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정상으로 (4)
그들은 꼭대기 층에 놓인 마지막 홀에서 아폴리온의 길드장인 크루거와 마주했다.
크루거가 서 있는 저 뒤편에 준비 중인 절멸 마법진이 놓여 있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고선 주변을 지키고 있는 다른 길드원은 전혀 없었다.
“젠장, 아예 처음부터 공주 쪽을 노린 거였어……!”
예상 밖의 상황에 시르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곳에 그를 제외하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진의 사수를 포기하고 처음부터 내성에 있는 공주의 목숨을 노리고 내려간 것이었다.
만약 절멸 마법진이 무력화되어 갇혀 있던 시민과 유저들이 무사히 빠져나가게 된다면 골치 아프긴 했다.
그러나 생존자들이 뭐라 떠들고 다니건, 전체적인 그림 안에선 약간의 소란 선에서 그칠 뿐이었다.
이미 왕가를 쥐고 있는 아폴리온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공주만 잡으면 판은 끝나게 되어 있었다.
발악해 봤자 꼭두각시인 가짜 여왕을 쥐고 있는 한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 가능했다.
“설마 이쪽을 아예 버림 패로 쓸 줄이야……. 아런, 어서 내려가서 공주를 지켜라.”
“예.”
시르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인 아런은 길드원들을 데리고 곧장 이곳을 빠져나갔다.
자리에 남은 건 마흔 명 정도의 랭커뿐이었다.
“과연 그게 좋은 선택일까? 다 같이 덤볐다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보였을 텐데.”
“웃기는 소리……. 아무리 네가 잘났다 해도 이 정도 숫자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여유로운 크루거의 말투에 시르는 날선 태도로 받아쳤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홀로 서 있는 크루거를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공주를 확보해 내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과한 인원을 남긴 것도 혹시나 그를 놓치지 않고 확실히 잡아내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이만한 숫자 차이에서 고작 유저 하나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알리사는 오히려 바짝 경계했다.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얕보면 안 돼요.”
“네? 그게 무슨…….”
그녀의 말에 에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인원을 상대로 이기겠다는 쪽이 상대를 더 얕보는 것일 터였다.
심지어 여기 남은 자들은 리아를 제외하고선 전원이 랭킹에 들어 있는 워로드의 실력자들이었다.
멋모르는 유저들을 상대로 한다면 모를까, 랭커를 상대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알리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가 알고 있는 크루거는 굳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버림패로 내던질 자가 아니었다.
그가 혼자 남아 있는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시르……. 확실히 우리의 계획에 변수가 될 만한 건 너희 정도뿐이라고 생각했었지. 실제론 전혀 다른 쪽에서 변수가 터져 나오긴 했지만.”
슬쩍 돌아간 크루거의 시선은 에일과 알리사에게 꽂혔다.
설마 갑자기 길드를 나갔던 전 부길드장이 적으로 다시 돌아올 줄 몰랐던바.
무엇보다 가장 큰 변수는 바로 세 번째 동조율 사용자인 에일의 등장이었다.
다른 게임을 경험조차 해보지 않은 루키였으니, 아무리 치밀하게 따진다 한들 계산에 들어가 있을 수가 없는 존재였다.
실제로 막바지 단계에서 계획을 진행하는 데 있어 이 둘이 가장 많은 문제를 야기한 건 명백했다.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어. 모처럼 새 게임에 찾아왔는데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었을 테니까.”
“너희가 망친 게임은 이스트혼만으로 충분해!”
후웅!발을 크게 박찬 시르가 단숨에 파고들었다.
가속 스킬까지 더해진 그녀의 속도는 미리 대비하지 않고 있었다면 반응조차 어려울 만큼 빨랐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기다란 검엔 하얀 빛이 감돌았다.
콰아아아!
강력한 스킬이 뻗어져 나가며 섬광과 함께 땅을 크게 갈랐다.
그 일격 앞에 크루거는 피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휩쓸리고 말았다.
허나 뻗어져 나간 빛이 잠잠해진 뒤.
그들은 멀쩡히 서 있는 크루거의 모습과 함께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카앙!
갑옷을 뚫지 못한 시르의 검이 튕겨 나왔다.
놀랍게도 미세한 흠집과 함께 약간의 충격을 제외하면 크루거는 전혀 밀려나지 않았다.
정통으로 들어간 시르의 스킬이 단 1퍼센트조차 체력을 깎아내지 못한 것이다.
“이게 무슨……?”
시르의 얼굴에 충격이 감돌았다.
그건 다른 에일을 비롯한 다른 랭커들도 마찬가지였다.
방어 스킬은커녕 자세조차 잡혀 있지 않은 상황에서 6대 길드장인 시르의 일격을 상쇄시켰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내구와 방어.
콰득!
크루거가 검을 휘두르자 섬뜩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길드장을 보호하기 위해 급히 끼어든 길드원이 방패를 치켜들었지만, 방패가 단번에 찌그러져 뭉개졌다.
그리곤 곧바로 휘둘러진 검에 그는 단숨에 목숨을 잃었다.
중갑을 두른 백기사 클래스가 단 한 번의 일격에 당한 것이다.
