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준비행(02)
나는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환생한 줄 알았다.
당연했다. 21세기 중반의 대한민국 청년 박경표로 20여 년을 살아가던 기억이 있는데, 어느 날 눈 떠 보니 중원 무림의 아기 이도연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내게 일어난 일은 환생 같은 신비로운 일이 아니었다.
- 깨셨으면 일어나실 것을 권장합니다.
농꾼 녀석의 목소리가 언제나와 같이 아침을 연다.
코드명 파머.
25년 전. 21세기 박경표의 기억 데이터를 품고 중원에서 갓 태어난 아기 이도연에게 파고든 장본인, 21세기 과학의 집합체인 나노 머신이다.
본래 중원에 뿌려진 이백여 나노 머신들은 따로 손을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자기들이 알아서 숙주를 관리하고 그 데이터를 21세기로 송신한다.
그 데이터의 자동 송신이 끊겼기에 관리 개체인 파머가 깨어나고 수동 관리 시스템인 리퍼가 가동된 것이다.
나노 머신을 품은 무인들, 숙주들의 데이터가 다시 21세기로 잘 전송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데이터를 거둬들이는 일이니 수확이고, 그걸 수행하는 개체니 수확자, ‘리퍼’라니 공돌이들 작명 센스는 진짜….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는 것보다 반각 정도 뒹굴 거리다 일어나는 게 더 상쾌한 하루가 된다는 말 몰라?”
달구지를 개조해 만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 왜곡이 심합니다. 리퍼. 그 속설은 뒹굴 거리라는 말이 아니라 스트레칭으로 몸을 깨우라는….
“잡소리 그만하고, 비급은?”
옷을 입으며 물었다. 이때껏 입고 지낸 수련용 무복이 아닌 일상적인 복장이다.
- 책상 위에 있습니다.
동굴 한편에 돌을 깎아 만든 앉은뱅이책상 위에 3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각기 ‘낭파조(浪波操)’, ‘철교아(鐵蛟牙)’, ‘천해공(闡海功)’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지리적 특성상 중원 정파의 기둥이라는 팔대 문파에는 들지 못했지만 팔대 문파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해남파의 무공들로 내가 십수 년 동안 익힌 벽운섬전도와 상성이 좋았다
낭파조는 금나수의 일종이고, 철교아는 단검술, 천해공은 내공심법이다.
책들을 한 번 훑었다. 책에는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으며, 내용을 적은 먹물은 흐릿하다.
“잘 만들었네. 누가 봐도 수십 년은 된 물건이야.”
사실은 농꾼 녀석이 하루 만에 뚝딱 만든 것들이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먹을 갈 때 그 위에 침 몇 번 뱉은 것과 빈 서책을 사와 매 장마다 먹물 잔뜩 담은 일(一) 자를 그어 준 것이 다였다.
어쨌든 이것들은 내 무공이 급상승한 핑계거리가 되어 줄 것들.
“그럼, 가볼까?”
3권의 비급을 챙겨서 가볍게 행낭을 꾸린 다음 동굴을 나섰다.
반년 전 산을 오를 때는 달구지와 함께였지만, 하산하는 지금은 칼을 찬 평소의 모습에 등에 맨 행낭 하나와 허리춤의 단검 하나 추가된 것이 다였다.
***
“사형, 오셨소?”
청도방으로 돌아오자 나를 반기는 것은 사제 놈이다.
이름은 장철상. 23세. ‘옥안쾌도(玉顔快刀)’라고 불릴 정도로 잘생긴 놈이다.
나도 평범 이상은 되는 얼굴이지만 녀석과 비교할 수는 없다.
솔직히 2년 전만 해도 ‘사람 얼굴이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이 한번 기루에 가본 뒤로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돈 내고 맘 상하고 왔던 그 굴욕적인 날….
“그래, 왔다. 너는 여전히 반반하구나.”
그러니 반응이 좀 삐딱하게 나온다. 내 삐딱한 반응에 마음이 상했는지 사제 놈이 내 위아래를 훑어보며 요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산중 수행 하셨다는 분이 몸이 불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원래대로라면 “사형 열심히 수련하셨나 봅니다. 몸이 엄청 건장해졌습니다.”라고 할 녀석이다.
반년 동안 농꾼 녀석이 만들어낸 스테로이드를 줄창 빨았는데 몸이 커지지 않을 수 없다. 아니 투입된 스테로이드 양에 비하면 근육이 그렇게 커지지는 않았다. 호르몬 조작을 통한 체질개선도 병행하여 근밀도를 올린 탓이다.
