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정상으로 (2)
“이길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들려오는 말소리에 에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옆에선 루가 걱정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신격의 입장에서도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에일과 계약 관계로 묶여 있는 루라면 더더욱 그랬다.
“갑자기 누구랑 말하는 거지?”
그와 마주하고 있던 아폴리온의 간부 익시온이 물어 왔다.
그가 신격과 대화를 한다 해도 옆에서 지켜볼 때는 혼잣말을 구시렁거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몰라도 돼.”
에일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오래 볼 사이도 아니고 그가 무슨 시선으로 보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지금 급한 쪽은 우리니까.’
에일은 슬쩍 시선을 돌려 뒤편을 바라봤다.
바깥에서 격렬한 싸움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급히 그를 쫓아 따라 들어오는 길드원들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폴리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방 안에 간부인 익시온이 있으니 그를 간단히 처리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 랭킹 4위의 실력자를 상대로 에일의 승리를 점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건 적들만 아니라 그의 동료들조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동안 놀고 있던 게 아니거든.’
파앗!
장검을 든 에일은 곧바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에 쫓기는 입장에서 이것저것 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일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상대만을 노리지 않았다.
결국 핵심은 뒤편에 놓여 있는 절멸 마법진이었다.
쩌엉!
하지만 순식간에 움직인 익시온은 그런 에일의 움직임을 간단히 막아 냈다.
“이런 게 통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익시온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에일은 눈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가로막아 선 것만으로 길목을 완전히 차단당한 모양새였다.
그의 말대로 이 정도 수준의 대결에서 요행을 바라기엔 무리였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서는 방심하는 게 심각할 만큼 멍청한 것이었다.
사실상 랭커를 상대로는 바라면 안 될 일이었다.
“날 보고도 바로 방을 바로 빠져나가지 않길래 무슨 생각인가 했는데. 고작 이럴 생각으로 달려든 건 아닐 거라 믿어.”
“거 참 말도 많네!”
후웅!
에일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익시온은 가벼운 움직임으로 훌쩍 물러나 피했다.
“뭐, 좋아. 어디 해 보자고.”
철컥!
손을 올린 익시온은 투구의 바이저를 내렸다.
얼굴이 완전히 가려지며 온몸을 뒤덮은 갑옷 차림이 되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선을 지닌 검은 갑옷.
워로드에서 단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던 방어구 세트였다.
그들이 본 실력을 보이며 진짜 랭킹을 드러냈을 때 당시 익시온이 교체한 장비이기도 했다.
당연히 어떤 효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최소한 기존의 장비보다 더 좋은 스펙을 지녔을 것이라는 것 만큼은 확실했다.
콰아아앙!
돌진기로 곧장 다가온 익시온이 공격을 내리찍었다.
에일은 옆으로 돌며 피하긴 했지만 그가 대검을 휘두르고 난 자리엔 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다.
스킬도 섞이지 않은 평타 만으로 생겨난 흔적.
로덴만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그 역시 패시브에 꽤나 비중을 두고 투자한 케이스였다.
익시온은 기사 클래스 특유의 짧은 쿨타임을 지닌 돌진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가며 에일을 압박했다.
그렇게 한껏 몰아치는 사이.
에일에게서 작은 틈이 생기자 틈을 포착한 익시온의 대검에서는 검은빛이 생겨 났다.
영웅 등급의 공격 스킬, 대지 가르기.
콰과과광!
대검이 바닥을 긁으며 검격을 뻗었다.
대지가 갈라지며 커다란 충격파가 날아갔고 순식간에 에일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하나 에일은 ‘수호의 방패’ 스킬을 통해 방어막을 펼쳤고 공격을 완벽히 방어해 냈다.
캐스팅을 생략했다고는 해도 워낙 신앙심 스탯이 높은 덕에 스킬 하나를 상쇄시키는 것쯤은 쉬웠다.
뭣보다 괜히 순수 방어 스킬인 수호의 방패가 유일 등급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허?”
너무 간단히 막아 낸 모습에 익시온도 흠칫 놀랐다.
이단심판관에게 신성 마법은 단지 보조 수단일 뿐이었을 터.
설마 보조 스킬 만으로 자신의 공격기를 정면에서 막아 낼 줄은 몰랐다.
이는 오히려 전문 사제 이상으로 신성 마법을 구사하게 만들어 준 ‘구도자의 열성’ 스킬의 존재 덕이었다.
‘빈틈이다……!’
익시온은 순간 에일을 확실히 잡았다고 생각한 것인지 너무 큰 동작을 보였다.
최소한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뒤로 쭉 물러나는 것이 상대 입장에서 일반적인 대처였던 탓이었다.
하나 그 차이를 만들기 위해 에일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은 채 코앞에서 스킬을 받아 냈다.
이걸 놓치지 않고 잡아야 했다.
파앗!
미리 준비해 둔 동작을 이용해 에일은 검을 뻗었다.
반면 익시온은 그제야 휘둘렀던 대검을 정면으로 가져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데미지를 받지 않고 막아 낼 셈이었다.
하나 에일은 거기서 역극 스킬을 사용해 익시온을 빙 돌며 단숨에 뒤로 파고들었다.
스킬의 부가 효과로 약간의 가속까지 붙으며 장검은 그의 목을 노렸다.
쩌엉!
하지만 익시온은 바로 몸을 틀며 반응했다.
“이거 얕보면 안 되겠는데?”
빠악!
목을 노리던 장검은 맥없이 막혀 버렸고, 에일은 익시온이 뻗은 발에 차여 주르륵 밀려났다.
역시나 역극 스킬 만으로는 최고 수준의 랭커에게 통하리라 기대하기엔 너무 얕은 수였다.
‘그래도 아까 그 상태에서 막아 낼 줄이야…….’
