 게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는 듯하다.
“일단 그 녀석은 뭐라도 불었으니 살려 주자.”
내 말에 사제는 그 옆의 놈을 세 번째 모가지로 선택했다.
“파양호(鄱陽湖), 파양호 수채의 개입을 막아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아는 거 없고?”
“예.”
그 대답에 나는 남은 하나를 바라보았다. 아는 거 있으면 토해내라는 내 눈빛에 녀석이 입을 열었다.
“자석산은 돈이 안 된다 들었습니다. 돈 되는 곳은 용공산이라고….”
더 이상 나오는 이야기가 없었다.
놈들을 가두고 사제와 같이 집무실로 왔다.
“일단 지도 좀 보자.”
관에서 사용하는 지도로 흥국현과 그 인근 지역의 지리가 나름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자석산은 여기고, 용공산은 여기. 둘 다 흥국현 관할이 맞기는 한데, 현도에서 거리를 따지면 만안현 현도가 더 가깝네요.”
“만안현이면 길안부 속현이지?”
“길안부면 복로방(福路幇)의 세력권이지요.”
“복로방은 파양호 수채의 비호를 받는 곳이고.”
파양호 수채는 장강의 삼 할을 움직이는 거대 세력. 공주부 안에서나 노는 파룡당은 몇이 덤벼도 감당하기 힘든 곳이다.
“자석산이나 용공산이나 복로방에서 자기 세력권이라고 우겨 볼만한 위치지?”
“자석산을 우리 청도방에서 먼저 개발한다면 복로방에서 찔러 보겠군요. 우리 뒤에 파룡당이 있다 해도 복로방은 파양호 수채가 있으니 말이지요.”
“그래, 여기서 일이 커져 피라도 좀 본다면 파룡당은 양보할 수밖에 없겠지.”
파룡당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굴려 본다.
“복로방과의 마찰에 대한 책임을 물어 청도방의 핵심 인사들을 처벌하고 방도들을 해산시키고, 자석산 금광을 넘기면 외부에서 봤을 때는 파룡당이 정말 큰 양보를 한 걸로 보이겠네요?”
사제 역시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눈치 챘다.
“보통 이권 분할 정도로 끝날 일인데, 문제를 일으킨 솔하 세력을 해산시키고 금광을 통째로 넘겼으니, 파양호 수채의 권위를 빌린 복로방이 호가호위한 상황으로 소문나겠지.”
“그 상황에서 파룡당이 용공산 금광을 개발하면 복로방은 다시 나서기 민망하겠군요.”
“자체 무력이 파룡당에 미치지 못하는 복로방이니깐. 파양호 수채의 위세를 빌려 자석산 금광을 강탈한 꼴인데, 그 짓을 다시 한 번 한다? 흑도 무림에서 복로방의 평판이 어떻게 될까? 또 그런 복로방을 비호하는 파양호 수채에 대한 여론은? 어림도 없지. 설마 그런 짓을 시도하면 파양호 수채가 관계를 정리해 버릴 걸. 그 금광의 이익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만, 파양호 수채가 장강 인근의 흑도 세력과 연계하여 벌어들이는 이익에 비할 바 아닐 테니 말이야.”
“파룡당은 우리 청도방 하나 희생시켜서 돈 되는 금광 하나를 온전히 손에 넣는 격이군요. 아니 복로방이 욕심을 부리면, 즉시 길안부로 밀고 들어갈 명분을 얻을 수 있고요.”
“파양호 수채의 개입도 막으면서 말이야.”
“이 개호로 잡것들이 우릴 호구로 본 건가!”
사제의 입에서 노성이 튀어나왔다.
“혈수탈명에게 자백서를 받아내고 용공산 금광을 이용해서 복로방을 끌어들입시다.”
“음모론으로 키워서 파양호 수채로 파룡당 놈들을 쓸어버리자고?”
“그것도 좋지요!”
파양호 수채가 나서지 않는다 해도 복로방의 비호를 받아 파양호 수채의 우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뭐, 반년 전이었다면 그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반년 전이 아니잖아.”
“사형, 다른 방도가 있다는 거요?”
“당연히.”
사제와 그렇게 대화를 하면서 농꾼과 문자질을 한다.
= 변동 사항은?
- 없습니다.
= 진짜 호구로 봤구만. 만약을 대비한 눈 하나 붙이지 않았다니.
- 리퍼 입장에서는 좋은 것 아닙니까?
= 뭐 상황 상 좋기는 하지만, 기분이 더럽잖아.
- 파룡당과 전쟁을 하실 생각입니까?