“대충 봐도 열 근은 는듯한데….”
단순 몸무게로 따지면 열 근이 아니라 백 근 이상 늘었다.
“산중 수행 하신 게 아니라 어디서 놀다 오신 게 아니오?”
시작은 내가 했다지만 사제 놈의 불경한 주둥이를 더 이상 놔둘 수 없다.
퍽!
“크윽!”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제 놈이 뒤로 물러나며 왼손을 부여잡았다.
“아니 손에 무슨 쇳덩이를 다셨소?”
장철상이 인상을 쓰며 앓는 소리를 한다. 뭐 비슷한 짓거리를 하긴 했다.
“산중 수행의 결과를 더 보여주랴?”
내가 연무장 쪽으로 턱짓을 하며 ‘한번 어우러져 볼까?’ 하는 속내를 내비치니 녀석이 질색을 했다.
“사형, 반년 만에 보는 사제 때려잡으실 궁리부터 하십니까?”
“반년 만에 보는 사형을 앞에 두고 주둥이 나불거리는 사제라면 당연히 때려잡아야지.”
“사부님 뵙고 귀환 보고부터 올리셔야지요.”
정론을 내밀며 도망간다.
“앞장서라.”
내가 행낭을 벗어 녀석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 말에 행낭을 받아든 사제 놈이 먼저 발을 옮겼다.
“그간 별 일 없었지?”
장철상의 뒤를 따라 붙으며 물었다.
“지난달에 파룡당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뭐라고 하디?”
“뻔하지 않습니까? 자기들 그늘로 들어와라 그거지요.”
“조건은 어땠는데?”
“매년 이천 냥을 내놓으라더군요.”
“분타나 연락소를 세운다는 소리는 안하고?”
파룡당 인원이 흥국현에 상주하게 된다면 청도방은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흥국현 사람들 눈에 청도방은 흥국현 제일의 흑도방파가 아니라, 파룡당 눈치를 보는 흑도방파로 인식되는 것이다.
자연스레 흥국현의 패자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는 셈.
“그치들 입장에서는 별로 먹을 게 없는 곳인지라 잡아먹겠다는 수작은 없던데요?”
“사부님께서는?”
“늙어서 방의 일에서 손 뗐다며 사형에게 떠미셨어요. 사형이 돌아오셨으니 이내 다시 찾아오겠지요.”
“아직 환갑도 안 되신 분이 벌써 물러날 생각만 하시네.”
그렇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사부의 집무실 앞이다.
“사부님, 제자 철상입니다. 돌아온 사형과 함께입니다.”
“들어오너라.”
사부의 대답에 우리 둘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자, 수행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허, 놀다 왔느냐?”
사부도 사제 놈과 같은 소리를 한다.
“사부님, 보시지요.”
사제 녀석이 자신의 왼손을 사부에게 내밀었다.
“철퇴라도 손으로 받은 게냐?”
슬쩍 붓기 시작하는 녀석의 손을 보고 사부가 물었다.
“사형과 가볍게 한 수 교환했는데 이지경입니다.”
그래도 사형제라고 편들어 주는 사제 놈이다. 정철상이 내놓는, 내가 놀지 않았다는 증거에 사부가 나를 보았다.
“기연이 있었습니다.”
나는 사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사제에게 행낭을 내놓으라고 손을 펼쳤다.
“기연?”
“금정산에 자리를 잡고 수행을 하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사제에게 넘겨받은 행낭을 풀어 비급들을 꺼냈다.
“이건!”
비급을 받은 사부의 눈이 커졌다.
“해남파의 무공입니다. 천운인지 사부님의 벽운섬전도와 큰 충돌이 없었습니다.”
품속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비급과 함께 발견한 것입니다.”
사부가 목함을 받아 열었다. 안에 있는 것은 칙칙한 빛깔의 반치 직경의 단환 두 개. 목함의 구조로 보면 세 개가 있어야 맞다.
“사부님, 제자가 욕심에 눈이 멀어 허락을 얻지도 않고 하나를 사용하였습니다.”
사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목함을 만든 것은 나지만 저 약은 돌아오다가 만난 저자거리 약장수에게 산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다. 누가 뭐라 하겠느냐.”
사부가 미소를 지었다.
“늙은 나보다도 젊은 너에게 필요할 것이다.”
사부가 다시 내게 목함을 내밀었다.
