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정상으로 (5)
파앗!
이마를 감싸고 있던 에일은 손을 더듬어 인벤토리를 열었다.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회복 포션을 마시는 것이었다.
이미 거의 바닥인 체력 탓에 빈사 상태에 빠지기 직전에서 정신력으로 겨우 억누르는 중이었다.
체력이 차오르며 어지러웠던 시야가 맑아지자 제대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방금.’
크루거의 공격에 휩쓸린 뒤 박살 난 바닥 탓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다른 랭커들은 물론 그의 동료들까지 피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파티 창으로 봤을 때 전원이 로그아웃 처리되어 있었다.
모두가 전멸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지금 처한 상황에 에일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한 방 먹어 버린 그들이었고, 이번 싸움에서 밀리면 답이 없었다.
아폴리온이 왕가를 장악한 이상 이대로 공주를 제거하게 뒀다간 다음 게임을 기약해야 할 수준이었다.
스륵.
그때 왼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혹시나 자신 말고도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는 건가 싶어 에일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시르?”
쓰러져 있는 이는 철십자의 길드장인 시르였다.
크루거의 스킬을 정면에서 휘말렸기에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버틴 모양이었다.
“넌 살아남았나 보군…….”
눈을 게슴츠레 뜬 그녀가 에일을 올려다봤다.
“잠깐만 기다려.”
시르의 모습은 당장에라도 의식을 잃을 듯 위태로워 보였다.
에일은 그녀의 목숨 끊기기 전에 서둘러 포션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아랫층에서 사일러스와 싸우다 입은 상처 탓에 치유 불가 저주에 걸려 있던 상태였다.
치유 마법이나 포션을 들이붓는다 한들 회복이 불가능했다.
“이런…….”
“어차피 난 여기까지야. 그보다 크루거는 아직 밑으로 내려가고 있을 거다. 이것부터 받아.”
대수롭지 않게 말한 시르는 힘겹게 팔을 뻗었다.
에일의 손 위로 건네준 하나의 아이템.
검붉은 빛이 일렁이는 정체 모를 마석이었다.
“이건 뭐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건데.”
“스킬 쿨타임을 초기화시켜 주는 아이템이야. 북부 국경 밖에서 어렵게 구한 물건이지. 원래는 언젠가 놈을 상대할 때 사용하려 아껴 둔 거였지만… 이젠 가장 가능성 높은 사람이 갖는 게 맞는 거겠지.”
타악!
아이템을 건네준 그녀의 팔이 풀썩 떨어졌다.
그러자 에일은 잠시 잔해에 걸터 앉아 받아든 마석을 내려다보았다.
쿨타임의 초기화.
익시온과 싸우느라 소비해 버린 전설 등급 스킬을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확신이 생기진 않았다.
‘내가 정말 이길 수 있을까.’
조금 전의 광경을 떠올린 에일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크루거가 보인 것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강함이었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전설 등급의 스킬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가지고 있을 스킬의 정체가 대강 짐작이 갔다.
정체를 드러내기 전에도 크루거가 평소 착용하던 장비들은 철저히 방어력에 모든 비중을 투자한 장비였다.
안 그래도 방어를 기초로 둔 기사 클래스가 그런 장비를 두른다면 내구는 높더라도 스스로는 데미지가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파티 플레이가 아니면 약한 모습 보이게 되는 퓨어 탱커들의 약점이 더욱 부각된다는 것.
이 경우 랭킹 산정에도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크루거는 항상 랭킹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심지어 솔로 플레이로 거대 던전을 돌파하거나 보스를 공략하며 압도적인 차이로 순위를 수성했기 때문에 많은 유저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퓨어 탱커들이 데미지를 보충하는 방법이라면 뻔하지.’
체력 비례 계수가 달린 공격 스킬 혹은 반사 데미지 등 방어에만 투자하는 전문 탱커들도 딜을 챙길 수단이 있었다.
물론 그 효용만큼이나 남들에 비해 스킬 세팅을 갖추는 데에 있어 훨씬 어려움을 겪긴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탱커 유저들 사이에서 가장 좋은 취급을 받는 건 방어력이나 저항력 등을 공격력에 가산시키는 패시브 스킬들이었다.
그래서 크루거도 아마 그런 스킬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건 많은 이들이 예상하던 일이었다.
한데 그게 ‘전설급’ 패시브 스킬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스킬 북을 얼마나 퍼부어 댔길래 그런 걸 얻은 건진 몰라도… 끔찍하네.’
공격 수단까지 갖춘 스킬 세팅을 완성해 놓은 워로드의 퓨어 탱커들은 이미 악명이 높았다.
한데 랭킹 1위에 서 있는 크루거가 그런 스킬까지 얻어 버렸다.
이미 최고 레벨과 최고 스펙에서 오는 우월함은 전설급 스킬으로 배가 되었다는 것.
그야말로 최악의 적이었다.
‘더 문제인 건 스펙과 스킬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만.’
설령 그 전설급 스킬에 대한 파훼법을 찾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끝이 아니었다.
에일은 방금의 전투만으로도 크루거가 스탯 이상으로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파앗!
그의 앞에 빛의 여신 ‘루’가 나타났고, 생각을 들킨 에일은 왠지 뜨끔했다.
그러자 루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때 경고하지 않았느냐. 동조율이 200을 넘는다면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고. 그새 잊은 건 아니겠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조율이 너무 높게 올라가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루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동조율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으로 자제하며 조절하게 되었다.