질기고 강력한 생명력으로 악명 높은 직업이었는데, 그런 랭커를 단번에 처리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방금 보인 방어에 못지않게 공격력까지도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증거였다.
마치 유저가 아닌 극악의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젠장, 무슨 속임수라도 쓴 건가?’
홀 안을 둘러보는 에일의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이 많은 랭커들이 동시에 달려드는 데도 오히려 주도권을 쥐지 못하다니, 이 안에 무슨 장치라도 해둔 게 아니라면 납득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속임수가 아니야. 순수한 녀석의 힘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곧장 들려온 루의 대답에 에일은 귀를 의심했다.
이 안의 랭커들 사이에서는 레벨 차이는 사실 그렇게 심한 것이 아니었다.
공식 랭킹에 드러나 있으니 레벨 자체를 속였을 가능성도 없었고, 아무리 좋은 장비라고 해도 해당 레벨 제한에 걸릴 만한 수준이라면 이만한 위력을 내진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스킬뿐.
“설마……?”
“눈치챘나 보지?”
어느 순간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크루거가 말했다.
그러자 식겁한 에일은 급히 검을 들어 올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방어가 무색하게 검을 부딪히는 순간 그는 그대로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콰앙!
“크윽…….”
따끈한 피가 이마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면에서 부딪힌 것만으로도 아찔한 감각이 들었다.
크루거가 지닌 전설 스킬의 정체는 ‘공방일체’.
해당 플레이어가 지닌 ‘공격력’ 혹은 ‘방어력’ 중 더 높은 수치의 스탯으로 양쪽 모두가 전환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효과였다.
크루거는 이 스킬을 얻고 난 이후에 방어와 내구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했고, 그 방어력은 곧 공격력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킬을 통해 얻는 모든 방어 관련 스탯까지 마찬가지였다.
물리 저항은 방어 관통이 되고, 방어 숙련 스킬은 공격 숙련의 효과까지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일반 스킬에서 급이 나뉘듯, 같은 전설급 스킬에도 급이 나뉘는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두 개의 전설 등급 스킬을 지닌 건 너뿐만이 아니야.”
츠츠츠츳!
검에 모여들고 있는 어마어마한 기운.
크루거는 또 하나의 전설급 공격 스킬을 발동했다.
* * *
후두두둑!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홀 안은 폐허가 되었다.
홀 내부뿐만이 아니라 층 전체의 바닥이 대부분 무너져 내렸고, 초토화된 흔적만이 남게 되었다.
어찌나 스킬의 위력이 높았는지 반대편의 절멸 마법진까지도 그 여파에 파괴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절멸 마법진의 존재 유무는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커흑…….”
쓰러져 있던 알리사가 움찔 팔을 움직였다.
순간 광역기에 휘말려 의식이 날아갔었지만, 지금은 어떤 싸움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예전에 비해 많이 녹슬었구나. 아무리 힐러를 택했다고는 해도, 네가 이렇게 쉽게 당해 줄 리는 없었을 텐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가를 찌푸린 알리사가 시선을 옮겼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크루거의 모습이 보였다.
“길드를 떠난 뒤에 한참을 활동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만약 너만 떠나지 않았다면, 최소 반년은 일이 더 빨라졌을 텐데 말이야.”
“…….”
그의 말에 알리사는 대꾸하지 않았다.
역대 최고의 실력자라 꼽혔던 둘인 만큼,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고작 마흔 명을 상대로 한 이런 장면 정도야 그도 알리사도 수없이 만들어 냈었다.
“뭐, 여러모로 시기가 안 좋았어. 에일이라는 녀석이 워로드를 처음부터… 아니 반년만이라도 더 일찍 시작했다면, 가능성이 보였을지도 모를 텐데.”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야.”
“글쎄. 미안하지만 이미 승부는 갈린 것 같은데.”
크루거가 두 팔을 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처참한 폐허가 된 주변엔 온통 시체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실력자들이었다고는 해도, 크루거의 압도적인 공격력을 바탕으로 한 전설급 광역 스킬 앞에선 전멸을 피하지 못했다.
회생의 여지조차 없이 접속이 끊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윽…….”
“괜히 움직이려고 애쓰지 마. 힘만 더 들 뿐이니까.”
스릉!
크루거가 검을 꺼내 들었다.
“아무리 너라도 살려 줄 수 없는 건 알고 있겠지? 난데없이 돌아와서 사고를 치고 다닌 건 유감이지만, 사실 이번 일만 끝나면 언제든 다시 돌아와도 돼. 밀린 이야기나 나누면 다들 좋아할 테고.”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렇다면 이게 우리의 마지막 작별 인사라는 거겠군. 그건 좀 아쉽네.”
콰악!
크루거의 검이 꽂히며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 * *
“헉……!”
쓰러졌던 에일이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검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커다란 잔해 아래에 깔려 있었고, 그의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주변은 적막이 가득했다.
방금의 싸움은 이미 끝나 버린 상황.
그는 바닥이 부서질 때 아래층으로 떨어져 내렸고, 주변엔 아군 랭커들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X발.”
이마를 감싼 에일이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건전한 언어생활을 위한 필터링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