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팀플레이 (2)
콰과과과!
강렬한 기의 발산에 바닥에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유론이 쏘아 낸 원거리 창격이었다.
그가 스킬을 활성화하자 무기에 옅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고 이런 창격을 쏘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딱히 숨겨 둔 스킬은 아니었고 이미 유명인사였던 유론의 메인 스킬로 알려져 있었다.
그 덕에 에일과 네슈아도 이 스킬의 존재에 대해선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알고 있었다고 해서 쉽게 대처가 된다면 6대 길드장의 주요 스킬로 자리 잡지도 못했을 것이다.
콰아앙!
주변 거리를 온통 박살 내며 격렬한 전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루는 머리를 짚었다.
“많이 답답한가 보지?”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
커다란 보랏빛 뱀이 나타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하늘의 신격이자 ‘은밀한 탐구자’, 레녹스였다.
“뭐, 그럴 만도 하지. 기껏 다 가졌다고 생각한 성물이 멀어지고 있으니. 하지만 그렇게 초조해서는 될 것도 안 될걸.”
“시끄러워.”
퉁명스레 대답한 루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무시하긴 했지만 그의 말에 정곡을 찔린 그녀였다.
성물을 얻어내기까지 거의 모든 장애물을 치워냈는데 마지막 난관에서 이렇게 될 줄은 알 수 없었다.
“뭣보다 더 이상 성물을 걱정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레녹스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빛의 교단의 대항마로 두 교단과 손을 잡았던 아폴리온 길드는 느닷없이 그들을 버리고 악마들과 손을 잡았다.
심지어 그들은 이미 악마들과 오래 전부터 손을 잡은 것 같았다.
단순히 이용할 패를 갈아치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두 신격을 속인 채 더욱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만약 그들이 모든 길드를 물리치고 득세하기 시작한다면 신격들에겐 더 이상 성물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폴리온의 적극적인 협조를 등 뒤에 업은 악마들이 신격들의 위치를 뒤흔들며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 수 있었다.
콰드득!
순간 에일이 위험했던 장면이 지나가자 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건 여러모로 괴로울 때가 많았다.
‘지금은 일부가 조용히 숨어 있어서 드러나진 않았지만 도시 내의 전력 차이가 너무 심해. 거기다 지금 이 싸움을 사도들이 이겨 낸다고 해도…….’
루는 조금 전부터 도시 중심부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직접 내성 안으로 시야를 돌려 확인이 되는 상황도 아닌지라 계속해서 굉장히 거슬렸던 부분이었다.
빨리 이번 싸움의 결착을 내고 결계를 풀어내지 못하면 사건이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이런, 벌써 발견된 모양이군.”
마찬가지로 바깥 상황을 보고 있던 레녹스가 말했다.
“발견돼……? 뭐가?”
“네 사도가 공주를 숨겨 뒀던 장소 말이야. 아폴리온에게 들켜 버렸어.”
* * *
공주를 추적 중인 아폴리온 측 길드원들은 미리 확보해 둔 내부 지리를 토대로 수색에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수상한 통로를 하나 발견했다.
바로 벨하벤의 지하 수로 내부로 통하는 통로였다.
굉장히 오랜 세월에 걸쳐 방치되어 노후화된 수로는 중간중간 저 레벨의 몬스터가 등장하긴 했지만 아무런 가치가 없어 첫 발견자에게도 버려진 곳이었다.
대부분 정직한 구조로 되어 있는 이곳 벨하벤 내에선 가장 알 만한 사람이 적을 듯한 장소였고, 그래서 에일도 신전에서 세이아 공주를 빼낸 뒤 그녀를 이곳 아래에 숨긴 것이었다.
하나 역시 능숙한 랭커들의 눈을 피하기 힘든 법.
냄새를 맡은 랭커들은 곧장 내부로 진입했고 다른 쪽에 연락까지 한 뒤였다.
부스럭!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빛의 교단의 사제와 세이아 공주는 지하 수로의 깊숙한 곳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제가 쓰러진 사이에 그런 일들이…….”
어느새 의식을 회복한 세이아가 손톱을 까득 씹었다.
기껏 회복해 깨어났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계 때문에 도시를 나갈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좋은 상황이라곤 할 순 없겠지만 이번 일이 모두 해결될 때까지는 이곳에 숨어 있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사제의 말에 세이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 나서서 무언가를 하겠다고 우길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하나 그들이 가만히 앉아 쉬고 있을 시간은 생각보다 더욱 짧았다.
“여기 숨어 있었군.”
“이, 이런……!”
내부로 진입한 아폴리온의 랭커들이 그들의 앞까지 찾아왔다.
총 네 명의 인원, 심지어 그들 중엔 최고 간부인 다고스까지 함께 있었다.
사제는 상대를 보자마자 스스로 적수가 못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서 이 주변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먼저 가십시오.”
“그럴 수는…….”
“제 말을 들으십시오. 자매님의 곁을 지킬 보좌로 성기사도 아닌 제가 선택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제는 세이아를 살짝 뒤로 밀어냈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에일에게 그가 공주의 동행자로 선택된 이유는 우선 뛰어난 신성 마법 사용자라는 것.
그리곤 배신할 가능성이 없이 사명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신실한 신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파아아앗!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자 새하얀 결계가 주변을 감싸며 펼쳐졌다.