하지만 크루거를 이기기 위해선 동조율을 최대치 이상으로 끌어올리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다.
“방법이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굳이 모험할 필요 없이 이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래서는 부족합니다.”
다소 위험할 수 있는 방식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나 최소한 우월한 워로드의 안전장치 덕에 목숨이나 영구적인 손상 같은 걸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처음 접속했을 때와는 달리 지금 그에겐 옆을 지키고 있는 신격이 존재했다.
정체 모를 공간에 갇혔을 때도 루가 그를 구해 줬듯이, 최상위 관리자인 신격이 지켜보고 있는 이상 문제가 생길 부담은 훨씬 덜했다.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최악의 경우 몇 달간은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르니까.”
루가 미간을 슬쩍 좁히며 말했다.
방대한 워로드의 데이터베이스에서도 동조율이 200퍼센트를 넘은 경우는 전무했다.
심지어 이전 모든 게임을 포함한 뒤 크루거와 알리사조차도 180대의 동조율을 달성한 게 최대치였다.
오직 검은 공간에 한 번 갇혔던 에일이 유일했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그녀조차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해 봐야죠. 여기서 물러나면 대륙이 통째로 넘어가는 거나 다름없어요. 뭣보다 악마와 손을 잡은 놈들이 이렇게까지 나온 이상 일곱 신들까지 소멸시키려 들지도 모릅니다.”
이미 왕가도 뒤엎은 아폴리온은 선을 지킬 녀석들이 아니었다.
지독한 독점에 서서히 무너진 이스트혼처럼 이쪽 세계도 똑같은 꼴이 될 터였고 나아가 적대 관계였던 루의 존재까지도 위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신을 설득하기 위해 던졌던 말은 의외의 답으로 돌아왔다.
“아니, 고작 게임일 뿐이야. 과몰입하지마.”
팔짱을 낀 루가 단호히 말했다.
“워로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대륙이라고 해봐야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해. 사람처럼 행동하는 ‘인간형’ NPC도 마찬가지지.”
“그런……?”에일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워로드는 고작 게임일 뿐이라는 것.
다른 이도 아니고 워로드의 신격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게 몰랐다.
잔해에 걸터앉아 있던 에일의 옆자리에 털썩 앉은 루는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내가 바깥세상을 알고 있어서 더 특별한 존재라 생각해? 아니, 오히려 현실의 존재를 알기에 자기 주제도 잘 알고 있어. 신이라고 해 봤자 게임 속 보조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말이야.”
루는 자조 섞인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미 바뀌어 있는 그녀의 말투는 평소의 위엄 있는 여신이 아닌 평범한 여성의 것이었다.
그 묘한 괴리감에 에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작 서버의 전원 버튼 하나에 사라질 부질없는 것들… 물론 현실에서도 워로드엔 돈과 인기가 있으니 다들 필사적이지. 하지만 넌 이미 충분히 성공했어. 이름을 떨치고 돈도 벌었지. 네 실력이라면 다음 게임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테고.”
“그래서 이만 포기하고 다른 게임으로 가라는 겁니까? 여기 있던 건 다 내팽개치고서?”
“에일, 네가 갇혔던 그 검은 공간이 뭐였는지 알아?”
“검은 공간……?”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에일이 중얼거렸다.
“모든 신격이 잠들어 있던 지난 1년. 나는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 계속 그 공간에 갇혀 있었어. 각 신격들에게 내려진 대기 명령이 있었고 그 짧은 명령어 하나에 거부할 수도 없이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지냈지. 반쯤 잠긴 정신 속에서 빈 배경만 바라봤어.”
“그곳이…….”
벙찐 에일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로그인 과정에서 지나치는 공간에서 사고가 난 줄 알았는데 설마 신격이 지내던 공간이었다니.
그로서는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사실이었다.
“내가 널 구해 줬던 게 아니야. 내가 갇혀 있던 공간에 네가 찾아와 준 거였고 그 덕에 훨씬 이른 시점부터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었지.”
아무리 완벽한 AI라도 인간은 아니었다.
시스템에 종속된 존재, 프로그래머들이 그들을 하나의 인격으로서 대우할 순 없었다.
별도의 공간에서 주어진 1년의 대기 기간은 오히려 양반인 편이었다.
한데 만약 알타리엘이 말한 그 자유가 이와 관련되어 있었고 만약 그녀가 그 검은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물 파편들을 모으던 것이었다면.
“아무튼… 이걸로 충분하다는 거야.”
루가 나지막이 말을 맺었다.
과거 그녀가 그를 구해 준 행동에 대해 빚이라고 느끼거나 책임감 느낄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에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히려 그에겐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겨났다.
에일은 이미 마음 정한 뒤였고, 그 표정을 읽은 루는 그를 붙잡았다.
“멍청한 짓이야.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아니.”
최고의 게임에서 최고의 랭커로서 설 것이라는 다짐.
그것이 줄곧 이루고 싶었던 자신의 목표였고 그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해 볼 때까진 해 봐야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그녀를 돌아본 에일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뒤바뀐 그의 말투에 루는 흠칫 놀랐다.
한낱 인간이자 필멸자에 불과한 신도가 정당한 일곱 신격에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게임상의 이야기일 뿐.
그녀는 뻗어진 에일의 손을 마주 잡고 일어났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이 여신도 시스템도 아닌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