인상을 찌푸린 에일이 익시온을 응시했다.
방금 보였던 그의 큰 동작은 일반적인 랭커 간의 대결에선 치명적인 실수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하나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반응을 해 보였다.
‘정상급 랭커의 실력이라는 건가.’
익시온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서라면 에일도 잘 알고 있었다.
커다란 대검에 투구까지 눌러쓴 판금 갑옷.
우월한 스탯이 받쳐 주자 강한 데미지와 안정감이 따랐고, 무엇보다 그와 걸맞지 않게 빠른 움직임까지 챙긴 그는 모든 기사 클래스의 이상향과도 같았다.
하나 무엇보다 그의 특징은 높은 등급의 패시브를 중첩해 대검 숙련도에 매우 큰 보너스를 준 것이었다.
그 덕에 익시온은 커다란 대검을 마치 한 손 검처럼 자유자재로 유연하게 사용 가능했다.
카가가가각!
“큭……!”
에일이 바짝 붙으며 근접전을 유도해도 익시온은 피하는 기색 없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리치가 긴 대검을 사용하면서도 단검까지 병용하는 에일에게 오히려 주도권을 쥐며 싸움을 이끌어 나갔다.
‘역시 보고 들었던 것보다 훨씬 강해. 괜히 랭킹을 치고 올라간 게 아니란 소리겠지.’
그동안 익시온은 워로드에서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만큼 영상으로 분석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들을 보여 주고 있었다.
영상 너머로 분석하고 있을 때만 해도 실력이 느껴졌는데, 심지어 지금은 한층 더 강해진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경갑 방어구에 비해 밀릴 수밖에 없는 중갑의 속도를 익시온은 단지 빠른 판단으로 커버해 버렸다.
다음 동작을 위해 사전 동작을 취하려 했을 때부터 일찌감치 미리 예상하고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그야말로 현 랭킹 4위 다운 실력이었다.
‘하지만…….’
싸우기 전 에일이 루에게 했던 말은 단순한 허언이 아니었다.
‘뭐지……?’
무언가 드는 이질감에 익시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당장에라도 쓰러뜨릴 듯 몰아붙이고는 있었지만 처음 예상했던 그림과는 달리 에일은 분명히 공격에 반응하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그가 우세에 놓여 있는 건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점점 격차를 따라오고 있는 듯한 에일의 움직임은 계속해서 기분 나쁜 느낌을 주었다.
‘이 묘한 이질감… 설마 알레나가 말했다던 그건가?’
역대 모든 게임 그리고 알키오네 길드를 통틀어서도 단 두 명밖에 사용하지 못한 동조율의 컨트롤.
그의 어렴풋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미 오버드라이브에 돌입한 상태에서 159퍼센트에 달한 에일의 동조율은 지금도 서서히 올라가는 중이었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에일의 실력.
6대 길드장인 유론을 비롯해 수많은 실력자와 랭커들과의 싸움을 이어오며 에일은 그동안 동조율의 상한을 꾸준히 끌어올려 놨었다.
“이 자식……!”
인상을 찌푸린 익시온은 아껴둔 스킬을 발동했다.
설마 6대 길드장도 아닌 상대에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 기분 나쁜 예감을 끝내기 위해 더 이상 시간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파아앗!
‘드디어 나왔군.’
상대가 보이는 낌새에 에일이 반응했다.
익시온의 몸에선 검은 연기가 풀풀 피어올랐고, 그것이 공격기가 아닌 버프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는 익시온의 유일 등급 주력 스킬이 나온 것이다.
모든 스텟을 큰 폭으로 상승시키는 강력한 개인 버프 스킬.
2시간이라는 긴 쿨타임 때문에 그가 아껴 놓았을 줄 알고 있었다.
콰아아앙!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겉모습처럼, 급상승한 스탯 덕에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위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지금의 싸움이 유저 간 대결인 이상, 스킬을 지닌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더 아끼려 했다간 본전도 못 찾아.’
파아아앗!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익시온이 위협적으로 다가온 상황.
에일은 곧바로 스킬을 발동시키며 맞대응했다.
그에겐 익시온이 꺼내든 유일 등급의 버프보다 오히려 더욱 강력한 ‘전설 등급’의 버프 스킬이 존재했다.
[‘여신의 가호’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8% 증가합니다!]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감소합니다!]
[모든 신성 마법의 캐스팅 시간이 삭제됩니다!]
[남은 시간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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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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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가 짤막하게 스쳐 지나가는 동시에 에일은 곧바로 두 손을 모으며 기도했다.
후우웅!
콰아아앙!
순식간에 떨어져 내린 에일의 스킬이 익시온을 강타했다.
거대한 빛의 검이 윗층 천장까지 부수며 떨어져 내렸고, 떨어진 주변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으윽…….”
하지만 승부가 난 것은 아니었다.
익시온은 그 짧은 순간에 반응하며 기사 클래스의 방어 스킬을 펼쳤다.
하지만 그 방어막조차도 ‘심판’의 위력을 감당할 수는 없었고, 산산조각난 상태였다.
이것이 두 버프 스킬이 만들어 낸 차이였다.
단순한 스탯의 증가량은 익시온에 비해 밀렸지만, 부가 효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모든 신성 마법을 즉발로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효과.
캐스팅 과정을 생략하고 최대 위력으로 떨어뜨린 유일급 공격계 신성 마법, 징벌의 효과를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하하…….”
익시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으로 들어간 유효타에 그의 이마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알레나의 눈도 여전하네. 아무리 동조율 사용자라고는 해도 벌써 이 정도로 컸을 줄이야.”
에일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새 뒤바뀌어 있었다.
알키오네 시절 이후로 이 정도 재능을 지닌 플레이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고 그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는 미련 없이 전설 등급 스킬을 꺼내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