= 지금 청도방 정도는 철상이 녀석 혼자서도 유지가 가능해. 그러니 사부님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줘야지.
- 무슨 말씀입니까?
= 이대로라면 사부님이 날 따라올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이도연이 아닌 박경표를 굳이 사부님이 알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 할 일을 안겨드려야지.
숨기고 있는 게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사부님을 뵙고 모셔와야지. 사제는 방의 경계를 철저히 하며 언제든지 출전할 수 있게 준비하게.”
금정산을 향해 바로 내달렸다. 백 리도 넘는 길이지만 작정하고 경공을 펼치니 반시진이면 충분했다.
“사부님, 파룡당 놈들이 마수를 드러냈습니다.”
도착하기 무섭게 파룡당 놈들의 수작을 고한다.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됐군.”
사정을 다 들은 사부가 인상을 썼다.
“네가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터. 생각이 있겠지?”
“제 계획은….”
내 계획을 사부에게 털어놓았다.
“파룡당을 잡아먹자 그거구나.”
“예.”
“셋이나 되는데 가능하겠느냐?”
파룡당의 당주들, 초극 고수인 그들은 하나도 아닌 셋이나 된다.
“솔직히 제 계획이 실패한다 해도 우리는 손해 볼 게 없지 않습니까?”
여차하면 사제 말대로 복로방을 끌어들이면 될 일이다.
***
석성은 금정산 너머에 자리 잡은 영도 서쪽에 있는 고장이다.
금정산에서 가까운 영도의 파룡당 분타는 사부가 맡기로 했고, 젊은 내가 좀 더 먼 석성의 분타를 맡은 것이다.
- 영도 쪽은 시작했습니다.
농꾼이 사부의 움직임을 알려 왔다. 계획의 관건은 소식을 차단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전서구 사냥이 제일 중요하다.
사부에게는 응1이 같은 처지의 친구 셋과 함께 따라붙었다.
그리고 나는 응5를 하늘 위에 띄워 놓은 상태. 나노 머신을 통해 시각 연동을 하면 응5는 훌륭한 정찰 드론이 되는 것이다.
시간은 묘시(卯時) 초. 원래대로라면 번초들의 집중력이 가장 떨어지는 시간이다.
하지만 석성은 산지로 둘러싸인 곳이라 떠오르는 해가 보이기는커녕 아직도 캄캄했다.
시커먼 야행복에 얼굴을 가리는 복면. 암행의 전형적인 복장으로 어둠 속을 잽싸게 움직인다. 번초들은 솔직히 신경 쓸 필요 없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응5를 통해 그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살피고 있는 중이다.
- 좌측으로 삼 장 이동 후, 벽을 타고 넘으십시오.
아니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응5의 시야를 농꾼이 분석해 나에게 침입 경로를 상세히 알려 준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이상 번초들과 마주칠 일이 없는 것이다.
목표는 전서구를 모아놓는 곳. 전서구가 드나들기 편하도록 전각 꼭대기 층에 자리 잡는 것이 보통이고, 전서구가 모여 있는 곳이니 새똥 냄새가 안 날 수 없다. 그러니 장소는 쉽게 특정할 수 있다.
목표한 전각에 도착하기 무섭게 전각이 만들어내는 제일 짙은 그림자에 몸을 숨긴다.
전각 높이는 오 층. 건강한 절정 고수가 사지를 놀리면 벽 타고 기어 올라가는데 몇 초면 충분했다.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뒤 조용히 안으로 스며든다.
전각 안에는 작은 새장들이 즐비했다. 새장의 삼분지 일은 비어 있는 상태.
전각 아래에서 이쪽으로 올라오는 통로를 막은 다음 준비한 것들을 꺼내서 화섭자로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치솟는 것을 확인하고는 전각 아래로 몸을 날렸다.
반각쯤 지나자 전각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 정도면 안의 전서구들은 다 죽었을 터.
그럼, 나도 시작해 볼까?
조용히 발을 움직여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석성 분타의 대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거기 누구냐?”
대문 앞의 번초가 나를 발견하고 외쳤다.
대답 대신 칼을 뽑았다. 천해공의 구결대로 진기를 돌린다.
“적이다!”
“침입자다!”
야행복에 복면까지 두른 놈이 칼날을 휘감는 시퍼런 도기까지 뿜어내자 대문의 번초들이 기겁을 하며 경고성을 내질렀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
쾅!
굉음과 함께 석성 분타의 대문이 터져 나갔다.
“대문부터 박살낸다. 이게 바로 흑도 깽판의 정석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