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팀플레이 (4)
댕강!
무릎이 꿇린 채 포박당해 있던 죄인의 목이 날아갔다.
마법진을 가운데에 두고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결사단의 마법사들은 갑작스레 난입해온 에일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붙잡힌 결사단원들은 역시나 모조리 처형을 당했다.
사방이 끈적이는 핏자국으로 뒤덮였고 마지막은 결계를 구성 중인 마법진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끝이네.’
마무리가 끝나자 에일은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결사단원 사이엔 조금 다른 차림의 남자도 한 명 쓰러져 있었다.
어깨에 새겨져 있는 길드 마크만 보더라도 그가 아폴리온의 길드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실력에 비해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자였는데 랭킹권 진입까지도 노려볼 만한 준랭커 수준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에일의 랭킹은 어느새 74위에 진입해 있었다.
유론과 전투를 치른 뒤 당시의 움직임과 판단까지 모두 반영되어 랭킹이 오른 것이다.
100위권의 하이 랭커는 물론 랭커도 아닌 그가 단신으로 에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많이 숨어들었을 줄이야…….’
시체를 내려다보던 에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엉망이 된 벨하벤의 거리엔 날뛰는 악마의 하수인을 제외하고도 적대 랭커들의 숫자가 많았다.
분명 철십자에서는 공주가 도착한 이후 도시의 경계를 강화해 이런 사태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아폴리온에서 무슨 수를 쓴 건지 상당히 많은 숫자의 랭커가 침투해 들어와 있었다.
모습을 감추고 숨어 있던 랭커들이 하나둘 나타나며 점점 전력 차이가 드러나는 형세였다.
‘어림잡아도 도시 안에 있던 전력만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하지만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지. 결계 해제가 어느새 거의 다 끝나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결계를 해체하기 위해 흩어져 여러 마법진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랭커들이 지키고 있어 실패한 곳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당장 창밖으로 보이는 결계의 모습만 해도 여기저기 그어진 균열들이 눈에 띄게 커진 상태였다.
이제 동쪽에서 또 다른 의식 장소를 찾아 진입했다고 한 시르 쪽만 마무리되면 결계는 무너져 내릴 것이었다.
쿠구구궁!
그 순간 요란한 진동이 도시 전체를 울렸다.
바깥을 보자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결계를 볼 수 있었다.
마침 시르가 마지막 목표 지점을 제압해 무력화시킨 듯 보였다.
유지에 필요한 마법진들이 파괴되자 대규모 결계는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갈라지는 균열은 결계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어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거대한 검은 마력이 도시의 중심부에서 높게 쏘아졌다.
결계의 중심에 닿은 검은 마력은 결계 전체를 한 차례 휘감았다.
“역시… 쉽게 놓아 줄 생각은 없나보네.”
바깥을 바라보던 에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행적만 보더라도 이대로 순순히 놓아줄 아폴리온이 아니었다.
무언가 또다른 수를 이중으로 쳐 놓았을 거라 생각했고, 이런 상황에 쓰일 만한 금지된 마법의 존재를 확인해 보기까지 했다.
원래 금지된 마법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어 얻어내기 어려웠지만 다행히 결계에 관련된 마법은 그동안 여러 번 노출이 된 적이 있었기에 다행히 찾을 수 있었다.
‘결계의 붕괴를 일시적으로 늦추는 마법. 방금 그건 일종의 보험이었겠지.’
당장에라도 휘청이며 무너질 것만 같았던 도시의 결계는 어느새 우뚝 멈춰 있었다.
균열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붕괴 과정이 멈춘 것은 확실했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간단했다.
지지대를 잃은 대형 결계에 마력을 쏘아 일시적으로 마력을 공급하며 무너지지 않게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구조의 불안정성 때문에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시간 벌이 면에서는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여신님, 저거 얼마나 갈까요?”
“저 정도라면… 아마 1시간은 버틸 것 같구나.”
에일의 질문에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루의 대답이 들려왔다.
저 결계가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려면 대략 1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결계의 규모를 고려하면 예상했던 것보단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 좋지 않은 상황인 건 아니었다.
‘1시간이라면 충분히 짧은 시간이니까.’
그 시간 동안만 버티는데 성공하면 도시로부터 안전하게 대피가 가능해진다.
물론 문제가 생겼다는 걸 확인한 아폴리온은 어떻게든 그 시간 안에 끝장내려 달려들 것이다.
이제 사방에서 몰려들 랭커들과의 싸움을 각오해야 했다.
‘뭐지?’
하지만 현장을 정리하고 바깥 거리로 나온 에일은 의아함을 느꼈다.
예상과는 달리 이상할 정도로 아폴리온의 반응이 잠잠한 것이다.
악마의 하수인들이 사람들을 공격하며 날뛰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잠잠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여기서 공주를 놓아줬다간 아폴리온이라 해도 답이 없을 텐데… 대체 무슨 꿍꿍이지?’
띠링!
그때 로덴에게서 조금 전 도착했던 메시지가 화면에 재차 떠올랐다.
계속 확인을 하지 않자 재차 알림이 울린 것이다.
그가 막 결사단원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도중에 날아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메시지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발신인을 확인한 에일은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하려 팔을 뻗었다.
로덴이라면 지금쯤 지하수로에서 추적자들에게 쫓기고 있을 터였고 안 그래도 가장 불안하던 부분이었다.