“먹어 보니 공력을 올려 주는 것보다는 행공에 도움을 주는 약이었습니다.”
약은 거리 약장수가 만든 것이지만, 저 안에는 농꾼 녀석의 마이너 카피 본이 들어차 있다. 기능은 농꾼 녀석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공 수련에 도움이 될 정도는 된다.
“재차 복용해도 효과가 없을 듯하다?”
“그리고 마침 남은 게 두 개고 말입니다.”
“철상아, 뭐하느냐?”
내 말에 사부가 사제를 바라보았다.
“예?”
“네 사형이 이렇게 챙겨 주는데 너는 그저 멀뚱히 보고만 있구나.”
사부의 말에 사제 놈이 반색을 하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듯하다.
“사형, 감사합니다.”
사제 놈이 넙죽 허리를 숙인다. 그래, 두 개 중 하나는 네놈 몫이다.
“그럼, 성과를 보도록 할까?”
사부가 몸을 일으켰다.
“예?”
“반년 동안 늙은 사부를 부려먹은 성과랍시고 철상이 놈의 멍든 손바닥 하나로 넘어가려 했던 것이냐?”
“저기 비급도….”
“비급이야 나중에 읽어도 되는 일. 그리고 네 실력을 보는데 비급이 무슨 소용이냐?”
어쩔 수 없이 사부를 따라 연무장으로 가야 했다.
방도들이 쓰는 연무장과 따로 떨어진 곳으로, 주로 사부가 우리를 가르칠 때 쓰던 곳이다.
“그럼, 시작하겠다.”
연무장에 서기 무섭게 사부가 칼을 뽑았다.
“간다!”
“예전의 제자가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벽운섬전도의 살벌 경쾌한 도격이 서로를 향해 거침없이 쏟아졌다.
카카카캉!
칼과 칼이 부딪치고, 기와 기가 격돌했다.
예전에는 막기 급급했던 사부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 없이 받아넘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예전이라면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였다. 사부의 도격에서 틈이라니.
아니 저걸 틈이라고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더 빨라지고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하압!”
사부는 생사대적이 아니다. 그러니 기합으로 내가 뭔가를 시도한다는 경고를 내보내고 움직인다.
카캉, 캉!
들어오는 공격을 걷어내며 바로 내려친다. 수비로 전환하는 사부의 도격을 끊으며 밀고 들어가는 칼질.
“호!”
사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칼을 두드리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아니 사부의 칼이 빨라진다.
우르르릉!
도기가 중첩되어 칼날의 구름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탓!”
한 발 물러서는 동시에 그 탄력 그대로 전진하며 연환격!
콰콰쾅!
섬전이 벽력(霹靂)이 되어 칼날의 구름을 찢어발겼다.
“허!”
자신의 절초가 깨어지자 사부는 칼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후우!”
나 역시 뒤로 물러서며 호흡을 골랐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사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탄성을 터트렸다.
“이것이 천해공의 위력이냐?”
도법에 비해 익힌 내공이 대단하지 않은 사부다. 그래서 십수 년 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절정의 경지에서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절반 정도는 그렇고, 절반 정도는 이 반년 간 외공을 적극적으로 단련한 효과라 봅니다.”
“네 공력을 천해공으로 수습하는데 얼마나 걸렸느냐?”
그런 상황에 팔파에 준하는 해남파의 내공심법을 얻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원래 내공을 갈아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성이 맞지 않으면 폐인이 되기 십상. 하지만 눈앞에 멀쩡한 성공 사례가 있다. 그것도 같은 내공을 익히고 같은 도법을 익힌 제자다. 주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흐음.”
사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한다. 어쩔 수 없다. 나는 해남파의 천해공이 아니라 귀원공(歸元功)을 익혔으니깐.
- 마*카*원의 도움을 받을 경우 한 달 정도 예상됩니다.
마*카*원은 ‘마이너 카피 원’, 저 단환을 말하는 것이다.
- 순수 운기행공에만 집중, 쉼 없이 연공했을 경우 168시간 이내에 가능합니다.
“단환을 섭취하고 칠주야.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운기에만 매달려 그 정도 걸렸습니다.”
농꾼 녀석이 불러주는 말에 양념을 살짝 쳐서 답했다.
“중앙 전각을 비워라.”
바로 연공에 들어가겠다는 말.
“전각 최상층에 연공실을 꾸민다. 첫째가 아래층에서 호법을 서고, 둘째는 나와 같이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