추적자들의 앞뒤를 틀어막은 결계는 랭커들의 스킬로도 쉽사리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제가 지닌 뛰어난 신성력에 더해 자신의 생명력마저도 소진하며 특수한 신성 마법을 사용한 덕이었다.
랭커들도 쉽사리 깰 수 없을 만큼 강한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 사이를 막고 있는 결계가 풀리는 순간 단숨에 살해될 터였지만 사제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서 가십시오!”
사제의 거친 외침이 수로를 울렸다.
그러자 얼굴이 창백해진 세이아는 숨을 헐떡이며 달렸다.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뒤였지만, 달리는 데 지장이 있지는 않았다.
빛의 신전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은 덕에 몸은 모두 회복되어 후유증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본적인 체력 자체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모험가가 아닌 일반인에게 이런 옛 수로를 누비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방에 뻗은 식물들과 불규칙한 구조들 탓에 얼마 달리지도 못하고 숨이 차올랐다.
‘어, 어떻게 하지…….’
세이아가 덜덜 떨리는 팔로 벽을 짚었다.
하루아침에 일가족 모두가 살해당한 데다가 왕궁과 대의회까지 장악당했다.
심지어 결계로 갇힌 도시 안엔 악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자신을 죽이려는 추적자들까지 가득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그녀가 헤메고 서 있는 곳은 미궁처럼 복잡한 옛 수로였다.
아무리 냉철하던 세이아라도 눈이 빙빙 돌아갈 지경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덥석!
그때 틈 사이에서 나온 손아귀가 그녀의 팔목을 집었다.
깜짝 놀란 세이아가 비명을 지르려 하자, 벽 사이에서 나온 남자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 계셨군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녀의 앞에 남녀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에서 에일의 돌파를 도왔던 로덴과 리아였다.
“누, 누구시죠?”
입을 막았던 손길이 물러나자 세이아가 물었다.
당연하게도 공주는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뿌리의 길 출구에서 마중 나갔을 때도 공주는 기절했던 상태였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게… 뭐라고 해야 하죠?”
“에일 님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난처해하던 리아 대신 앞으로 나선 로덴이 답했다.
에일에게 공주가 숨어 있는 위치를 전해들은 뒤 이곳에 찾아온 것이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다, 다행이군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세이아는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죽을 줄만 알았는데 의지할 사람이 둘이나 찾아왔다는 건 큰 안정감을 주었다.
왕가가 장악당한 지금 같은 상황인지라 외부인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에일이 보낸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럼 어서 바깥으로 가죠. 방금 저쪽에서 추적자가 찾아왔어요.”
“아뇨, 바깥으로 가면 오히려 금방 발견될 겁니다. 악마들까지 날뛰고 있어서 더 위험하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서 시간을 벌어야겠죠.”
로덴이 세이아를 틈 사이로 끌어당겼다.
철십자 측 길드원들을 불러 모아 공주를 보호한다고 해 봤자 충분히 준비를 해 왔을 아폴리온에게 정면 승부로는 답이 없었다.
노출된 지상보다는 이곳 지하 수로의 거대하고 복잡한 지형을 이용해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리 지하 수로가 미로 같은 지형을 지녔다고는 해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었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지상 쪽에서 최대한 빨리 결계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 *
키이이익!
벽을 부수며 난입한 커다란 괴수가 포효했다.
도시에 소환되었던 하위급 악마의 하수인이었고 이단의 낙인이 머리 위에 찍혀 있는 정예급 몬스터였다.
하지만 기세 좋게 나타났던 것과 다르게 녀석의 팔은 세 갈래로 쩌억 갈라졌다.
뒤로 뛰어올랐던 에일과 네슈아가 검을 휘둘러 베어 낸 것이다.
물론 뒤로 물러나려는데 거슬려서 팔을 베었을 뿐 그들의 신경은 온통 괴물이 아닌 정면에 쏠려 있었다.
콰과과과과!
수없이 날아드는 창격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몸을 비튼 그들은 겨우겨우 회피해냈다.
물론 커다란 덩치를 주체 못 하고 빗나간 창격에 모조리 휘말린 괴수는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후우…….”
뒤로 물러선 에일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마치 같은 유저가 아닌 위협적인 보스 몬스터의 패턴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휘두르기만 하는 기본 공격조차도 원거리로 변환 가능하니 상대하는데 고역이었다.
‘괜히 6대 길드장의 주력 스킬 소리를 듣던 게 아니네. 하지만 창격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데에는 유지 시간이 있으니까…….’
유론이 사용한 스킬은 에일이 지닌 ‘여신의 가호’ 스킬처럼 유지 시간이 존재했다.
쿨타임도 꽤 긴 편이었으니 무한정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걸 노리기엔…….’
그들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공주가 추적당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어서 결계를 부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단지 이번 전투의 상황만 따진다 해도 그랬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끈다면 그사이에 다른 아폴리온 측 랭커들이 몰려올지도 몰랐다.
이미 유론 하나만 해도 애를 먹고 있는데 그와 같은 고위 간부급이 나타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에일, 너 아껴 둔 스킬이 남아 있겠지?”
그때 함께 서 있던 네슈아가 입을 열었다.
마치 그가 쿨타임 탓에 전설급 스킬을 아껴 놓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이번엔 내가 먼저 쓸 테니… 그 뒤는 네가 맡아.”