로덴과 리아가 충분히 강하다고는 하나 아폴리온의 상위 랭커들이 몰려들면 답이 있을 리 없었다.
만약 추적자들에게 발각되었다면 두 동료의 목숨은 물론 이번 일의 성패가 달린 공주를 잃게 되는 것이었다.
하나 그렇게 열린 메시지 속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 * *
도시의 내성에서 준비되고 있는 대규모 절멸 마법.
안에 갇힌 모든 시민과 유저들의 목숨을 앗아 가는 무시무시한 광역 즉사 마법이었다.
메시지가 가져온 충격적인 소식에 시르조차 두 눈을 잠시 질끈 감았다 떴다.
“어쩐지 움직임이 이상하더라니…….”
결계에 커다란 균열이 생긴 뒤 오히려 아폴리온의 길드원들은 모두가 내성 쪽으로 움직였다.
공주에 대한 추격조차 포기하고 내성에 자리 잡은 아폴리온의 움직임에 의문이 가득했는데, 괜히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었다.
“로덴이 보낸 거면 헛소리일 리도 없을 테고. 결계가 유지되는 시간 안에는 무조건 발동된다는 건데 그렇다면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답이 없어. 직접 나서서 놈들을 제압해야 한다는 소리야.”
“아무래도 그렇겠지.”
시간 안에 절멸 마법진을 멈추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
아폴리온의 공세를 버티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의 입장이 되어 시간에 쫓기게 된 상황이었다.
“자기들까지 모조리 휘말리게 마법을 설정해 두진 않았을 테고, 유일하게 안전한 지역은 내성 쪽이라고 봐야겠군.”
시르의 말에 에일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절멸 마법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방어의 목적도 있을 테지만 괜히 한 곳에 모여든 게 아닐 터.
일이 어찌 됐건 일단 살아남으려면 중심부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전력으로 맞붙는다고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
“그래, 곤란한 상황이지.”
아군 랭커들을 비롯해 남은 철십자의 길드원을 모조리 끌고 간다 해도, 내성에 방어를 목적으로 눌러앉은 아폴리온을 밀어낼 수 있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안 그래도 지금의 전력 차는 절대적으로 아폴리온이 우위에 서 있었다.
길드 NPC들을 포함해 도시 안의 모든 전력을 끌어 모은다고 해도 전력상 열세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 * *
절그럭!
대도시 벨하벤의 앞.
화려한 중갑옷을 차려 입은 대규모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수도에서 나온 왕국 기사단이 도시의 주변을 모두 틀어막은 채 통제 중이었다.
도시를 통제한다는 왕명이 떨어진 이상 그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자식들 진짜 거슬리네. 마음 같아선 쓸어 버리고 싶은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라. 오히려 악수일 뿐이니까.”
철십자의 두 간부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습격 소식을 듣고 모여든 철십자측 길드원들은 현재 도시를 막아선 기사단과 팽팽히 대치 중이었다.
대도시라는 길드의 주요 거점을 완전히 기습당한 데다가 길드장까지 위험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왕가 직속이건 뭐건 당장이라도 기사단에게 검을 들이댈 만큼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의 철십자조차 쉽게 그들을 건드릴 순 없었다.
왕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고,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에 무턱대고 움직였다간 더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다.
애초에 강제로 기사단을 치워 낸다고 해도 결계를 뚫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었다.
지금 그들의 입장으로선 도시를 감싼 결계가 사라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사이.
왕국 기사단의 시선을 피해 도시로 몰래 다가선 무리가 있었다.
‘균열이 가장 큰 곳… 바로 여기야.’
수풀을 헤쳐 나온 알리사가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결계를 바라봤다.
기사단의 눈이 대치 중인 철십자의 병력 쪽으로 온통 쏠린 틈을 타 반대편으로 숨어들어 결계의 앞에 도달한 것이다.
파직!
하지만 여전히 굳건한 결계 탓에 진입은 불가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깨질 것 같이 뒤흔들렸지만 금세 다시 원상태를 유지하며 접근을 차단했다.
스윽.
그러자 침착한 표정의 알리사는 정체 모를 검은 돌을 꺼내 들었다.
상황을 파악하고서 엘트리스를 먼저 떠났을 때 가장 먼저 미리 구해 둔 아이템이었다.
정보를 모아 두는 것만큼은 그동안 게을리하지 않았던 데다가 한때 같은 길드 출신이었기에 어떤 수를 쓸 건지 정도는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츠츠츠츠츳!
아이템을 가져다 대자 결계에서 강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이 거대한 결계 자체를 파쇄하는 건 무리더라도 굳건한 결계의 벽 일부를 일시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쯤은 가능했다.
파앗!
결계에 조그만 구멍이 뚫린 모습.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크기였고 그마저도 얼마 지나면 다시 붙게 될 구멍이었다.
알리사는 재빨리 숲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따라온 수많은 유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6대 길드, 나이트메어와 여명의 길드원들이었다.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한 번 들어서면 그걸로…….”
“그런 건 상관없어.”
“빚은 갚아 줘야지. 안 그래?”
솔로스와 카린이 그녀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틈새를 통해 가장 먼저 진입한 그들의 모습은 결계 너머로 사라졌다.
길드장이 내부로 들어선 이상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6대 길드의 간부와 랭커들을 포함해 이곳에 모여든 수백의 유저가 도시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